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ople who know their God will display strength and take action"(Dan 11:32b)
2013년 1월 5일 토요일
[미래교회 트렌드 읽기] (8) 거리의 힙합, 교회로 들어오다
힙합교회, 젊은이들의 문화로 복음 선포하다
2011년 11월 하워드대학 신학부는 ‘종교와 문화: 교회, 힙합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발표자들은 전통적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오기 위해 그들의 문화인 힙합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말이다.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크로스오버 커뮤니티 교회는 힙합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타미 킬로넨 목사는 ‘중생’이라고 적힌 반짝이는 티셔츠를 입고 무대 위를 껑충껑충 뛰면서 ‘예수님은 어떻게 구르셨나’라는 제목의 설교를 랩으로 한다. 크로스오버 교회는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21세기 목회를 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바울이 아덴에서 거리의 언어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복음을 선포한다고 한다.
힙합교회인 ‘The House’의 홈페이지(www.thahouse.org)에 들어가 보라. 그들의 사명선언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힙합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제적이고, 관계적이며, 상관성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동영상의 첫 화면에 등장하는 청년은 “왜 힙합입니까”라는 질문에 “왜 안 돼요?”라고 말한다.
헐렁한 티셔츠, 앞뒤를 바꿔 입은 청바지, 목에 건 굵은 목걸이, 비스듬히 쓴 모자. 이런 차림새의 청소년과 청년을 교회에서 보는 것은 흔치 않다. 아마도 전통적 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모습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교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힙합교회: 문화를 만드는 운동과의 연결’의 저자 이프렘 스미스는 “힙합은 깨어진 세상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이다. 이제 랩과 함께 성장한 세대에게 희망을 전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힙합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교회가 힙합 문화를 거부한다면 이 세대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스미스가 말하는 ‘힙합 신학’이란 무엇인가. 힙합은 미국 흑인과 라틴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문화다. 힙합 신학은 바로 이들을 위한 해방과 화해의 신학이다. 스미스는 힙합 신학은 곧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면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적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했다. 그는 힙합 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사도행전 17장에서 찾는다. 문화를 정죄하는 대신 힙합의 요소인 디제이, 브레이크 댄서, 그래피티 아티스트, MC(래퍼)와 긍정적 원칙들, 평화, 연합, 사랑, 공동체, 즐거움을 가지고 복음을 전달한다. 힙합 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도록 부르셨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스미스는 ‘거룩한 힙합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매달 세 번째 주일을 ‘힙합 주일’로 정하고 힙합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예배를 드린다. ‘거룩한 힙합 예술가(holy hip-hop artist)’로 불리는 이들이 랩과 댄스로 찬양하고 예배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래피티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린다. 성도들은 편안한 복장으로 교회에 와 예배 속에서 하나가 된다.
물론 이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힙합 음악 속에 들어 있는 자극적이고 불경스러운 표현들은 전통적 크리스천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지만 힙합교회가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힙합교회는 음악이나 그림이 초점이 아니라, 잃어버린 세대가 주된 목표이고 목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배를 넘어 전도와 제자화, 선교에도 힙합의 문화가 접목돼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의 제자들: 힙합교회의 약속’의 저자 에릭 구티에레즈는 힙합의 잠재력은 단순한 도구 이상이라고 한다. 그에게 힙합은 강력한 전도방법이다. 크리스천 힙합은 사도바울의 사역과 비교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와 환경에 따라 말씀의 전달방법을 적절히 선택한 바울은 곧 초대교회의 힙합이었다고 한다. 힙합을 예배와 목회의 방법으로 여기는 것은 60년대 교회가 기타를 받아들이고, 80년대 교회가 록 음악을 수용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힙합은 단순히 음악적 장르라기보다는 정체성이며 문화다. 바로 이 점이 힙합을 전도의 강력한 수단으로 만드는 요소다. 구티에레즈는 크리스천 힙합이 교회를 참되게 하는 운동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힙합 운동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가스펠음악협회가 수여하는 도브상(Dove Awards)과 스텔라상(Stella Awards)에는 힙합/랩 부문이 포함돼 있다. 밴더빌트 신학대학교의 교수들은 힙합 음악과 저항 음악을 연구하고 있다. 노던 신학교에서는 ‘힙합교회’ 과목을 개설했다.
그러나 힙합교회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힙합 음악이 가지는 ‘자기 숭배(self-worship)’의 요소다. 크리스천 랩이 일반 랩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편과 예레미야애가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힙합 음악은 자신을 절대시하는 ‘자기 숭배’의 형태를 지닌다. 그래서 힙합이 타락한 음악의 형태라는 비난을 받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천 랩 아티스트 샤이 리네(Shai Linne)는 타락한 음악의 형태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만일 음악의 형태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책임이다.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한다면 그들의 음악 형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힙합 음악은 게토 청소년들의 리듬이자 시다. 이제 교회가 소외된 이들의 문화인 힙합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힙합의 외형만 수용해서는 안 된다. 음악의 형태에만 몰두해 복음의 메시지가 희석된다면 두렵고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힙합 음악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예배의 음악’이 돼야 한다. 교회는 힙합이 음악 그 이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힙합은 그 음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이다.
힙합 음악의 형태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중심이 아닌 경계와 주변의 문화를 교회가 수용하는 과정은 언제나 순탄치 않다. 그리고 모든 소수의 문화가 기독교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흑인사회 내에서는 힙합 세대의 출현으로 흑인인권운동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힙합 문화가 공동체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이고, 긍정과 소망의 메시지보다는 부정과 절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힙합은 흑인들과 같은 소수자들의 문화로 돼 있다. 어느 사회든지 탈전통적이고 탈규범적인 문화가 새로운 세대의 주목을 끈다. 때문에 미래교회는 이런 소수의 경계적·주변적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세상과 구별돼야 한다는 ‘분리주의’적 접근이나, 세상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동화주의’적 접근 모두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경계적· 주변적 문화의 부상과 약진은 미래사회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아마도 힙합교회를 넘어서 제3, 제4의 소수자 문화의 교회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영적 진정성과 진실성은 또다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분리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화주의자’가 될 것인가.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같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된 글임을 밟힙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6&sCode=0003&arcid=0006576600&code=2311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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