2012년 8월 31일 금요일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함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올라온, 아무것도 모르는, 그리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오직 아는 것이라곤 ‘십자가의 도’ 밖에 없던 이 목사가 여러분들 앞에 서서 단순히 말씀을 증거 했지요. 얼마나 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는지, 또 얼마나 자주 여러분 앞에 이것을 시인하였습니까?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어린아이와 같던 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왔는지요. 이제 우리는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성공을 의지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어떤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다니요. 그래서 그가 설교하면 틀림없이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다니요.
형제들이여! 형제들이여!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목사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실수밖에 할 줄 모릅니다. 당신들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그 누구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원수 마귀를 기쁘게 할 뿐입니다.
나는 즐겁게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과 모욕을 받겠습니다. 만약 다시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할 수 있는 날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오! 교인들이여! 당신들은 우리의 사역을 통해 새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는 흘러가는 물과 같이 약하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허무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우리와 처음 함께하신 그 분께서 지금도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성자라고 불리는 프란체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성자 프란체스코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대답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통해서 내 강함과 지혜로움과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때때로 인간의 선택 기준과 다르다. 세상적인 조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목격하고 놀라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을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28∼29)

허드슨 테일러의 '비전 선언문'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 중국 내지 선교의 선봉자

♣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향하면 하나님이 공급하심이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아닌, 커다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실패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쪽과 인간을 향한 쪽으로 양면성을 가진다. 즉 신실하신 하난님을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이룰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 희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드린 모든 것은 얻은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모든 것은 잃은 것이다.
*성도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시간이 지난다고 더 편안해지지 않는다. 단지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기를 원 한다.

♣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가 성도의 모든 영역에 주가 되지 않으면, 어는 영역에서도 주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오직 순종만 필요하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 선교
*선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만약 흠잡을 데 없이 정직하게 행할 의향이 없다면, 선교사가 되지 않는 것이 좋다.
*선교사가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선교사가 될 시도를 해보라.
*선교사는 으레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상 명령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중국에서는 양복보다 중국옷이 편하다.

♣ 하나님의 인도
*오직 기도로써, 즉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은 기도가 먼저고 그 다음은 상식, 그다음은 어린 아이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시지  는다. 또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 고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만 한다.
*시련과 역경은 항상 비전의 확장과 축복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은 깊은 고난을 통해서 경험하기도 한다.

♣ 거룩한 생활
*성도들은 결코 불순한 생각들을 용납하면 안 된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해야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은 죄 없는 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죄와 공존하자  않는 것이다.

♣ 성도의 삶
*하나님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물질보다 귀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 다음 그분의 광대하심을 보여 주신다.
*열매와 비전은 다르다. 비전은 노력의 결과이고 열매는 삶의 결과다.

♣ 리더쉽
*작은 것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큰 것이다.
*영적 비저너리는 양 무리를 도와야지 지배해선 안 된다.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요 21:15-17).

 

긍휼 = 하향성의 삶을 선택하는 것


앤 설리반과 헬렌 켈러의 감동적인 이야기 중에서...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 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때 노간호사인 노라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초콜릿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용기를 얻은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이야기했고, 이야기도 많아졌습니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찼았습니다.


앤은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겼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습니다.

앤은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헬렌 켈러' 이고, 그 선생님이 앤 설리반입니다.  로라는 앤과 함게 있어주고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 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에 강의 내용을 적어주었습니다.

헬렌은 말합니다.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셜리반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설리번 선생님을 보고 싶어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앤 설리반, 헬렌 켈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녀의 스승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는 헬렌 켈러를 전세계가 놀라게한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앤 설리반입니다. 헬렌켈러를 가르칠수 있는 방법은 감각기관 뿐이었습니다. 헬렌켈러는 손가락으로 상징적인 터치를 통하여 말하는 법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도 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앤 설리반은 늘 되풀이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 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 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얻게되리라.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가정교회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소장으로 섬기고 있으며, 몇 년 전에 가정교회를 직접 개척하였다)

