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5일 토요일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6·끝) 브랜딩으로 새 옷을 입는 교회



교회의 이야기 담은 이름과 로고로 세상과 소통한다

교회가 브랜딩(branding)으로 새 옷을 입고 있다. 브랜드(brand)란 동물의 몸에 화인을 찍어 표식을 하는 데서 온 말이다. 기업에서는 생산한 제품에 이미지를 부여하는 작업을 브랜딩이라고 한다. 이를 교회에 적용해 교회의 이미지를 찾고 부각시키는 것을 ‘교회 브랜딩’(church branding)이라고 부른다. 사실 브랜딩은 기업의 마케팅 전략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교회에는 그다지 적합한 용어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 브랜드 설계자 리처드 라이징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교회의 브랜딩이란 세상을 향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가를 알리는 매우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사실 많은 교회들이 분명한 정체성, 뚜렷한 목표, 명확한 메시지를 갖지 못해 어려움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것이 브랜딩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 조지아주 그리핀의 오크힐침례교회(www.whereeverylifematters.com)는 새 성전 입당을 앞두고 교회의 브랜드를 바꾸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교회의 리더들은 우선 자신들의 교회가 가진 ‘영적 DNA’가 무엇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찾은 것은 ‘모든 사람들은 중요하다’(Every Life Matters)는 말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로고를 다시 만들었다. 사람들이 보통 오크힐이라 부르기 때문에 교회의 이름에서 침례교회라는 글자를 빼버렸다. 교회의 로고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교회라는 말을 빼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십자가 로고 주변의 원들은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운동이라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원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은 서로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했다.

이러한 브랜딩의 과정을 통해 오크힐교회는 ‘모든 사람들은 중요하다’는 모토 아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생명력 있는 신앙에 헌신하며, 생명력 있는 신앙이란 예배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며, 이웃의 삶에 기여하는 것을 가치로 삼고,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며,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훈련시킨다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가장 오래된 오순절 교회인 ‘에반젤리스틱 템플’이 지난달 ‘스피릿라이프 처치’(SpiritLife Church)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랄 로버츠 목사가 처음 목회를 했던 이 교회는 60년 만에 새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CCC로 잘 알려진 대학생선교회는 ‘Cru’로 이름을 바꾸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002년부터 ‘크루세이드’를 ‘선교’로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십자군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인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름을 바꾸는 것도 브랜딩의 한 방법이다. ‘에반젤리스틱 템플’의 경우 템플이라는 명칭 때문에 사람들이 유대교 회당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담임목사인 노만 윌키는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가장 잘 표현할 이름을 찾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교회 즉, ‘스피릿라이프 처치’였다.

호주 멜버른의 원 커뮤니티 교회는 매우 혁신적인 브랜딩을 선택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는 문화친화적 접근이라고 평했다. 보스턴의 리뎀션 시티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로고에서 네 가지 신앙적 신념을 밝히고 있다. ①왕이신 한 분의 하나님이 계시다. ②모든 사람들은 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다. ③예수님의 보혈은 죄를 사해주신다. ④예수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다.

교회컨설턴트 팀 피터스는 “싫건 좋건, 당신의 교회는 브랜드다. 브랜드라는 말을 사용하든 않든, 당신의 교회는 브랜드다. 만일 그래도 거북하다면 브랜드란 말 대신 평판이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피터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신의 브랜드는 사람들이 당신의 교회 이름을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솔직한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당신의 브랜드다. 그래서 마티 노이미어는 “당신의 브랜드는 당신이 당신의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신의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의 브랜드에 대해 무어라 말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관계와 경험을 통해서다. 사람들은 당신의 브랜드를 세 가지 방법으로 경험하게 된다. 첫째로 개인적 경험, 둘째로 온라인, 셋째로 당신의 브랜드를 경험한 사람을 통해 알게 된다.

교회는 어떤 브랜드를 가진 공동체인가.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역사회 안에서 문화적으로 적절한 방법으로 대위임을 성취시키게 하기 위해 특별히 브랜드해 주신 곳이다. 왜 브랜드가 필요한가. 첫째, 브랜드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왜 그것이 중요한지 알려준다. 둘째, 브랜드는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준다. 셋째, 브랜드는 의도적이고 의미 있는 청중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넷째, 브랜드는 한 비전을 중심으로 열정을 키워낸다. 다섯째, 브랜드는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인도한다.

‘브랜딩 페이스: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와 비영리기관’의 저자 필 쿡은 “본질적으로 브랜딩은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제품, 조직, 또는 개인을 드러내는 기술”이라고 했다. 쿡이 말하듯이 교회의 브랜딩은 단순한 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의 외적 표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숙고해야 하고, 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교회커뮤니케이션센터의 설립자 브래드 아베어는 “교회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고 했다. 브랜딩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디자인이나 귀에 쏙 들어오는 문구가 전부는 아니다. 진정한 교회 브랜딩은 진정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한다. 이제 교회 브랜딩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가 브랜드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에는 교단의 이름이 표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는 누구이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 바로 그 이야기가 브랜드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브랜딩을 모색해야 하나. 워드프레스 디자이너 겸 컨설턴트인 제임스 댈먼은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있다. 첫째, 진실해라. 지금 현재 당시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브랜드가 주변에서 갖고 있는 이미지와 다를 때 교회는 진실성에 의심을 받게 된다. 둘째, 장점을 찾아라. 당신의 교회가 잘하고 있는 목회가 무엇인지 찾아라.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다. 장점에 집중하라. 셋째, 전문적이 되라. 세상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조잡한 웹사이트나 비효과적인 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애물이 된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자신을 가져라.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비종교적, 비기독교적 접근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곳이다.

미래교회는 글 대신 이미지, 개념 대신 이야기로 소통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때문에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밝히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새롭게 찾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 브랜딩이다. 최근 많은 교회들이 브랜딩으로 새 옷을 입고 미래로 힘찬 항해를 하고 있다. 이는 분명 교회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긍정적 징조일 것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747953&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5) 소셜미디어가 교회로 들어온다

접속만 하면 함께 예배… 時空초월 어디라도 복음전한다

소셜미디어가 목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는 교회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회중의 개념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예배를 드리는 회중이 모두 동일한 장소와 시간에 함께 있을 필요가 없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의 갈보리 채플에서는 컴퓨터와 태블릿, 스마트폰을 가지고 주중 언제든지 회의를 열고, 기도를 하며, 상담을 제공한다. 이 교회에서 웹을 담당하고 있는 댄 히클링 목사는 “교인들은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 그리고 웹목회는 문자 그대로 세상 어디까지라도 그것을 전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주일예배에는 갈보리 채플의 7개 캠퍼스에 모인 수천 명의 성도들이 위스콘신, 네바다, 스코틀랜드 등에서 비디오스트림을 통해 접속한 수백 명의 참석자와 함께 예배를 드린다. 이들은 함께 찬양을 하고, 채팅방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만일 누군가 성경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스크린에 있는 성경아이콘을 누르라고 답을 해준다.

갈보리 채플에서는 웹 디자이너, 작가, 운영자가 페이스북, 트위터, 홈페이지 등 다양한 온라인 사이트를 관리한다. 그리고 수요일, 토요일, 주일 예배 동안 채팅방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된다. 히클링 목사는 “바로 여기에서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 또는 교회에 좋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된다. 이렇게 그들이 편안함을 느낄 때, 그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고 했다.

플로리다주 보카레이톤에 사는 수전 툴랜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갈보리 채플의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상담을 받고 세계 각국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한다. “온라인 서비스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나는 내 방에서 나가지 못하지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봉사도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때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있다”고 했다.

예배 도중 스크린에는 담임목사 고메스의 설교,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에 대한 댓글이 올라온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도 알고 계십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 가운데 기도를 원하시는 분은 온라인을 유지해 주세요.” 잠시 후 스크린에는 “저는 지난 4년 반 동안 제 아버지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제 교회는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카레이톤의 만백성교회는 소셜미디어 목회에 앞서가고 있다. 교인들은 교회행사에서 찍은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Instagram)에 올리고, 이 사진들은 교회의 홈페이지에 연결된다. 담임목사 마크 보이킨의 설교는 팟캐스트와 유튜브에 올려 공유된다. 그리고 ‘헝거게임’(Hunger Games)과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청소년들의 참여를 이끌어 낸다. 청소년 목회 사역자 살 리스보아는 “청소년을 만나려면 페이스북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페이스북이 청소년들과 부모들 사이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공간이라고 확신한다.

소셜미디어는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영적 지원을 제공해주는 장소가 되고 있다. 만백성교회 보이킨 목사의 웹페이지에는 기도 요청을 받는 ‘더 하우스 오브 프레이어’(thehouseofprayer.com)라는 페이지가 마련돼 있다. 웹에 게시된 기도제목은 목회자들에게 전달되고, 온라인 또는 전화로 기도해준다.

소셜미디어 목회는 미래의 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사역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 또한 도사리고 있다. 손안의 자그마한 기계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지만, 동시에 전 세계로부터 고립될 수 있다. 또 한 가지 소셜미디어가 가지는 익명적 무책임성의 문제다. 폼파노비치에 있는 하버교회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토니 앨리시아는 소셜미디어 안에서는 사소한 이야기도 커다란 싸움을 일으키며, 서로 다른 견해가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한다고 했다.

애리조나주 펠로십 교회는 예배 도중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도록 권장한다. 담임목사인 테드 베어드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마가복음 16장15절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문자메시지,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포기할 수 없는 복음의 전달매체다.

예배 중 한 성도는 ‘지금 누구에게 감사하고 싶나요?’라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그러자 ‘지금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또 한 성도는 ‘오늘 테드 목사님 사진을 찍었어요. 목사님을 격려하는 말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았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모두 예배 중에 나누어진 것이다. 테드 목사는 이제까지 예배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 것들을 교회가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연결되는 방법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소셜미디어는 이 시대를 살면서 외면할 수 없는 매체임에 틀림없다. 마치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질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니 교회도 이를 활용하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소셜미디어를 수용하려면 단순히 ‘남이 하니 나도 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래서 한다’는 입장과 자세가 필요하다.

‘미니스트리 베스트 프랙티스’의 대표 빌 라이차트는 소셜미디어 사용에 있어서 교회가 가져야 할 세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다. 소셜미디어는 교회가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물론 설교, 주보, 우편, 전화, 이메일, 면담 등 다른 매체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과 비교했을 때 소셜미디어의 장점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편이성, 어디서나 이용이 가능한 편재성, 여러 형식을 채용할 수 있는 다양성, 전달력이 뛰어난 전염성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연결’(Connecting)이다. 교회의 소셜미디어는 교회공동체를 연결시켜야 한다. 일방적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소셜미디어가 공동체 안에서 대화를 만들어 내는가’ ‘성도들은 목회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성도들은 서로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이뤄지는 대화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의미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대화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 협력의 활동이 되어야 한다.

셋째, ‘행동의 요청’(Call to Action)이다. 교회의 소셜미디어는 성도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위해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성도의 행동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가는 것’(Go)과, 자신이 가진 것을 ‘주는 것’(Give),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Pray),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역에 참여하도록 ‘동원하는 것’(Mobilize)을 포함해야 한다.

