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5일 토요일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2) 과거에서 찾는 교회의 미래

기독교 내일의 희망, 초대교회에 길이 있다

2007년 휘튼칼리지에서 열린 휘튼신학회의(Wheaton Theology Conference)의 주제는 ‘교회의 미래를 위한 고대신앙(The Ancient Faith for the Church’s Future)’이었다. 이 회의의 주최자들은 “최근 복음주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희망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초대교회가 가진 풍부한 성경적, 영적, 신학적 보고(寶庫)들이 재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계몽주의의 영향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진리를 되찾자고 외쳤다.

어찌 보면 이들의 주장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의 간단없는 외침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이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혜를 찾고 본질을 되새기는 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사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길을 찾으려는 것은 역사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과연 교회의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는 과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스타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 그리고 서기 350년 사이 일어난 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서기 40년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불과 1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박해를 견디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300년 동안 기독교는 매년 40%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신자가 3300만명으로 늘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가 5600만명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성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던 유대인들의 한 분파가 제국의 중심에 서게 되는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진 1: 기독교의 발흥)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초대 기독교의 이 같은 경이로운 성장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우리가 이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교회가 가야 할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타크가 밝히는 첫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초대교회에서 복음 전파는 오늘날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전도자나 선교조직, 또는 전도여행과 방법이 없었다. 사실 그러한 조직이나 방법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단지 소규모의 가정교회(회중)에서 자신들의 삶과 고백이 담긴 살아있는 간증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사랑, 돌봄, 나눔의 삶은 주변 사회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진2: 가정교회)

두 번째 요소로 스타크가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이웃을 참된 사랑으로 돌보았다는 점이다. 역사를 보면 서기 165년에서 180년까지 로마제국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병이 돌았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인구 중 3분의 1이 사망했고, 어떤 때에는 매일 5000명이 죽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 기독교인들의 생존율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높았다. 그 이유는 바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했고, 특별히 병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노력했던 데 있었다. (사진3: 안토니우스 역병)

세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결혼과 가정생활을 성결하게 지켜나갔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제국의 성적 도덕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특별히 대도시와 식자층에서 더 심했는데 동성애, 낙태, 매춘, 결혼과 가정생활에 있어서 성적 타락이 극에 달했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여자아이가 출생하면 바로 죽이는 일이 빈번했던 점이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사회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녀의 성비를 보면 수많은 전쟁에서 많은 남성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100에 남성 131∼140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적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는 견고한 결혼과 가정생활을 이루도록 서로를 도왔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높은 출생률을 유지했으며, 혼인과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이 많았다. (사진 4-영아의 무덤)

네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이 인종차별과 신분차별을 강력히 거부했다는 점이다. 로마제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으로 세계화되어 가고 있었다. 역병과 함께 결혼과 가정의 타락은 인구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 로마는 주변국가의 사람들이 자국의 주요 도시로 이주해 오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다수의 인종, 국가, 언어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의 대도시에 섞여 살게 됐다. 때문에 문화적, 인종적 갈등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 모든 사회에서 신분의 구별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로마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저항했다. 물론 저항의 대가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들 앞에 놓였던 것이다. (사진5-콜로세움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순교)

다섯 번째 요소는 기독교인들이 성실히 일했으며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신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11∼12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박해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황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없이 제국을 통치할 수 없고, 기독교인들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진6-콘스탄틴의 세례)

초대 기독교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제국의 법을 어기는 범법자 취급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근사한 교회 건물도, 변변한 성경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지도자들도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구도자 예배나 교회학교, 찬양팀, 신학교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은 지켜지고 교회는 성장했다. 온갖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굳게 지키면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와 목회를 위해 오늘날 시도되는 새로운 노력들이 전부 무익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한 본질과 핵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래교회는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을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즉 ‘과거(본질)를 향해 미래를 개척(혁신)하는’ 교회가 바로 미래교회의 모습이 돼야 할 것이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서 연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425910&code=2311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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