지난 2,000년도에 처음 가정교회를 시작할 때 가정교회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어느 이단으로 정죄된 교파에서 가정교회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런 오해는 사라진 것 같지만 다른 종류의 혼동이 있다. 기존 교회 안에 있는 셀 교회를 가정교회로 부르는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가정교회와 혼동하기도 한다. 이렇듯 아직도 가정교회와 관련해서 오해와 혼동이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가정교회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종종 내게 가정교회에 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직접 우리 가정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아직 가정교회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낯설다. 가정교회를 그저 작은 교회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가정교회는 기존교회들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기존교회들의 약점을 보완하는 면이 있다. 가정교회는 단순히 작은 교회가 아니다. 가정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는 흐름들 중에 하나이다. 기존교회가 많이 있는 지역에서는 이 교회가 좀 색다른 '대안교회'가 되겠지만 기존교회와 같은 형태의 교회를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지역에서는 어찌 보면 유일한 교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가정교회들처럼 모든 교회가 가정교회가 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가정교회를 교회의 한 형태로 인정하고 공부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1. 가정교회의 정의

가정교회는 소규모의 성도들이 가정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다. 앞서 말했듯이 기존교회 안에서 소그룹 구역 조직을 교회의 형태로 만들어서 가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가정교회는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가정교회는 가정단위로 이루어진 교회를 의미한다. 기존 교회는 한 가정에 모이기 힘들만큼 커지면 새로운 건물을 얻어서 교회를 확장하지만 가정교회는 분가를 시켜서 교회를 확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교회는 기존 교회와 다른 면이 있다.

2. 가정교회의 특징

가정교회는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가정교회의 기원은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는 중에 자기와 동역했던 브리스길리와 아굴라의 집에 모인 교회에게 문안하라고 했다(고전16:19). 그 부부의 집은 교회 공동체의 모임 장소였다. 그들의 가정교회 외에도 다른 예들이 있는데 마리아의 집(행12:12), 루디아의 집(행16:40) 눔바의 집(골4:15), 아킵보의 집(몬1:2) 등이 그것이다.

그 당시의 집이 갖는 의미가 지금과는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배를 위한 별도의 공간을 사거나 빌리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이 그 사례를 보여준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의 모습은 '집에 있는 교회" 즉 가정교회였다. 지금처럼 교회를 위해서 예배당이나 별도의 건물이 있는 교회에 익숙해서 그래야만 정상적인 교회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생활의 공간인 가정에서 모이더라도 교회의 역할을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교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정교회는 기존교회에 비해 훨씬 상호 관계적이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성도들 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구역조직이나 셀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는 소규모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친밀하다. 특히 예배의 형태에서 차이를 더 느낀다. 기존의 교회에서 예배는 인도하는 분이 앞에 있고 나머지 청중들이 관람하는 형태이다. 서로 간에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공간이나 형태상 관계적일 수 밖에 없다. 기존교회에서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맛볼 수 없지만 하나 됨을 느끼며 예배드릴 수 있다. 그리고 소규모이기 때문에 서로의 생활이 비교적 투명하다. 교회 안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외식이나 위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적다.

가정교회는 현재 우리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지금까지 교회는 별도의 예배공간을 필요로 했으므로 그 공간을 비리거나 사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땅값이 비싼 지역에는 교회를 시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무리해서 건물을 사거나 빌린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 재정적으로 풍부한 교회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교회는 재정적인 이유로 교회유지가 어려울 수 있다.

유지를 해도 작은 교회의 경우는 헌금의 많은 부분을 부동산 유지비에 사용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 예배드리는 대안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까지 만이라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가정교회 는 효율적이다. 기존교회에는 너무 할 일이 많다. 교회 건물을 유지하는데 돈과 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행정적인 필요에 너무 많은 돈과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행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나 협조가 필요하다. 기존교회의 열심 있는 성도들은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의 경건생활을 하지 못하는 마르다와 같은 신앙인이 되기 쉽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교회에서 맡겨진 본질적인 사역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돈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가정 교회는 선교전략에 필수적이다. 선교지들 중에는 복음을 직접 전하기 어렵거나 기존의 예배당을 지어서 교회개척을 하기 어려운 곳들이 있다.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고 교회를 개척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기독교 정서가 있는 선교지에서 기독교의 상징인 예배당을 지어 놓고 선굘글 하기보다는 가정에서의 친밀한 모임으로 교회를 시작한다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모슬렘 지역처럼 반기독교 정서가 깔려있는 곳에서는 가정교회는 대안적인 교회라기보다는 아주 전략적으로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정교회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교회이다. 마치 홈스쿨이나 대안학교들이 기존의 학교에 대안으로 나오듯이 가정교회가 기존 교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정교회들이 갖는 문제점도 많이 있다.