싫든 좋든 소셜미디어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고 교회의 현실이 되고 있다. 교회에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는 언제나 도전이 되어왔다. 인쇄술의 발명과 전자매체의 출현을 맞이했을 때처럼 교회가 또 한 번의 지혜로운 응전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729173&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4) 교회학교를 가정으로 보내다


자녀의 영적교육, 주일학교 대신 부모가 맡는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7)

미국 텍사스주 포트아더에 있는 리지우드 교회는 주일학교를 없앴다. 청소년 예배도 폐지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밀의 개더링 교회도 그 뒤를 따랐다. 언뜻 들어보면 마치 교회가 교회학교 교육을 포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회학교의 교육을 가정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통 ‘가족통합교회’(family-integrated church)라고 부른다. 혹은 ‘가족제자화교회’(family discipleship church), 또는 ‘가족중심교회’(family centered church)라고도 한다. 이러한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주일학교 교사나 청소년 목회자 대신 부모가 자녀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도록 한다.

2009년 출간된 ‘가족목회의 관점들: 세 가지 견해’(Perspectives on Family Ministry: Three Views)에서 폴 렌프로는 ‘가족통합목회’를 가장 바람직한 목회라고 했다. 그는 신명기 31장 12절의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라는 말씀과 에베소서 6장 1∼3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 교회의 모든 집회에는 어린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리지우드 교회의 더스틴 거들리 목사는 “교회학교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의존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회학교 문을 닫고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에게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지도록 권유했다.

‘교회 안의 잡초’(A Weed in the Church)의 저자 스콧 브라운 목사는 마치 학교에서처럼 연령별로 구성된 교회학교는 비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인 가족의 주일 모습을 살펴보자. 주일아침 가족이 함께 교회에 온다고 해도 예배와 교육 프로그램이 끝나 집에 돌아 올 때까지 서로 만날 기회가 없다. 또는 아예 각자 교회에 나와 자신이 속해 있는 연령별 예배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브라운 목사는 ‘주일은 가족을 연합시키는 날이 아니라 분리시키는 날’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결코 성경적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또한 가지 그가 지적하는 것은 연령별 예배와 교육이 성경적 모형을 따르기보다 교육적 또는 문화적 효율성만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청소년 프로그램은 그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절제한 방향으로 흐른다. 청소년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프로그램에 투자되는 교회의 재정은 결국 소비와 오락의 문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그의 주장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 그들을 연령별로 나누지 않으셨다. 이러한 주장은 담은 비디오 ‘디바이디드(Divided)’는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며 배포되고 있다. ‘전국 가족통합교회’의 노스캐롤라이나 지부를 이끌고 있는 브라운 목사는 현재 800여개 교회들이 전통적 형태의 주일학교를 폐지하거나 축소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다호주 트윈폴스의 이스트사이드 서던 침례교회의 폴 톰슨 목사는 브라운 목사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교인들에게 연령별로 구별한 주일학교교육을 ‘회개하고 폐지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브라운과 톰슨 목사는 이렇듯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진 이유를 기존의 주일학교 교육의 구조에서 찾았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부모가 배제된 신앙교육에 있다고 본 것이다. 버지니아주 알링톤의 그레이스 바이블 교회의 조수 라이문도 목사는 이 운동의 원칙에 동참하면서 약간 다른 접근을 택했다. 교회 주일학교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청소년들과 부모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성경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부모들이 자신들 자녀의 교육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청소년종교연구소장 크리스천 스미스는 “브라운 목사의 연령 통합적 접근이 만병통치약은 아닐 수 있다”면서 “하지만 자녀들의 신앙교육에서 부모의 역할이 가지는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가족 중심의 교회교육을 지원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단체는 ‘D6 컨퍼런스’이다. 여기서 ‘D6’는 신명기(Deuteronomy) 6장 5∼7절을 뜻하는 이름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그들은 제자화와 가족목회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신명기 6장에 명령하시듯이, 가족이 영적 형성(제자화)의 중심이 돼야 한다. 2011년 ‘D6 콘퍼런스’에는 10개국, 40개 주, 35개 교단에서 500개 교회가 참석했다.

‘D6 패밀리’는 ‘스프링크(Splink)’ 즉, ‘당신의 가족을 영적으로 함께 연결하는 간단한 방법’(a SIMPLE way to LINK your family together spiritually)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무료로 가족이 함께 연결되는 데 도움 되는 아이디어를 이메일로 보내준다. 여기에는 신앙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방법, 기도와 묵상을 시작하는 방법, 가족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담겨 있다.

또 다른 단체는 더글러스 W 필립스가 이끄는 ‘비전 포럼(Vision Forum)’이다. 이 단체는 비전을 심어주는 제자화를 통해 전 가족을 함께 가르치고, 훈련시켜 용기 있는 아버지, 고결한 어머니, 덕이 있는 아들과 딸로 바로 서게 하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고 있다. 또 이들은 가족을 믿음으로 이끌려는 아버지, 홈스쿨링을 하면서 성경적 교재가 필요한 어머니, 손자와 손녀에게 믿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훌륭한 교육방법과 자료를 제공한다.

물론 ‘가족통합교육목회’에서 경계해야 할 점도 있다. 사우스웨스턴 침례교 신학대학교의 리처드 로스 교수는 “교회에는 연령 구분 프로그램으로 인한 불균형이 있다. 이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연령 구분 프로그램을 없애는 것은 목욕물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목욕물과 아기를 함께 버리는 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국청소년목회 네트워크의 대표 다릴 너스 역시 이 운동이 지나치게 엄격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모든 청소년들이 건강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통합교육목회’를 주장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가정에서 이뤄지는 신앙교육은 미래교회에 의미 있는 트렌드로 지속될 것 같다. 부모 특별히 아버지가 자녀의 신앙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교육적 측면에서도 매우 훌륭한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학교를 가정으로 보내는 것은 교회의 목회적 과제다. 비록 교회학교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운영하는 경우에도 신앙교육이 가족이라는 형식과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족통합교육목회’의 핵심은 교회학교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예배하고 함께 말씀을 배우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707377&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3) ‘Z세대’를 준비하라



전통과 기술의 합주곡으로 ‘Z세대’를 품어라

세대의 변화는 급속하게 다가온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는 것은 이미 옛말이다. 얼마 전까지도 신세대를 뜻하던 X, Y 세대는 이제 ‘Z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Z세대는 누구인가. 단순히 X, Y의 다음 글자인 Z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대는 때로는 I세대, 넷세대, 인터넷세대로 불린다. 이들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로 이전 세대인 Y 또는 밀레니엄의 다음 세대다.

Z세대의 특징은 월드와이드웹, 메신저, 문자, MP3, 휴대전화, 유튜브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와 함께 성장한 역사상 가장 ‘연결된’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이 태어난 세계는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물결이 불어 닥친 이후였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정보를 찾아내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생각을 교류한다. 전 세대와 달리 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거나, 집에 머물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자녀들의 과외활동을 돕는다. 그리고 세계적 불황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안을 체득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이렇듯 이들의 삶은 이전 세대와 뚜렷이 구별된다. 신앙적 측면에서도 이전 세대와 다른 새로운 위기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Z세대를 위한 교회교육을 준비할 것인가. 어린이 목회 잡지 ‘칠드런스 미니스트리 매거진(Children’s Ministry Magazine)’은 향후 10년 동안 어린이 목회에 영향을 끼칠 6가지 숨겨진 트렌드를 연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트렌드 1 다인종 다문화화. 특별히 미국에서는 인종적 다양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통계학자들은 2001∼2010년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 어린이의 비율이 20∼30% 이상 증가했다고 보고 있다. 비영리 연구기관의 선임연구원인 진 뢸케파틴은 “어린이 목회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진 어린이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어떠한 목회적 접근을 할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 이미지, 언어, 가치관 등을 다문화 환경과 어떻게 절충하고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주노동자와 해외유학생이 증가한 것도 어린이 목회에 대한 다인종 다문화적 접근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을 말해준다.

트렌드 2 변화하는 교육방법. 이전 세대의 어린이 목회는 오락적 성향을 가진 텔레비전의 모델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 모델에서는 간결하고 다양한 콘텐츠 제공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컴퓨터, 인터넷, 비디오 게임과 같이 상호작용적 활동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수동적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가 되길 원한다. 탈봇 신학교의 케빈 로슨 교수는 “학습자가 교재, 동료학습자, 교사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활동적 학습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교회는 홈페이지와 교회학교 블로그 등을 통해 어린이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또 교재나 학습경험을 다감각적(multisensory) 경험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학습센터, 분반학습 전 활동, 교재 등을 어린이들이 직접 선택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트렌드 3 테크놀로지에 능숙한 어린이. Z세대는 어릴 적부터 컴퓨터를 사용해왔다. 취학 전 어린이들의 54%와 초등학교 어린이의 72%가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한다. 켄터키 크리스천 대학의 릭 크로미 교수는 “개인적, 개별적, 맞춤형 학습이 일방적 학습방법을 밀어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조차 어린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학습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에서 개인적 학습을 시행할 수 있을까. 교회학교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이웃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테크놀로지 중심의 사회가 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접촉’(touch)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접촉이 교회가 제공해야 할 신앙적 교육의 핵심이다. 그리고 접촉을 통해 형성된 관계를 바탕으로 어린이들의 능숙한 테크놀로지 능력을 학습에 사용토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경공부 내용을 컴퓨터 게임이나 비디오 영상으로 만들어 보게 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선교적 활동에 참여케 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것이다.

트렌드 4 다원주의 사회. 다원주의는 새로운 세대의 핵심가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뢸케파틴은 어린이들이 다원주의를 일정기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다. 즉 다른 관점, 역사, 신앙, 관습을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대해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앙의 확신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린이들은 사회적 선과 성경적 진리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이 세대에게 믿음(believing)과 함께 소속감(belonging)을 주어야 한다.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 것이 교회교육의 과제다.

트렌드 5 소극적 세대. 이전 세대가 변화를 만드는데 적극적이었던 반면 Z세대는 변화에 소극적이다. ‘미국미래의 역사’의 저자 월리엄 스트라우스와 닐 하우는 Z세대를 ‘적응의 세대’라 불렀다. 이들은 이미 필요한 변화는 모두 이뤄졌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뢸케파틴은 “지도자들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기 원하시는지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Z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변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노숙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노숙인이 있는 곳에 데려가서 직접 섬기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는 사건들을 알게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발견하고 실행토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먼저 섬김의 사역에 솔선수범하면서 이들의 역할모델이 돼야 한다.

트렌드 6 변화하는 가족. 전통적 가족의 형태는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4명 중 1명의 어린이가 홀부모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이 비율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이렇게 가족의 형태가 변할 때 교회는 가족목회에 대한 이해도 바꿔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어린이 목회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부모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신앙교육에 있어 부모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회에 신앙교육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교회에서 가르친 내용을 부모에게 보내고 부모는 그 내용을 가정에서 학습하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자녀교육을 위한 부모교육이 교회학교의 핵심 교육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 신앙적으로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교회와 부모가 함께 담당해야할 책임이다.

이제 교회는 Z세대를 위한 목회와 교육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tradition)과 기술(technology)의 합주곡이 되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토착민(natives)들인 Z세대는 영적 접촉을 원하는 순례자(pilgrim)들이다. 하나님의 숨결, 부모의 손길, 친구의 체온이 필요한 이들에게 교회는 더욱 깊은 기도의 영성과, 말씀을 통한 진리에 대한 확신, 나를 넘어 이웃을 섬기는 봉사와 헌신의 삶을 가르치고 그 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Z세대가 다가온다.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기대하면서 그들을 준비하자.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685600&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2)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개척이 가장 중요한 목회” 교회 증식 DNA 확산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뉴욕의 리디머 교회와 텍사스의 노스우드 교회, 미시간주의 켄싱턴 커뮤니티 교회가 대표적인 예다.

1989 년 개척 이후 리디머 교회는 50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고, 예산의 15%를 교회 개척에 사용하고 있다. 담임목사인 티머시 켈러는 전 세계 목회자들에게 창조적이고 효과적인 목회전략을 소개하는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00년 세워진 리디머 교회의 교회개척센터는 17개의 장로교를 포함해 뉴욕에서 5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밥 로버츠 목사의 노스우드 교회는 1992년 이후 지금까지 130여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증식하는 교회’(The Multiplying Church)의 저자로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노스우드 교회는 매년 십여 명의 교회개척 준비자들과 그들의 배우자를 ‘교회증식센터’에서 9개월간 집중프로그램을 통해 교육한다. 그리고 인턴십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유색인종으로 선정하여 다양한 문화와 지역에 복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한다.

켄싱턴 커뮤니티 교회의 스티브 앤드루스 목사는 1988년 교회 개척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비전 2020’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2020년까지 40개 교회를 개척하여 25만명을 전도한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이 계획은 ①‘비전을 가진 리더’(VPL)라 불리는 개척 목회자를 선정하고 ②멘토링과 코칭으로 이들을 훈련시키며 ③재정과 자원을 제공하고 ④목회계획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성해 ⑤‘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를 세우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지난 20년 동안 앤드루스 목사의 비전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미국과 세계의 주요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를 만드는 ‘비전360’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보통 교회 개척에는 몇 가지 모델이 있다. 첫 번째는 ‘낙하산 투하’ 모형이다. 교회 개척자와 그 가족이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는 기존 교회나 교회개척기구가 모체가 되어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도록 초기의 리더십과 자원을 제공하는 모형이다. 셋째는 소그룹이 가정교회의 형식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성장하여 교회가 되는 모형이다. 때로는 여러 개의 소그룹이 주기적으로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하면 다시 작은 그룹으로 나뉜다. 넷째는 멀티사이트 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독립하는 모형이다.

짐 핸니(Jim Haney)에 의하면 소위 ‘교회개척운동’(Church Planting Movement)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개척된 교회가 짧은 시일 내에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증식시키며, 토착적 교회를 만드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 운동이 전통적 개척 방식과 다른 것은 교회가 교회를 개척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교회는 시작부터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적 운동’은 세 가지 이유에서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첫째, 젊은 교회개척자들이 선교적 교회를 성경적 교회로 확신하고 있다. 둘째, 선교적 교회로 시작된 교회들은 교회의 증식을 가장 중요한 목회로 생각한다. 셋째, 이 운동은 교단과 교파를 뛰어넘어 일어나고 있다. 한편 선교교회센터의 밀프레드 미내트리는 “기존 교회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선교적 DNA를 가지고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라이프웨이 연구소장 에드 스텔저는 교회가 교회의 개척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성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장’으로의 방향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증거라고 했다.

사실 교회성장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어떻게 기존 교회를 변화시킬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미내트리 자신도 처음에는 변화를 시도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적 운동의 능력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새로 개척된 교회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선교사로 여기는 새 신자들을 더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에 의하면 교회 개척이 기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례를 들자면, 켄싱턴 커뮤니티 교회의 경우 1990년 이래 20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매년 예산 중 15%를 교회 개척을 위해 사용한다. 그리고 주일예배에 평균 8500명의 성도들이 참석하며, 지난 5년 동안 52% 성장했다. 조지아주 웨스트리지 교회는 지난 5년 동안 7개 교회를 개척하면서 300%의 성장을 기록했다.

교회 개척에 있어서 교단보다 개 교회가 중심이 될 때 개척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한다. 에드 스텔처는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의 대부분이 교단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교회 개척을 개 교회의 사역으로 여기고 있으며, 개 교회의 역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플로리다주의 스패니시 리버 교회는 리디머 장로교회, 마스힐 교회, 크로스포인테 교회의 개척을 지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마스힐 교회가 교회개척 사역으로 삼고 있는 초교파 교회 ‘Acts 29’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하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 데이비드 니콜라스는 “교회 개척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서약을 통해 교회개척자들은 교회 안에 교회 개척의 유전자를 함께 이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교 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리디머 장로교회 티머시 켈러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째, “새로운 교회는 기존 교회에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준다.” 보통 교인들은 새로운 교회의 개척보다 기존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켈러 목사가 지적하듯이 기존 교인들에게 새로운 목회의 방법을 수용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개척한 교회에서 새로운 목회가 이루어질 때 오히려 모교회가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를 얻게 된다.

둘째, “새로운 교회는 창조적이고 강력한 지도자를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기존 교회에서 지도자들은 전통, 임기, 정해진 것들, 친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반면 새로운 교회의 성도들은 창조성, 모험, 혁신, 미래의 방향을 추구하는 도전적인 지도자를 선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지도자들이 교회 전체의 성장에 유익을 준다.

셋째, “새로운 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자기점검을 하도록 자극한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교회의 성장은 기존 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때로는 새 교회들로 인해 기존 교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패배주의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반성하게 된다.

넷째, “새로운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새신자의 공급처’가 된다.” 새로운 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종종 기존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새로운 교회는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목회의 성향으로 가진다. 이러한 지속적 변화가 부담이 될 때 새 교회의 신자들이 좀 더 안정적인 기존 교회로 옮겨 가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교회에서 신앙을 갖게 됐지만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자신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부합하는 교회를 찾아 가는 경우도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늘고 있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청신호로 보인다. 왜냐하면 개 교회의 ‘성장’(growth)을 넘어, 교회의 ‘증식’(multiplication)을 향해 나가는 것이 곧 교회가 선교적 유전자를 가지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도 ‘교회성장’ 일변도의 목회에서 ‘교회증식’의 목회로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663422&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1) 협력과 융합의 청년목회



여러 교회가 손잡은 ‘청년들 위한 신앙공동체’ 새바람

‘교회에서 청년이 사라지고 있다.’ 이 같은 우려의 소리가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10월 13일자 국민일보는 학원복음화협의회의 ‘2012년 한국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대한 조사연구’를 인용, 현재 대한민국 대학생 중 크리스천은 17.2%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크리스천 대학생의 감소 원인은 ‘기득권층 옹호, 교회 세습, 비리 연루 등 이미지 실추 때문’이 61.1%, ‘기독교의 교리만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적 포교활동 때문’이 38.8%라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한 대학생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로는 ‘신앙생활에 회의가 들어서’(34%), ‘교회 밖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이어서’(28%), ‘율법적 또는 강압적이어서’(15.7%), ‘비도덕적인 모습 때문’(15.1%), ‘의심하는 사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14.8%) 등을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바나 그룹은 데이비드 키너만(David Kinnaman)의 연구 ‘유 로스트 미(You Lost Me: Why Young Christians are Leaving Church)’의 결과를 가지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6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고립주의. 18∼29세의 청년 중 4분의 1은 교회가 교회 밖의 음악, 영화, 문화, 기술 등 자신들의 세대를 대변하는 것들을 모두 악한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②깊이가 없음. 3분의 1은 교회를 지루하고, 4분의 1은 신앙이 자신의 삶과 상관성이 없으며, 성경의 가르침은 불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5분의 1은 교회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③과학에 대해 적대적. 3분의 1은 교회는 과학적 발전과 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했다. ④성(性). 교회는 단순하고 단정적이다. 5분의 1 이상이 ‘그냥 아니라고 해라’는 철학은 테크놀로지와 성(性)의 세계에서 적합하지 않다. 독신 청년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성에 대해 적극적이고 그래서 정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⑤배타성. 10명 중 3명의 청년들은 교회가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인 시대에 지나치게 배타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신앙과 친구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느낌이라고 한다. ⑥의심. 3분의 1 이상의 청년들이 교회는 의구심을 표현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4분의 1은 이야기하고 싶은 진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교회 밖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007년 데이비드 키너만과 게이브 리온스가 공저한 ‘언크리스천(UnChristian: What a New Generation Really Thinks About Christian)’에 의하면 16세에서 29세의 청소년 및 청년들은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과 분노, 경멸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 동성애 반대 91%, 단정적 87%, 위선적 85%, 낡은 모습 78%, 지나치게 정치적 75%, 현실성 없음 72%, 이웃에 대한 무감각함 70%, 지루함 68%. 물론 미국의 경우이지만 이러한 상황은 한국도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렇듯 교회 안팎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은 청년목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청년들을 다시 신앙공동체로 불러 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최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청년목회가 있다. 바로 ‘샬럿 원’(Charlotte ONE)이다. ‘샬럿 원’은 40여개 지역교회가 협력해 20∼30대의 청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초대해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시켜주는 공동사역이다. 매주 화요일 500여명의 청년들이 도시의 중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가 된다.

‘샬럿 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2006년 봄 일단의 복음주의자들과 주류교단의 지도자들은 기존 교회를 대체하지 않으면서 청년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목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샬럿 원’에서는 세례, 결혼식, 장례식과 성만찬을 행하지 않는다. 성례전은 기존 교회의 사역으로 남겨둔다. 주일모임을 갖지 않고, 담임목사도 두지 않는다. 설교는 철저히 성경에 기초하며 복음주의에 입각한 말씀을 전한다.

‘샬럿 원’은 여러 교회의 협력목회이기 때문에 신앙의 성장을 위한 훈련은 지역교회에서 받도록 권한다. 그들은 교회성장이란 단순히 한 교회의 성도수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수가 증가하고 그 교회들이 모두 함께 커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역교회와 연계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샬럿 원’의 운영자들은 이 사역을 ‘깔대기’(funnel) 역할이라고 정의하면서 많은 청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통로라고 여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3)에서 ‘샬럿 원’의 근거를 찾는다.

어떤 이들은 교회 간의 경쟁이 개교회의 성장에 필수요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샬럿 원’은 경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목회다. 과연 구심점이 없어 보이는 ‘샬럿 원’이 청년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결과는 ‘샬럿 원’의 승리였다. 경쟁이 아닌 협력이 청년들을 예배로 돌아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98%가 ‘샬럿 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10명 중 4명은 ‘샬럿 원’이 자신들과 지역교회가 연결되는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샬럿 원’은 지역의 봉사단체 및 교회들과 협력해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그들의 웹페이지에는 ‘봉사의 날’ 일정이 항상 게시돼 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올해 ‘샬럿 원’에서는 ‘사이드킥스’(전문직에 종사하는 청년이 한 고등학교 학생의 멘토가 되어 사회봉사를 함께하는 프로그램)와 협력해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신발 상자에 생필품을 채워 전 세계 가난한 어린들에게 전달하는 선교에 참여키로 했다.