3. 가정교회의 약점과 한계

현 재 구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정교회 중에는 기존 교회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교회들이 있다. 그들은 초대교회들이 가정교회였던 사실을 강조한 나머지 그 이후에 예배당 건물을 짓고 대형화되는 교회를 배도한 교회로 취급한다. 가정교회가 가장 순수한 교회로 여기며 작은 교회를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형태의 차이로 부정할 수는 없다. 기존교회가 가정교회를 부정한다면 그것도 잘못이지만 가정교회가 기존교회를 부정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가정교회는 작은 교회의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작은 교회를 고집하는 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지만 작은 교회는 아니었다. 가정교회의 지체들의 친밀한 교제에 빠져서 교회의 사명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가정교회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똑같이 감당해야 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전도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는 전도에 헌신해야 한다. 가정교회였던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다만 전도의 전략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정으로 찾아가서 전도하고 가능하면 그 가정을 또 하나의 교회로 시작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전도를 통해서 교회의 성장을 기대한다면 가정교회는 교회의 확산을 기대한다고 할 수 있다. 전도를 통해서 교회를 계속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럴듯한 교회를 주장해도 온전한 교회가 되지 못한다.

가정교회는 기존교회에 비해 약점도 많이 있다. 가장 어려움을 겪는 문제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이다. 가정교회는 기존교회에 있는 주일학교가 없다. 그 대신 자녀들이 어른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기대한다. 예배 모임에서 아이들을 위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하지만 가정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신앙교육에 책임을 지도록 한다. 사실 성경적으로 보면 아이들의 신앙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가정교회에 서 기존교회와 같은 다양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없다. 그 대신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서로 가르치며 서로 배운다. 그렇지만 역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므로 다른 교회나 단체들이 제공하는 유익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한다. 청소년들의 경우 같은 또래들과 교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정교회를 떠나 기존교회에서 양육 받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는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 기존교회는 물론 다양한 단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간다.

가정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기존교회처럼 교회로부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목회자들이 이끌어가기가 어렵다. 교회가 작기 때문에 목회자들에게 충분하게 재정을 공급해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는 다른 곳에서 재정의 공급을 받는 목회자나 자비량 목화자들이 할 수 있으며 평신도들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이끌어 가야만 한다. 이것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는 앞으로 선교의 전략의 관점에서는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교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정교회에 대해서 쉽게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슬렘 선교를 전문으로 하는 프런티어 미션에서 교회개척을 위해서 가정교회가 필수적인 것을 인식하고 선교사들에게 가정교회에 관한 준비를 시킨다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동감하게 되었다. 어디서드지 교회개척이 예배당 건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면 가정교회는 그 대안이 될 수 있겠다.

복음주의권이 잘못 이해하는 6개 단어

랄프 윈터, ‘복음, 구원’ 등 재해석 요청

랄프 윈터 박사는 최근 선교한국(상임위원장 한철호 선교사) 주최로 삼광교회에서 열린 ‘랄프 윈터 박사 초청 강연회’에서 복음주의권에서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6개의 단어를 지적했다.

퍼 스펙티브스(PSP) 훈련생, 선교단체 대표 및 간사, 대학생, 청년 등 7백여 명이 모인 이날 강연회에서 윈터 박사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 ‘구원’, ‘믿음’, ‘은혜’, ‘에클레시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 단어들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복음을 좁은 의미로, 믿음을 단순고백으로 이해

그 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을 단순히 ‘구원의 메시지’로 좁게 이해하고 있다”며 “하지만 성경에서 ‘복음’은 구원의 메시지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원’에 대해서도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통틀어 이뤄지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설명했다.