2011년 4월 ‘샬럿 원’의 모델을 따라 ‘피닉스 원’(PhoenixONE)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들은 전국적 연합체인 ‘시티 원’(CityONE)의 구조 안에서 서로 협력한다. ‘시티 원’은 ‘전국의 20∼30대 청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지역교회를 돕는다’는 슬로건 아래 이 같은 협력사역을 주도하고 있다. 한 교회사역연구가는 “이 사역은 미국 내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독특한 모델로 보인다. 청년들을 다시 신앙으로 불러오기 원하는 교회들에게 ‘시티 원’ 프로그램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찬양집회’ 형식으로 청년들이 모임을 가져왔다. ‘샬럿 원’이나 ‘피닉스 원’과 다른 점은 지역교회와 관계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찬양집회는 지역교회와 협력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때로는 교회 밖의 집회가 교회의 예배와 교육을 대체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샬럿 원’ 사역은 지역교회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즉 지역교회는 청년들이 ‘샬럿 원’에 참여토록 격려하고, ‘샬럿 원’은 청년들이 자신들의 지역교회에서 훈련받고 성장하도록 지도한다. 때문에 지역교회는 ‘샬럿 원’을 자신들 목회의 일부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개체로서의 지역교회와 공동체로서의 ‘샬럿 원’이 창조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협력과 융합의 시대에 걸맞은 목회의 유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도 ‘시티 원’ 모델을 청년목회의 한 방법으로 고려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여겨진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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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0) 지역교회 변화시키는 24/7 기도운동


24시간 열린 기도의 문… 전세계 영적갱신 변화를 이끈다

24시간 기도운동이 지역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있는 애즈버리 연합감리교회(앨런 웨덜리 목사)는 ‘기도목회’로 양적·질적 성장을 이룬 모범적인 교회다. ‘예수, 기도, 선교(Jesus, Prayer, Mission)’를 목회의 세 기둥으로 여기는 애즈버리 교회는 스토어하우스(Storehouse·기도창고)라 불리는 기도 프로그램을 통해 성도들에게 24시간 온종일 기도의 기회와 장소를 제공한다.

주일 저녁 8시부터 월요일 저녁 10시까지, 화요일 오전 8시에서 10시,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그리고 토요일 저녁 6∼8시 ‘기도창고’를 열어둔다. 기도실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의자와 테이블을 마련해 개인의 성향과 필요에 따라 기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특별히 수요일에는 자녀와 가족을 위한 기도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이때 10개 이상의 기도 스테이션을 운영하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기도제목을 적어 ‘기도의 벽’에 붙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 종이를 뽑아 기도를 해주는 곳, 지구본에 ‘기도 깃발’을 붙이면서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곳, ‘기도배너’에 말씀을 색연필로 적는 곳, 손거울을 들고 자신을 보면서 기도하는 곳,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곳, 주변 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곳 등이 있다.

‘스토어하우스’는 찬양을 인도하는 음악팀, 기도를 인도하는 기도팀, 안내를 담당하는 안내팀으로 사역을 나누고 있다. 음악팀은 기도의 환경을 조성하는 연주를 한다. 훈련된 기도팀은 중보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중보의 기도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게이트키퍼(Gatekeeper)라 부르는 안내자들은 스토어하우스를 찾아 온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들의 웹페이지(storehouse247.com)에는 실시간으로 기도제목을 올릴 수 있으며, 보내진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팀이 기도한 후 기도 요청자에게 이메일로 답장을 해준다.

스토어하우스 담당목사인 테드 에이미는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밤과 낮으로 하는 기도는 성경이 가르쳐준 내용입니다”라고 했다. 사실 다윗은 288명의 노래하는 자들과 4000명의 연주자들을 세워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예배하도록 했다(역대상 15:1∼17:27, 9:3∼34, 23∼26). 솔로몬 역시 기도와 예배의 모범이 되었다(역대하 8:14-15).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을 기도와 예배로 물리쳤다(역대하 20:20∼28). 히스기야는 성전을 정화하고 기도와 예배를 다시 세웠다(역대하 29∼30). 요시야도 기도와 예배를 다시 바로 세웠다(역대하 35).

교회는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한 기도의 방에서 이루어진 24시간 기도 중에 탄생했다. 초대교회 사막의 수도승, 북유럽의 셀틱 공동체, 이후 베네딕트와 또 다른 수도원에서 종일기도의 전통을 키워나갔다. 18세기 진젠돌프가 이끄는 모라비아 공동체에서 밤낮으로 드린 기도는 100여년을 지속해왔다. 이들의 영향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에까지 미쳤다. 20세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불붙은 24/7 기도모임은 오순절 교회와 카리스마 운동을 점화시켰고, 5억명의 영적 갱신을 가져왔다.

‘24/7 기도’로 불리게 된 운동은 대략 1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9년 영국의 치체스터에서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운동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100여 국가에서 유사한 형태의 기도모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 여러 신학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국제기도의집(IHOP)도 24/7 기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24/7 기도운동은 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난 10년 동안 24/7 기도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됐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독일 펑크음악페스티벌, 전쟁지역, 지하교회, 델리의 슬럼가, 파푸아뉴기니의 정글, 영국의 성당에서 24시간 기도가 이어졌다. 구세군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 지난해 전 세계 구세군에 24/7 기도명령을 내렸다. 구세군의 24/7 기도운동은 사실 2001년 열린 ‘루트(Root)’ 콘퍼런스에서 시작됐다.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기도의 해’를 선포하고, 나흘간 열린 콘퍼런스 동안 1500명 이상의 성도들이 24/7 기도에 참여했다. 이 후 캐나다 러시아 미국 뉴질랜드 호주로 이 운동이 퍼져나갔다. 캐나다 밴쿠버의 청년구세군들은 614영문과 함께 3년 동안 논스톱 기도를 했으며, 뉴질랜드에서도 2년간 논스톱 기도가 시행됐다.

초교파적으로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곳은 ‘24-7 국제기도(24-7 Prayer International)’다. 이들은 24/7 기도를 통해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여기라(마가복음 12:30)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을 추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곳에서 ‘영적으로’, 이웃과 관계가 깨어진 곳에서 ‘사회적으로’, 세상과 관계가 깨어진 곳에서 ‘환경적으로’ 화해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사역한다. 이들 외에 ‘번(Burn) 24’와 ‘6:22’가 ’24/7 기도운동‘을 이끌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운동의 중심에는 ‘레드 문 라이징(Red Moon Rising)’의 저자 피트 그리그(Pete Greig)가 있다. 그 또한 신비주의적 신학과 더불어 관상과 명상을 중시하는 뉴에이지적 성향으로 전통적 교회로부터 주의의 대상으로 거론된다. 또한 기도운동을 종말과 재림 등과 연결시키는 위험한 시도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 때문에 교회는 독립단체들이 이끌고 있는 ‘24/7 기도운동’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4/7 기도운동’은 미래교회의 강력한 트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해보다는 경험을, 이성보다는 영성을 추구하는 미래 세대들은 ‘24/7 기도운동’을 영적으로 신앙을 형성시킬 최상의 기회로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성 교회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영성운동에 더욱 관심을 쏟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제도화된 교회는 거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환영하고, 교회의 전통은 싫지만 신비적 영성은 좋아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렇듯 미래교회에 일어날 현상들은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가져다 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래의 속성이며 현실이다. 사실 새로운 변화의 물결 앞에서 교회는 종종 ‘전통에 숨어버리거나’ 또는 ‘시류에 함몰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아무리 파도가 거셀지라도 해변에서 머뭇거릴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파도 속으로 뛰어들 수도 없다. 아마도 레너드 스윗 교수가 말하듯 미래의 교회는 ‘파도를 타는 교회(Church of Riding on the Wave)’가 돼야 할 것이다. 즉 변화를 피하지 않으면서 믿음으로 파도를 즐기면서 말이다.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24/7 기도운동’이 개인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유혹을 물리치고 공동체와 복음을 위해 올바른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펜실베이니아 주의 앨리슨 파크 교회, 워싱턴 주의 노스사이드 커뮤니티 교회, 앨라배마 주의 애즈버리 교회와 같이 지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24/7 기도운동’은 바람직한 시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 교회의 목회적 틀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영성 개발은 지나침이나 치우침을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619827&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9) 거꾸로 하는 헌금



교회서 오히려 헌금받아 세상에서 복되게 쓴다

지난해 9월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한 교회가 전국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거꾸로 헌금(Reverse Offering)’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방식은 이렇다. 주일 헌금시간 교인들이 헌금을 내는 대신 헌금 바구니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합니다(God Trusts You!)’라고 쓰인 봉투를 가져가는 것이다. 이 봉투에는 각각 10달러, 20달러, 50달러짜리 지폐가 들어 있었다. 이날 교인들에게 나누어준 돈은 주일 평균 헌금 액수인 3만 달러였다.

이 교회는 2001년 팀 루카스 목사가 개척한 리퀴드 교회다. ‘교회를 사람들에게 가져간다’는 비전으로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에서 시작해 지금은 뉴브룬스위크와 너틀리에 집회장소를 가지고 있다. 매주일 온라인으로 연결된 국외 예배처를 포함해 2500여명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 리퀴드 교회는 에티오피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아이티, 엘살바도르에 식수를 제공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리퀴드 교회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8년부터 시작한 ‘공짜 시장(Free Market)’이라는 이름의 지역사회 봉사사역 때문이었다. 이 교회는 성도들이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모아 공원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줬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을 정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사람들에게 기름값을 대신 내주는 ‘기름값 내주기(Gas Giveaway)’ 사역을 했다. 노숙인들에게 겨울코트를 나눠주고, 크리스마스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 나누기도 했다.

이들의 사역은 지역매체뿐 아니라 CNN과 뉴욕타임스 같은 전국적 미디어에 소개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오늘날처럼 교회에 대해 어둡고 부정적인 뉴스가 많이 등장하는 때 리퀴드 교회의 사역은 일반인들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한번 ‘거꾸로 헌금’으로 미국사회를 놀라게 했다. 과연 ‘거꾸로 헌금’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루카스 목사는 ‘거꾸로 헌금’의 목적은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돈으로 이웃을 돕는 일에 투자하거나 사용토록 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들이 관대함을 배우고,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을 실천토록 하는 것이다. 루카스 목사는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 계획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여성은 ‘거꾸로 헌금’으로 50달러를 받아 자신의 차에 기름을 넣었다. 이 돈이 너무 필요했었다고 한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돈으로 장을 보아 저녁을 차리고 태풍으로 피해 본 이웃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했다. 빵가게를 운영하는 한 여성은 50달러를 받았는데 이 돈으로 재료를 구입, 빵을 만들어 팔아 500달러를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교회에 헌금했다.

루카스 목사는 “많은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리퀴드 교회 교인 중에는 태풍으로 피해 입고, 실직으로 수입이 끊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냥 정부의 보조만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20달러로 한 사람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리퀴드 교회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손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거꾸로 헌금’ 봉투에는 미국 지폐에 쓰여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를 뒤집어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리퀴드 교회 성도들은 루카스 목사의 메시지를 신실하게 받아들였다. 성도 안젤라 쿠비스키는 “저는 이 예배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메시지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나를 위해 어떻게 돈을 사용할까’가 아니라 그 돈으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했다. 쿠비스키는 ‘거꾸로 헌금’에서 10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이 돈을 종잣돈으로 해서 지역사회에서 약물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마켓스트리트미션’ 헌금을 늘려가기로 했다. 바로 이것이 루카스 목사가 원했던 ‘거꾸로 헌금’의 목적이었다.

‘거 꾸로 헌금’은 리퀴드 교회만의 사역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교회들이 ‘거꾸로 헌금’을 시작했고 또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지난 6월 테네시주 연합감리교회 멤피스연회에서도 ‘거꾸로 헌금’을 실천했다. 4월부터 익명의 기부자들이 헌금한 700달러를 가지고 연회에서 ‘놀라운 관대함’이라는 주제로 ‘거꾸로 헌금’을 시행했다. 구역회에서 선정한 교회에 100달러씩을 보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공동체를 위한 사역에 신실하고 창조적으로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했다. ①이 프로그램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가? ②이것이 신앙의 양육과 교육을 제공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가? ③이 프로그램에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그렇게 되도록 하는가? 사실상 이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칫 이러한 프로그램이 자선사업에 머무르거나 신앙공동체의 내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시간주 ‘선샤인 커뮤니티 교회’의 한 성도는 ‘거꾸로 헌금’으로 받은 5달러를 가지고 책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더해 38달러짜리 성경을 샀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해 누군가에게 선물하리라는 마음으로 자동차에 넣고 다녔다. 며칠 후 쇼핑을 하고 나오던 중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직장을 찾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교인은 “내가 금전적인 도움은 줄 수 없지만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동차에서 성경을 꺼내 주었다. 그 남자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한동안 좋은 선물을 받아보지 못한 자신의 아내에게 이 성경을 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곳은 ‘거꾸로 헌금’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현장이었다.

‘거꾸로 헌금’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러브 인 더 네임 오브 크라이스트(Love in the Name of Christ)’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이 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헌금 바구니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생필품 목록을 적은 종이를 넣는다. 목록에는 ‘화장실 휴지’ ‘세탁용 비누’ 등이 적혀 있다. 헌금시간 교인들은 헌금 바구니에 헌금을 넣는 대신 종이를 한 장 이상 뽑는다. 그리고 다음 주일 자신이 뽑은 품목을 구입해 교회로 가져온다.

‘거꾸로 헌금’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거꾸로 헌금’이 아니라 ‘복 받은 헌금(Blessed Offering)’이라 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미래를 위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다. ‘거꾸로 헌금’은 바로 교회의 고정관념을 깨려는 시도 중 하나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의 본 모습을 가리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미래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것은 거꾸로 돼 있는 것을 바로 놓기 위한 노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바로 되기 위한 거꾸로의 시도인지도 모른다. 미래는 언제나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에서의 ‘똑바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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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8) 거리의 힙합, 교회로 들어오다



힙합교회, 젊은이들의 문화로 복음 선포하다

2011년 11월 하워드대학 신학부는 ‘종교와 문화: 교회, 힙합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발표자들은 전통적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오기 위해 그들의 문화인 힙합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말이다.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크로스오버 커뮤니티 교회는 힙합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타미 킬로넨 목사는 ‘중생’이라고 적힌 반짝이는 티셔츠를 입고 무대 위를 껑충껑충 뛰면서 ‘예수님은 어떻게 구르셨나’라는 제목의 설교를 랩으로 한다. 크로스오버 교회는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21세기 목회를 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바울이 아덴에서 거리의 언어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복음을 선포한다고 한다.

힙합교회인 ‘The House’의 홈페이지(www.thahouse.org)에 들어가 보라. 그들의 사명선언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힙합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제적이고, 관계적이며, 상관성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동영상의 첫 화면에 등장하는 청년은 “왜 힙합입니까”라는 질문에 “왜 안 돼요?”라고 말한다.

헐렁한 티셔츠, 앞뒤를 바꿔 입은 청바지, 목에 건 굵은 목걸이, 비스듬히 쓴 모자. 이런 차림새의 청소년과 청년을 교회에서 보는 것은 흔치 않다. 아마도 전통적 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모습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교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힙합교회: 문화를 만드는 운동과의 연결’의 저자 이프렘 스미스는 “힙합은 깨어진 세상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이다. 이제 랩과 함께 성장한 세대에게 희망을 전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힙합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교회가 힙합 문화를 거부한다면 이 세대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스미스가 말하는 ‘힙합 신학’이란 무엇인가. 힙합은 미국 흑인과 라틴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문화다. 힙합 신학은 바로 이들을 위한 해방과 화해의 신학이다. 스미스는 힙합 신학은 곧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면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적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했다. 그는 힙합 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사도행전 17장에서 찾는다. 문화를 정죄하는 대신 힙합의 요소인 디제이, 브레이크 댄서, 그래피티 아티스트, MC(래퍼)와 긍정적 원칙들, 평화, 연합, 사랑, 공동체, 즐거움을 가지고 복음을 전달한다. 힙합 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도록 부르셨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스미스는 ‘거룩한 힙합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매달 세 번째 주일을 ‘힙합 주일’로 정하고 힙합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예배를 드린다. ‘거룩한 힙합 예술가(holy hip-hop artist)’로 불리는 이들이 랩과 댄스로 찬양하고 예배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래피티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린다. 성도들은 편안한 복장으로 교회에 와 예배 속에서 하나가 된다.

물론 이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힙합 음악 속에 들어 있는 자극적이고 불경스러운 표현들은 전통적 크리스천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지만 힙합교회가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힙합교회는 음악이나 그림이 초점이 아니라, 잃어버린 세대가 주된 목표이고 목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배를 넘어 전도와 제자화, 선교에도 힙합의 문화가 접목돼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의 제자들: 힙합교회의 약속’의 저자 에릭 구티에레즈는 힙합의 잠재력은 단순한 도구 이상이라고 한다. 그에게 힙합은 강력한 전도방법이다. 크리스천 힙합은 사도바울의 사역과 비교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와 환경에 따라 말씀의 전달방법을 적절히 선택한 바울은 곧 초대교회의 힙합이었다고 한다. 힙합을 예배와 목회의 방법으로 여기는 것은 60년대 교회가 기타를 받아들이고, 80년대 교회가 록 음악을 수용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힙합은 단순히 음악적 장르라기보다는 정체성이며 문화다. 바로 이 점이 힙합을 전도의 강력한 수단으로 만드는 요소다. 구티에레즈는 크리스천 힙합이 교회를 참되게 하는 운동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힙합 운동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가스펠음악협회가 수여하는 도브상(Dove Awards)과 스텔라상(Stella Awards)에는 힙합/랩 부문이 포함돼 있다. 밴더빌트 신학대학교의 교수들은 힙합 음악과 저항 음악을 연구하고 있다. 노던 신학교에서는 ‘힙합교회’ 과목을 개설했다.

그러나 힙합교회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힙합 음악이 가지는 ‘자기 숭배(self-worship)’의 요소다. 크리스천 랩이 일반 랩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편과 예레미야애가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힙합 음악은 자신을 절대시하는 ‘자기 숭배’의 형태를 지닌다. 그래서 힙합이 타락한 음악의 형태라는 비난을 받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천 랩 아티스트 샤이 리네(Shai Linne)는 타락한 음악의 형태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만일 음악의 형태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책임이다.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한다면 그들의 음악 형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힙합 음악은 게토 청소년들의 리듬이자 시다. 이제 교회가 소외된 이들의 문화인 힙합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힙합의 외형만 수용해서는 안 된다. 음악의 형태에만 몰두해 복음의 메시지가 희석된다면 두렵고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힙합 음악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예배의 음악’이 돼야 한다. 교회는 힙합이 음악 그 이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힙합은 그 음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이다.

힙합 음악의 형태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중심이 아닌 경계와 주변의 문화를 교회가 수용하는 과정은 언제나 순탄치 않다. 그리고 모든 소수의 문화가 기독교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흑인사회 내에서는 힙합 세대의 출현으로 흑인인권운동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힙합 문화가 공동체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이고, 긍정과 소망의 메시지보다는 부정과 절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힙합은 흑인들과 같은 소수자들의 문화로 돼 있다. 어느 사회든지 탈전통적이고 탈규범적인 문화가 새로운 세대의 주목을 끈다. 때문에 미래교회는 이런 소수의 경계적·주변적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세상과 구별돼야 한다는 ‘분리주의’적 접근이나, 세상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동화주의’적 접근 모두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경계적· 주변적 문화의 부상과 약진은 미래사회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아마도 힙합교회를 넘어서 제3, 제4의 소수자 문화의 교회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영적 진정성과 진실성은 또다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분리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화주의자’가 될 것인가.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같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밟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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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7) 커피하우스 교회의 성장


편안한 공간서 기도·친교·봉사… 美, 카페형 교회가 뜬다

교회 안의 커피숍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커피숍 자체가 교회가 되고 있다. 이를 ‘커피하우스교회’ 또는 ‘카페교회’라 부른다. 이곳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찬양집회를 열며, 예배를 드리고, 기도모임을 갖는다. 심지어 미사를 드리는 가톨릭교회도 등장했다. 제단, 장의자,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는 전통적 교회의 모습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커피하우스는 교회를 만나게 하는 부담 없는 공간이 되고 있다.

커피하우스 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성도들 간의 친교와 지역사회봉사다. 미국 미시간주 알마에 있는 알마 마운트호프 커피하우스 교회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사도행전 2장 42절 말씀에 근거해 성도 간의 친교를 강조한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의 글레브 카페교회는 자신들 사역의 핵심 가치가 환대, 창조성, 제자화, 사회와 환경적 정의라고 밝히고 있다.

커피하우스는 성도들 간 교제를 위한 아주 훌륭한 장소와 기회를 제공한다. 예배를 마치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를 떠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있을 곳도,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커피하우스는 그들을 교회에 남아 있게 하는 장소와 이유가 될 수 있다. 그곳에서 얼굴로만 알던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새 신자에게도 기존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커피하우스 교회는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커피하우스 목회를 선도하고 있는 워싱턴 내셔널커뮤니티 교회(마크 배터슨 목사)의 에벤에셀(Ebenezers)을 살펴보자. 미국의 국회의사당 바로 뒤에 위치한 에벤에셀은 양질의 커피와 음료 그리고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최고급 커피하우스다. 그들은 공정거래를 통해 구입한 커피를 사용하고, 수익금은 모두 지역사회를 위해 사용한다. 에벤에셀 커피하우스 교회의 특징은 매장 바로 밑 지하가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는 점이다. 이 공간에서는 다양한 모임, 음악회 등을 열 수 있고 누구나 이 공간을 예약해 사용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손님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 하나의 유형은 텍사스주 휴스턴의 에클레시아 교회가 운영하는 태프트스트릿 커피(Taft St. Coffee)다. 이 교회의 경우 커피하우스 바로 옆이 예배의 공간이다. 따라서 커피하우스를 찾아 온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예배로 초대할 수 있다. 이 커피하우스가 특별한 것은 벽면을 장식한 예술작품들이다. 그림과 조각들은 성도들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판매되며, 수익금은 모두 선교비로 사용된다. 에클레시아 교회의 담임목사 크리스씨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그의 책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 이 교회는 예배 중에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며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커피하우스는 예술작품의 전시장 역할도 하고 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젊은 세대들의 문화와 감각을 잘 이해하고 있는 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커피하우스 교회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데일리 자바의 운영자 마이크 바실(Mike Bacile)은 이 질문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조언을 다음과 같이 해준다.

첫째, 커피하우스를 지원할 수 있는 일정 정도의 교인이 있어야 한다. 커피하우스가 재정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최소 500명 이상의 성도가 있어야 한다. 둘째, 위치와 규모가 중요하다. 부동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다. 성전에서 예배를 마치고 바로 갈 수 있는 눈에 띄는 장소여야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어울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테이블과 의자도 수시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커피하우스의 외관과 내부도 일반 커피숍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 넷째, 고급커피와 함께 고급차, 스무디, 프라페, 시럽 등을 제공해야 한다. 차(tea)는 급속히 성장하는 품목이다. 다양한 메뉴는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시음회를 하라. 질을 높이는 것이 고객을 부르는 길이다. 다섯째, 에스프레소 기계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교인의 수와 연령, 운영비 등을 고려하여 적합한 가격의 기계를 준비해야 한다. 여섯째, 직원들을 적절히 교육해야 한다.