윈터 박사는 또 “종교개혁 이후 ‘믿음’이라고 하면 어떠한 사실을 내가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을 떠올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단도 똑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며 구약의 아브라함은 신약에서 말한 믿음을 몰랐지만 구원을 받았다”면서 “‘믿음’은 단순히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단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신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혜’라는 단어도 “단지 자격이 없는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죄를 정복하는 능력과 힘”이라고 말했다.

흔히 교회로 번역되는 ‘에클레시아’는 신약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오늘날 서구화와 개인주의 때문에 교회가 신약에 나오는 대가족 중심의 에클레시아를 이루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가족 공동체를 해체하기까지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본래 의도는 가족도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어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지 결코 가족과 경쟁관계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는 죽고 난 뒤 합류하는 나라로만 생각”

‘하 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보통 죽고 난 뒤 합류하는 나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면서 “복음이 전파된 이 땅에서까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윈터 박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은 지금 교회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 일”이라며 “그러나 결핵, 말라리아, 뎅기열과 같은 질병을 퇴치하는 일 등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최전선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적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편 윈터 박사는 이슬람의 확산에 대해 “이슬람은 기독교 확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이슬람 안에 있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활용하여 무슬림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파키스탄 북부의 일부 무슬림들처럼 그들의 공동체를 떠나지 않으면서 더 많은 무슬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순절 교단, 구원의 기쁨만 가르쳐 기독교 피상적 이해

아 프리카, 남미 등 남반구에서 오순절 교단이 크게 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부 오순절교단 교회들은 피상적이고 약하며 교인들도 상당수가 돈을 벌거나 단순히 천국에 가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향해 갈 것을 이야기하시지만 일부 오순절 교단 교회들은 구원의 기쁨만을 가르쳐서 기독교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고 지적했다.

건물 패러다임

'교회'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이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진리는 이것이다. "교회(church)는 건물(building)이 아니다." 그 건물은 예배당이지 교회일 수 없다는것이다. '예배당'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예배(禮拜) 의식(儀式)이나 그밖의 모임을 위(爲)해 세운 건물(建物)' 그렇다. 예배라든가 다른 여러 가지 모임을 위해서 세운 건물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예배당을 자꾸 성전이라고 부른다. 주님이 임재해 계시는 성전말이다. 이것은 구약의 패러다임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장소와 공간을 지정하셔서 그곳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곳에 임재하셨다. 그곳이 바로 성전이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더 이상 그런 패러다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성전으로 주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장 19절 이하를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주님이 육체로 오신 신약 이후에는 더 이상 건물로 존재하는 성전은 없다. 구약시대처럼 어느 특정한 장소를 지정해서 그곳이 성전이다. 이곳에 주님이 임재하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약시대 이후로는 모든 성도들의 육체 가운데 성령님이 임재해 계시며 그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 가운데 함께 하신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고 교회인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temple of God)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the Spirit of God)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Or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from God, and that you are your own?"(NASB)

이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의 다른 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교회는 구약적인 패러다임(다시 말해 옛 언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건물이 성전인 것처럼, 목회자가 구약의 제사장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경적이기 보다는 유교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교적인 패러다임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를 만든 것이다(너무 과격한 표현인가?).

그러므로 새로운 변혁이 필요하다. 즉 성경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성서로 돌아가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고 살펴보고 겸손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 문화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새로운 변혁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인 교회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주님이 이 시대 가운데 일하실 수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교 회가 희망이다. 교회가 이 시대의 소망인 것이다. 교회가 다시 회복되고 성경적인 모습으로 세워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가정들이 회복되어지고 영혼들의 추수가 일어날 것이다. 이 땅의 변화되고 주님께 돌아오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교회가 열쇠다.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준비되어야 한다.

더 이상 건물에 갇혀 있는 교회가 아니길 바란다. 구약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약적인 교회가 아니길 기도한다. 유교적인 제도권 안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되지 않기 소망한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지금 그런 변화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마지막 시대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지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교회를 위해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바위를 민 사람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 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 한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래요 계획은 그 사람이 바위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바위를 밀고 있는 그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일이 있어도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