커피하우스 운영을 위한 바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제안은 이와 유사한 목회를 계획하는 교회들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커피하우스 교회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것은 목회와 사업 사이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비록 봉사를 위해 이익을 남긴다고 할지라도 사업의 유지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상업주의와 세속주의의 유혹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밀레니엄 미니스트리(The Millennium Ministry)의 라 맥러프린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어 놓는다. “커피하우스 교회는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교회가 커피하우스를 중요한 목회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면 커피하우스는 사업이 아닌 목회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커피하우스의 시작과 운영은 전적으로 기부된 재원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커피하우스에서 제공되는 것은 모두 무료로 해야 한다. 커피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여야 한다. 커피하우스의 커피와 음식은 기부를 받아야 한다.” 맥러프린의 이야기는 커피하우스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제안으로 보인다. 다행히 많은 커피하우스 교회가 맥러프린의 제안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째든 커피하우스 교회(교회 안의 커피하우스를 포함하여)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커피하우스 교회의 성장은 교회가 공식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교회 하면 떠오르는 높은 첨탑, 스테인드글라스, 공연장 무대 대신 푹신한 소파와 따뜻한 한 잔의 커피가 교회의 이미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곳,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던 곳이 커피하우스 교회에서 다시 복원되는 것은 아닐까.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554714&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6) 2020년의 교회 미리보기


카리스마 리더십 약화, 밀레니엄세대 성향 맞춰 가정목회 성장

지금부터 8년 후 2020년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급속히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더 어렵다. 그래서 미래예측은 종종 허망한 일이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심스럽게 미래를 예측해 보려는 것은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최근 레이너 리서치의 대표 샘 레이너는 2020년 교회에 나타날 10가지 추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추세 1: 이질적 구성원들의 교회가 증가할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성인이 될 때 동질의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성장은 둔화될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동일한 인종, 동일한 계층을 구성원으로 삼는 공동체가 되어 왔다. 그러나 베이비부머 세대부터 변화가 일어났다(미국에서 밀레니엄 세대는 16∼29세, X세대는 30∼44세, 베이비부머 세대는 45∼59세, 위대한 세대는 60세 이상을 의미한다). 이질적 구성원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양성은 교회의 중요한 가치가 됐다. 이제 밀레니엄 세대에게서 다양성은 규범이 됐다(밀레니엄 세대는 197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로, 지금 10∼20대를 일컫는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와 게임, 온라인 커뮤니티에 적극 참여하며 기술적 변화에 빨리 적응한다). 물론 미래에도 동질 공동체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밀레니엄 세대는 이질적 구성원들이 모인 교회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추 세 2: 교회 출석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단순한 출석률의 감소가 아니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출석빈도의 감소다. 예를 들어 주일 평균 출석인 수가 500명인 교회가 있다고 하자. 만일 이들의 출석빈도가 한 달에 두 번이라고 한다면 실제 출석률은 250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수가 줄어들 것이다.

추세 3: 보수적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교인 수의 감소는 모든 교회와 교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장하는 교회는 신학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밀레니엄 세대는 사회 이슈에 대해서는 진보적이지만,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 성향을 띨 것이다. 이들은 보수적 성향의 교회에 출석하든지, 아니면 교회에 가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추세 4: 심오한 가르침이 더욱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청장년층 성도 중 많은 수가 신학적으로 심오한 가르침을 찾아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성공과 번영 등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만 집중한 교회는 새로운 세대의 지적·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성경적으로 깊은 차원의 가르침을 제공하는 교회가 주목받게 될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 자체를 깊이 가르치는 교회를 선호할 것이다.

추세 5: 베이비부머를 위한 목회가 등장할 것이다. 노년이 된 베이비부머는 과거의 노년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현재 노년을 위한 목회는 베이비부머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베이비부머들은 친구들과 함께 교회버스를 타고 소풍을 가거나 관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베이비부머들은 이전과 다른 노인이 될 것이다. 이들을 위한 목회가 등장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 세대는 자신들의 만족보다 이웃의 만족에 더욱 큰 가치를 둘 것이다. 그래서 야유회보다는 오지로 떠나는 선교여행을 선호할 것이다.

추세 6: 가정을 위한 목회가 성장할 것이다. 라이프웨이 리서치에 의하면 밀레니엄 세대의 최우선적 관심은 가정이라고 한다. 모든 목회에 가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올 것이다. 또한 이 세대는 자신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가족도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가정을 위한 목회는 항상 중요했지만 앞으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최근 부상하고 있는 가정교회는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추세 7: 교회 사역자 유형이 다양해질 것이다. 우선 다양한 교회교육 목회의 유형이 나타날 것이다. 캠퍼스라고 불리는 지교회를 확장해가는 멀티사이트(multi-site) 교회의 경우 목회에 있어서 네트워크 운영에 뛰어난 스태프들이 등장할 것이다. 교회들은 제자화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상하구조의 리더십보다는 수평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다양한 사역자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사역자들의 역할인 설교, 예전, 상담, 심방, 교육, 행정 이외에 기도, 홍보, 온라인 관리, 행사, 소그룹 운영, 선교여행 등 영역에서 사역하는 전문사역자가 등장할 것이다.

추세 8: 교회 건물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부각될 것이다. 교회가 건물(building)이 아니라 성도(people)라는 사실을 깨달은 교회는 건물에 대한 오래된 집착에 대해 반성을 했다. 그래서 학교체육관이나 극장 같은 공공장소를 예배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회나 행정을 위한 공간으로서 건물이 아니라, 제자화를 위한 센터로서 건물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과다한 유지비를 필요로 하는 건물이 아니라 실제적 기능이 강화된 새로운 교회건축 양식의 건물은 사역에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될 것이다.

추세 9: 카리스마형 리더십(charismatic leadership)은 약화될 것이다. 카리스마형 리더십은 목회자의 인격과 은사에 기초한다. 반면 리더가 리더를 만드는 변형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은 전 구성원이 함께 나누는 비전에서 권위를 찾는다. 이 두 유형의 리더십은 교회가 모두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변형적 리더십이 더욱 요구될 것이다. 변형적 리더십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이때 리더에게는 창조성, 투명성, 진정성이 기대된다. 통솔 능력보다는 소통 능력을 요구하는 추세가 교회에도 불어 올 것이다.

추세 10: 지역적이고 개별적인 가르침이 확대될 것이다. 한 설교자가 영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쇠퇴할 것이다. 인터넷과 팟캐스트 기술이 발달하면서 온라인을 통한 교육이 번성했다. 물론 이를 통해 양질의 교육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제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변형적 리더십이 확대되면서 인터넷 세대들은 화면을 통한 학습보다 지역적이고 개별적인 가르침을 갈망하게 되었다. 미래에는 멀티사이트 교회에서조차 지역의 리더들을 통한 가르침이 더욱 보편화될 것이다.

과연 이들 중 몇 가지가 8년 후 교회의 모습이 될지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 상황을 살펴볼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들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이다. 말하자면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수직적 관계는 더욱 확고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웃과 우리 사이의 수평적 관계는 더욱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분명히 서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전파에 교회는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미래는 복잡한 방정식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진리 속에 우리의 미래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분명하고 단순한 진리를 잡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와 용기가 아닐까.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5) 기대·우려 교차되는 가정교회운동

美 개신교인 9% 가정교회서… 전통적 교회와 건강한 공존 필요

2010년 10월 21일 미국의 NBC 방송은 ‘예배의 집(House of Worship)’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보도를 내보냈다. 내용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정교회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미국인 중 600만에서 1200만명이 가정교회에 속해 있다고 한다. 미국 개신교인의 9%가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보도는 가정교회가 새로운 예배의 형식과 내용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가정교회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가정교회(house church 또는 home church), 중국에서의 지하교회(underground church), 혹은 가족교회(family church)는 가정과 같은 장소에서 소규모 신자들이 모이는 독립적 예배공동체를 의미한다. 가정교회의 기원은 초대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13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집의 다락방에 모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이 운동은 ‘단순한 교회(simple church), 관계적 교회(relational church), 원시적 교회(primitive church), 지체의 삶(body life), 유기적 교회(organic church), 성경적 교회(biblical church)로도 불리고 있다. 서로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들 모두 교회가 ‘조직화된 공동체(an organized community)’에서 ‘유기체적 공동체(an organic community)’로 회복돼야 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통계를 살펴보면 방글라데시에서는 가정교회를 통해 50만명의 새로운 신자가 생겼고, 캄보디아에서는 1990년 이후 10년 동안 1000개의 가정교회가 세워졌다. 캐나다에서는 지난 몇 년간 2000개의 가정교회가 설립되었고, 중국에서는 가정교회 신자가 8000만에서 1억명에 달하고 있다. 쿠바에서는 1992년 이래 6000에서 1만개의 가정교회가 나타났고, 이집트에는 400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1980년대에만 가정교회의 신자가 5000명에서 5만명으로 증가했다. 인도에서는 2001년에서 2006년 사이 10만개 가정교회가 새롭게 개척됐다. 남미에서는 2004년 7개월 동안 131개 가정교회가 세워졌다. 베트남에서는 1997년에서 99년 사이 한 교회의 교회개척팀이 550개의 새로운 가정교회를 설립했다.

이로써 1960년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카리스마틱 부흥운동과 1970년대 미국의 예수운동과 함께 다시 움트기 시작한 가정교회운동은 새로운 성장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의 교회운동이 다시 불붙은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가정교회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프랭크 바이올라가 말하는 가정교회의 ‘유기체적 본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에 의하면 유기체적 교회는 인간의 제도나 종교적 프로그램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삶에서 나온 것이다. 공동체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구성원은 모두 예배와 사역에 참여하며, 상하의 계급구조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공동체의 머리이며 주님이시다. 따라서 유기체적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제도적 기구(an institutional organization)가 아니라 영적 유기체(a spiritual organism)가 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가정교회의 특성을 살펴보자면 첫째, 교회 구성원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배우고 그 삶을 드러낸다. 둘째, 교회 구성원은 자신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며 모임과 공동체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나눈다. 셋째,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고 모든 구성원은 함께 참여하고 사역한다. 각자 다른 사역과 역할이 있으며 목회자와 함께 의사결정에 기여한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머리가 되신다. 다섯째, 교회는 신학적 체계나 실천 방법 또는 인간적 성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는다. 여섯째, 교회는 한 주에 한 번 모임을 갖지 않는다. 가능한 한 자주 모이고 친밀한 공동체를 유지한다. 일곱째,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전도, 제자화, 사회정의, 영적 은사, 교회 성장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뜻을 따르기 위해 모인다.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①서구를 시작으로 기독교의 영향이 점점 약화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사회적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일 교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많은 교회들이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유형의 목회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됐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선교적 공동체 또는 유기적 교회의 개념을 찾게 됐다. ②최근 경제위기가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인 수가 줄어든 교회는 건물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고 소규모 교회의 유기적 연합을 모색하게 됐다. ③반기독교 분위기의 영향으로 공공건물을 예배 장소로 이용하기 어렵게 됐다. ④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유기적 교회의 방향으로 이끄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교회에는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유기적 제자도(Organic Discipleship)’의 저자이며 제노스 펠로십(Xenos Fellowship)의 담임목사인 데니스 맥컬럼은 가정교회의 사역에서 우려되는 점들을 지적했다. 첫째, 가정교회는 종종 초대교회의 규모에 대해 오해를 갖고 있다. 즉 소규모 가정 단위의 모임만 존재하고 큰 규모 집회는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가정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2장 46절은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라며 단지 가정에서만 모인 것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였던 솔로몬행각의 경우 수만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

둘째, 리더를 선택할 때 종종 옳지 못한 기준을 적용한다. 디모데전서 3장 8∼13절은 집사의 자격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알려준다. 그러나 교회는 보통 개인의 사회적 능력, 직업, 재정후원 또는 연령에 따라 리더를 결정한다. 이것은 가정교회의 영적 성장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가정교회는 종종 내부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정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 외부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공동체다. 이러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가정교회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문제에 집착해 분열되거나 불만족을 드러내게 된다.

넷째, 가정교회 리더들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소규모 그룹의 역동성에만 관심을 갖다 보면 리더를 준비시키는 일에 게을러질 수 있다. 가정교회의 요구와 더 큰 범위의 교회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을 갖기 위해 리더의 교육과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섯째, 가정교회는 자기증식을 통한 성장을 꺼리는 성향이 있다. 소규모 가정교회의 친밀도가 높아지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거나 새로운 그룹으로 나뉘는 것을 원치 않게 된다. 이는 가정교회의 존재이유를 망각한 태도다. 교회는 구원받은 이들이 날마다 늘어나는 것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공동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기체적 교회인 가정교회는 제도적 교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키고 전해 온 신앙공동체다.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가정교회와 전통적 교회 사이의 건강한 공존일 것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밟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511865&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4) 선교적 교회운동

교회는 단순한 선교를 넘어 사회정의 일까지 부름받아

지난 10여년간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운동(Missional Church Movement)’은 교회갱신운동의 키워드가 되어 왔다. 이는 ‘선교적 삶(Missional Living)’,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적 태도, 사고, 행동, 실천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적’이라는 말은 팀 켈러, 에드 스테처, 마이크 브린, 앨런 허쉬, 마이클 프로스트 등이 주로 사용한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을 따르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삶의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선교적 삶’이란 라틴어 ‘미시오 데이(Missio dei)’, 즉 ‘하나님의 보내심’에서부터 온 개념이다. 1934년 독일의 선교학자 칼 하텐스타인이 칼 바르트의 ‘액치오 데이(actio Dei)’, ‘하나님의 행위’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이 만든 용어다. 미시오 데이란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본성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고 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레슬리 뉴비긴은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것을 지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했다. N T 라이트는 “교회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리는 ‘사명’으로 부름을 받은 것 때문에 존재한다”고 했다. 다렐 구더는 “선교는 단순히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로 정의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선교를 하는 교회’에서 ‘선교적 교회’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했다.

선교적 교회운동은 교회를 프로그램 중심(program-focused)에서 사람 중심(people-focused)의 교회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선교 지도자 양성 전문가 레기 맥닐은 “선교적이라 함은 소속이나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선교적으로 살고 선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교와 연결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양식을 갖게 되면 목회의 초점은 ①내부에서 외부로 ②프로그램 개발에서 인간 개발로 ③교회 기반에서 하나님 나라 기반으로 이동하게 된다.

때문에 선교적 교회운동의 리더들은 교회가 더 이상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몰두하지 말라고 한다. 대신 교회는 복음을 세상으로 가지고 나가야 하며, 이는 전도와 선교를 넘어서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선교적 교회운동에는 어떤 흐름이 있는가. ‘교회는 평평하다’의 저자 토니 존스는 두 그룹의 선교적 교회운동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그룹은 신학자와 선교학자들을 중심으로 1990년대 중반 ‘복음과 문화 네트워크(Gospel & Our Culture Network)’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다렐 구더, 조지 헌스버거, 로이스 바렛, 크레이 반 겔더, 팻 카이퍼트, 앨런 록스버그가 있으며 대표적인 연구서로는 ‘선교적 교회’와 ‘질그릇 속의 보화’가 있다.

이들은 주류 신학계에 속한 학자들로 복음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레슬리 뉴비긴과 데이빗 보쉬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대부분 바르트 계열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주된 주장은 교회가 세속적 문화 속에 잠식되면서 선교적 추진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선교적 친구들(Friends of Missional)’로 분류된다. 이들은 2000년대 초 ‘이머전 빌리지’로 대표되는 이머징 교회운동이 점차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을 띠게 되자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복음주의에 기반을 두고 자유주의적 신학에 대해서는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머전 교회운동이 비판하는 복음주의 교회의 문제점에는 이들도 공감을 했다. 즉 교회가 지나치게 상업주의화되어 가고, 복음의 예언자적 본성을 잃었다는 것에 함께 문제의식을 가진 것이다.

이들은 아나밥티스트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와 스탠리 하우어스에게 주로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이 그룹은 데이비드 피치, 앨런 허쉬, 밥 하이야트, 에드 스테처 등 목회자, 교회 개척자, 교회 컨설턴트 등 현장 사역자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 결성된 ‘에클레시아 네트워크(Ecclesia Network)’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두 그룹의 특성을 살펴보자면 첫 번째 그룹은 주류 교단 출신들이고, 바르트 신학에 속해 있는 반면 두 번째 그룹은 복음주의자들과 초교파 교회 개척자들로 이루어졌고, 신학적으로는 하우어스에 속해 있다 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이론가들이고 두 번째 그룹은 실행가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동일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예언자적으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세력이 되어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으로 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는 어떻게 선교적이 될 수 있을까. 오스틴 시티 라이프 교회 조나단 닷슨 목사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8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① 비기독교인들과 식사하라.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앙을 갖지 않은 동료나 이웃들과 식사를 함께하라-기독교적 내부문화에서 나오라. ②자동차를 이용하지 말고 걸어라. 집 근처 동네와 아파트 주변, 캠퍼스 안을 걸어라.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라. 주위를 끌기 위해 애견과 함께 걸어도 좋다. 친구를 사귀어라-기름을 아끼고, 지구를 보존하고, 이웃을 구원하라. ③같은 장소를 같은 시간에 가라. 웃어라. 질문하라. 친구가 돼라.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1주일에 두세 번 남은 빵을 교회에 가져다주고, 우리는 이것을 노숙인들에게 나누어 준다-정기적으로 하라. ④비기독교인들과 취미를 함께하라. 운동이나 음악 등 취미활동에 참여해 즐거움을 함께 나누라. 이때 기도로 준비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라-꾸밈없이 대하라. ⑤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라. 휴식시간 또는 일과 후 동료와 시간을 가지라. 그리고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이라. 동료 중 네 명을 선택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웃 어머니들과 모임을 만들라. 이때 기독교인들만 모이지 말라. 아이들과 함께 놀 날을 정하라-일하며 선교하라. ⑥비영리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라. 집이나 회사 주변의 비영리 단체를 찾아라. 한 달에 한 번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라. 이때 이웃, 친구를 초대해 함께 가라. 당신의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라. 한 달에 한 번-당신도 할 수 있다. ⑦지역사회 행사에 참여하라. 집에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대신 지역사회 행사에 참석하라. 선교적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참여하라. 그곳에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 문화에 대해 배우라. 보고 들은 것을 되새겨보고 지역을 위해 기도하라-지역사회와 함께하라. ⑧이웃을 섬겨라. 크고 작은 이웃 일에 도움을 주라. 아파트 사무실, 경찰서, 소방서에 가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물어보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주라-창조적으로 생각하라.

선교적 교회운동은 멀리 있는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과 태도를 바꾸고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이다. 기억하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470685&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3) 업그레이딩 처치

‘처치 3.0’ 거대한 물결이 밀려온다

“교회도 마치 컴퓨터처럼 운영체계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다.”

이는 교회증식·개척 연구의 최고 권위자 닐 콜(Neil Cole)의 말이다. 컴퓨터가 업그레이드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운영체계가 더욱 단순해지며 직관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제 수행에 있어서 컴퓨터가 더욱 강력한 능력을 가지기 바란다. 교회는 어떻게 업그레이드되어 왔나. 닐 콜은 사도행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는 두 번의 업그레이드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업그레이드는 콘스탄틴 황제 시절 일어났다. 교회는 지하에서, 풀뿌리로부터, 유기적인 운동으로 시작해 제도화된 조직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리고 두 번째 업그레이드는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처치 1.0

초대교회는 처치 1.0의 교회였다. 처치 1.0은 제도를 갖추지 않은 운동이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처치 1.0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교회로 처치 1.0이라 부를 수 있다. 안디옥 교회는 처치 1.1, 바울과 바나바가 세운 갈라디아 교회는 처치 1.2, 고린도 교회는 처치 1.3, 에베소 교회는 처치 1.4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두 세기 동안 로마 황제 10명의 압제와 박해 속에서 교회는 단순하고 유기적인 운영체계를 지켜왔다. 이단이 출현하고 정화되면서 교회는 지역의 감독을 세우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교회는 강력한 박해의 환경 속에서도 제도가 아닌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었다.<사진 1>

그러나 서기 313년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공인해 주었다. 이때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콘스탄틴은 첫 번째 기독교인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그 위치가 바뀌었다. 기독교는 국가의 종교가 되었다. 즉 교회가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처치 2.0으로의 업그레이드였다.

#처치 2.0

콘스탄틴 이후 수세기 동안 서구의 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가 세워지는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핵심적 운영체계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교회와 처치 2.1이라 부를 수 있는 개신교가 서로 분리됐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 모두 제도로서 체계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오순절 교회에서 개혁교회, 침례교에서 형제교단, 메노나이트에서 감리교, 파이프오르간에서 전자기타, 전통적 교회 건물에서 현대적 공간으로 변화하면서도 처치 2.0 운영체계는 그대로 유지됐다.

주일예배에서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며, 목회자는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의자에 앉아 말씀을 듣는 형태는 4세기 이후 지속돼 온 교회의 모습이다. 간혹 교회음악의 유형이 바뀌고 설교의 스타일이 변하며, 교회 교육의 시스템이 새로워졌다고 해도 교회의 운영체계는 여전히 이전 모습 그대로였다.<사진 2>

물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과거의 기존 운영체계(초기설정), 처치 1.0으로 돌아간 교회들도 있었다. 급진적 아나밥티스들이 그런 경우였다. 물론 중국의 가정교회도 유사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단지 새로운 교회의 운영체계, 처치 3.0으로 이동하는데 준거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처치 3.0

이제 교회 역사에 두 번째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단지 앞으로 갈 수 있을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처치 1.0보다 더 나은 처치 3.0을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닐 콜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대교회 이후 2000년의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경험들과 오늘날의 기술문명이 교회가 처치 3.0으로 가는 길을 도울 것이라고 한다.

처치 3.0으로의 변화는 어떤 것인가. 닐 콜이 자신의 책 ‘처치 3.0: 미래교회를 위한 업그레이드’에서 다룬 13가지 변화의 모습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마을교회에서 지구촌교회 ②근대세계에서의 목회로부터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목회 ③오는 것에서 가는 것으로 ④산술적 증가에서 기하급수적 증가 ⑤회중에서 네트워크 ⑥중심화에서 탈중심화 ⑦천편일률적 목회에서 그룹 특성에 맞는 목회 ⑧회심자 모으기에서 촉매적 운동 ⑨성직자의 예전에서 사도적 특성 ⑩학자적 모형에서 영적 가족 ⑪훈련된 목회자에서 훈련된 성도 ⑫10%에서 전체 ⑬교육에서 권한 부여.

이들 중에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닐 콜에게 있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처치 2.0에서 처치 3.0으로의 업그레이드는 단순히 몇 가지 임시변통적 처방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관한 전면적이고 철저하며 완전한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그램 중심, 목회자 중심의 제도적 접근에서 관계적이고 단순하며, 전파성이 있는 방향으로 교회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닐 콜의 업그레이딩 처치의 비전을 들어보자.

첫째, 처치 3.0은 영적 능력에 의존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처치 2.0)에서 관계로서의 교회(처치 3.0)로의 변화는 이성에서 영성으로의 길을 넓게 열어줄 것이다.

둘째, 처치 3.0은 단순성과 직관성을 운영체계로 삼게 될 것이다. 이는 교회가 새로운 변화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체계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최근 기술의 진보가 개인과 개인, 교회와 교회가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넘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게 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처치 3.0이 얻게 될 기술적 유익이다.

넷째, 처치 3.0은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어 교회의 참된 모습과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치 3.0은 운영체계 향상으로 몇 사람의 훈련받은 사역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교회의 사역과 사명에 함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처치 3.0의 관점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섬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 그 자체다. 따라서 교회는 더 이상 참석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가족인 것이다. 즉 교회는 세상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사람들인 것이다.

처치 2.0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고, 얼마나 많은 재정적 능력이 있는가로 성공을 평가받았다. 그러나 처치 3.0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come)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내는가(go)로 평가를 받는다. 즉 수용능력(seating capacity)이 아니라 파송능력(sending capacity)이 교회 성공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표>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건물, 새로운 예배의 형태가 아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운영체계다. 운영체계 처치 3.0말이다. 서기 300년대 초대교회는 제도화된 유형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는 이 유형에 고착돼 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처치 2.0에서 벗어나 처치 3.0으로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하라. 만일 교회가 업그레이드를 뒤로 미루거나 업그레이드에 실패한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골동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448835&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2) 과거에서 찾는 교회의 미래

기독교 내일의 희망, 초대교회에 길이 있다

2007년 휘튼칼리지에서 열린 휘튼신학회의(Wheaton Theology Conference)의 주제는 ‘교회의 미래를 위한 고대신앙(The Ancient Faith for the Church’s Future)’이었다. 이 회의의 주최자들은 “최근 복음주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희망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초대교회가 가진 풍부한 성경적, 영적, 신학적 보고(寶庫)들이 재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계몽주의의 영향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진리를 되찾자고 외쳤다.

어찌 보면 이들의 주장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의 간단없는 외침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이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혜를 찾고 본질을 되새기는 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사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길을 찾으려는 것은 역사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과연 교회의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는 과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스타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 그리고 서기 350년 사이 일어난 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서기 40년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불과 1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박해를 견디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300년 동안 기독교는 매년 40%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신자가 3300만명으로 늘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가 5600만명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성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던 유대인들의 한 분파가 제국의 중심에 서게 되는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진 1: 기독교의 발흥)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초대 기독교의 이 같은 경이로운 성장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우리가 이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교회가 가야 할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타크가 밝히는 첫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초대교회에서 복음 전파는 오늘날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전도자나 선교조직, 또는 전도여행과 방법이 없었다. 사실 그러한 조직이나 방법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단지 소규모의 가정교회(회중)에서 자신들의 삶과 고백이 담긴 살아있는 간증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사랑, 돌봄, 나눔의 삶은 주변 사회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진2: 가정교회)

두 번째 요소로 스타크가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이웃을 참된 사랑으로 돌보았다는 점이다. 역사를 보면 서기 165년에서 180년까지 로마제국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병이 돌았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인구 중 3분의 1이 사망했고, 어떤 때에는 매일 5000명이 죽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 기독교인들의 생존율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높았다. 그 이유는 바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했고, 특별히 병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노력했던 데 있었다. (사진3: 안토니우스 역병)

세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결혼과 가정생활을 성결하게 지켜나갔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제국의 성적 도덕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특별히 대도시와 식자층에서 더 심했는데 동성애, 낙태, 매춘, 결혼과 가정생활에 있어서 성적 타락이 극에 달했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여자아이가 출생하면 바로 죽이는 일이 빈번했던 점이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사회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녀의 성비를 보면 수많은 전쟁에서 많은 남성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100에 남성 131∼140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적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는 견고한 결혼과 가정생활을 이루도록 서로를 도왔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높은 출생률을 유지했으며, 혼인과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많았다. (사진 4-영아의 무덤)

네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이 인종차별과 신분차별을 강력히 거부했다는 점이다. 로마제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으로 세계화되어 가고 있었다. 역병과 함께 결혼과 가정의 타락은 인구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 로마는 주변국가의 사람들이 자국의 주요 도시로 이주해 오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다수의 인종, 국가, 언어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의 대도시에 섞여 살게 됐다. 때문에 문화적, 인종적 갈등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 모든 사회에서 신분의 구별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로마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저항했다. 물론 저항의 대가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들 앞에 놓였던 것이다. (사진5-콜로세움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순교)

다섯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이 성실히 일했으며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신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11∼12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박해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황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없이 제국을 통치할 수 없고, 기독교인들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진6-콘스탄틴의 세례)

초대 기독교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제국의 법을 어기는 범법자 취급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근사한 교회 건물도, 변변한 성경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지도자들도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구도자 예배나 교회학교, 찬양팀, 신학교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은 지켜지고 교회는 성장했다. 온갖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굳게 지키면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와 목회를 위해 오늘날 시도되는 새로운 노력들이 전부 무익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한 본질과 핵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래교회는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을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즉 ‘과거(본질)를 향해 미래를 개척(혁신)하는’ 교회가 바로 미래교회의 모습이 돼야 할 것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서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425910&code=23111613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1) 연재를 시작하며

“미래교회로 여행, 함께 떠나요”

2010년 미국의 교회리서치 전문가 조지 바나는 미국 교회 안에 일고 있는 6가지 충격적인 트렌드를 발표했다. 첫째, 교회는 자신의 신앙에 점점 더 무지해지고 있다. 신앙의 핵심조차 모르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부활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신자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성인들은 신앙과 삶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며 성령이 살아계시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은 성경에 무관심해지고 있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사회로부터 더욱 고립되고 있으며 좀처럼 교회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 나누지 않으며, 성인들은 개인적 위기가 닥칠 때만 신앙에 관심을 보인다. 더 심각한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전략적으로 사회봉사에 뛰어들 때 교회는 사회적 책임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에 당면했을 때 영적인 방법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신앙보다는 교육, 친구관계, 직업, 여행과 같은 것에 삶의 우선순위를 둔다. 내세보다는 현세의 삶에 몰두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넷째, 기독교인들은 사회공동체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시민단체나 사이버 공동체를 신앙공동체보다 더욱 신뢰한다. 이는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고 있으며, 사회공동체가 교회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다섯째, 관용에 대한 주장이 교회를 압도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 및 빈약한 영성과 함께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트렌드에서는 사랑을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단순하게 정의한다. 이로 인해 신앙을 위해 바로 서는 것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불균형이 일어나면서 신앙을 위한 싸움과 타협될 수 없는 영적 진리가 희석되고 있다.

여섯째, 교회가 문화와 개인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미디어는 교회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희화화하는 데만 열중한다. 선정주의와 상업주의에 매몰된 미디어는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데만 관심을 둔다.

위의 내용은 미국 교회의 환경에서 살펴본 트렌드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어찌 보면 우리는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에 가장 적대적인 사회문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교회 상황과 다른 점은 과거에는 교회를 적대시하는 게 외부세력뿐이었다면 지금은 내부의 적이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내부의 적이란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무관심, 이기주의, 세속주의, 인본주의와 같은 것들이다.

교회는 이 같은 상황을 자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역경은 교회를 성숙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좋은 양분이 돼왔다. 많은 이들이 절망의 트렌드를 이야기할 때 믿음의 사람들은 희망의 트렌드를 만들어왔다. 그럼 미래교회를 위해 우리가 개척해나가야 할 희망의 트렌드는 어떤 것인가? 혁신적 목회자이며 교회컨설턴트인 윌 맨시니에게 들어보자.

첫째, 미래교회에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에 대한 분명한 비전은 교회 지도자들이 가질 최고의 자산이 될 것이다. 교회가 가질 가장 핵심적 가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다. 최근 교회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는 데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실로 희망의 트렌드다. 이제 제도로서 교회에 대한 충성보다는 믿음의 대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이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때라 할 수 있다.

둘째, 비전과 영성은 두 가지 별개의 영역으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될 것이다. 맨시니는 “미래에는 전략적 논의와 비전을 나눌 때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태도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영성과 신비의 재발견이라는 트렌드와 결코 무관치 않다. 세상이 교회로부터 듣고 싶은 이야기는 사회적 문화적 분석이 아니라 영적 고백이다.

셋째,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등장할 것이다. 이미 멀티사이트 교회, 가정교회, 선교공동체 등 작은 규모의 교회가 의미 있는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작은 마을과 소규모 교회들을 엮어주는 새로운 네트워크 ‘스틱스’(thesticks.tv/#)의 출현은 이 같은 트렌드를 반영한다. 규모로 목회의 영향력을 측정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신앙의 본질을 뚜렷이 드러내는 교회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넷째, 디지털 세계와 소셜미디어는 많은 교회들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다. 아직 많은 교회들이 뒤처져 있지만 향후 10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미국의 경우 현재 라이프처치(LifeChurch.tv)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비디오티칭(VideoTeaching.com)과 유버전(YouVersion.com)도 사역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아직 온라인 세계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 영혼이 존재하는 한 교회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선교지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섯째, 네트워크는 새로운 교파의 역할을 할 것이다. 기존 교단은 여러 가지 내부 문제에 발목이 붙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교회개척네트워크의 경우 그 안에서 새로운 학습, 새로운 전략, 새로운 관계들이 형성된다. 성장하고 있는 네트워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액츠29(Acts 29), 리디머시티투시티(Redeemer City to City), 뉴싱(New Thing), ARC, 처치플랜터스(Church Planters.com), PLNTD, 비전360(Vision360), ICF Movement 등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교회의 전통과 신학이 교파를 형성하는 요소였다면 미래 교회는 선교와 봉사의 접근방식이 새로운 교회공동체의 협력과 통합의 동인이 될 것이다.

여섯째, 성경적 정의(Biblical Justice) 운동이 지속될 것이다. 최근 릭 워런의 P.E.A.C.E Plan과 빌 하이벨스의 글로벌 어드벤추어스와 같은 사회정의 운동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밀레니엄 세대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조직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일부 신학적 문제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지만 여기에는 다분히 긍정적 측면이 있다.

돌아보면 교회에는 언제나 절망의 트렌드와 희망의 트렌드가 공존해 왔다. 그렇다면 어떠한 교회에 미래가 주어질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절망의 트렌드를 ‘분별’하고 희망의 트렌드를 ‘소망’하는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미래를 약속받을 것이다.

김영래 교수=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드루대에서 목회학 석사(M.Div), 예일대에서 신학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국제적 미래교회연구기관인 스프릿벤처미니스트리(SpiritVenture Ministries) 이사와 한국지부 대표를 맡고 있고, 지저스링크글로벌(jlinkglobal.com) 대표로서 미래교회와 교육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 기독교교육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 세신교회 소속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 ‘성공하는 부모의 12가지 모델’ ‘기독교교육과 미래세대’ ‘미래교육목회’ 등이 있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서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404521&code=2311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