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사귐의 교회 담임목사)
예 수가정 이야기는 영국인 의료 선교사였던 보언 리즈(D. Vaughan Lees)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중국의 예수가정’ 도서출판 무실: 1992). 예수가정은 1950년대 초 공산당의 심한 박해를 받고 해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예수가정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에도 예수가정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는 어렵사리 예수가정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의 예수가정 본부는 원래 위치해 있던 마쭈앙에서 이주하여 산동성 내의 한 시골지역에서 계속 사역을 펼치고 있다. 예수가정이 해체된 후 그들은 개인적으로 생활하면서 은밀한 모임을 계속 해갔다. 해체 후 비록 그 외형적인 모습은 바뀌었으나 일단의 예수가정 멤버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 그 사역이 계속 활발히 유지되고 있다.
애덕의원 사역 공동체로 이어지다
현 재의 예수가정 사역은 짜우 삥창(趙炳昌)이라고 하는 의사를 통해 그 맥이 이어졌다. 의사였던 그는 예수를 믿고 난 후 예수가정에 합류하였다. 그는 병원을 설립하여 예수가정을 살리고자 하였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자녀들은 모두 의사가 되어 예수가정을 보존, 계승,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현재 그 후손들은 ‘기독교 애덕의원’(基督敎 愛德醫院)이라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병원 설립자의 아들인 짜우 야부어(趙亞伯) 원장은 현재 중국의 예수가정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이다. 그의 식구들은 모두 의사 가족이다. 자신은 의사이자병원 원장이고 부인은 치과의사이다. 원장 동생은 안과의사이다. 여동생도 함께 병원에서 사역하는데 그녀는 내과의사이며 그 남편은 안과의사이다. 짜우 원장의 장남도 치과의사이며 원장의 여동생과 차남은 의대 재학중이다. 이렇게 해서 짜우 목사 가족은 모두 의사 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 병원은 안과와 치과로 유명한데, 안과는 현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애 덕의원 입구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구사부상 영신익인”(救死扶傷 榮神益人)” 즉 “죽은 자를 구해 내고 상한 자는 일으켜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람을 이롭게 한다.” 이것은 병원이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병원은 환자에게 치료하기 전에 의사들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는데, 치료받기보다는 기도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자 오는 환자가 더 많다고 한다. 실제로 병 고침의 역사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으로 더 많은 환자가 병원에 몰리고 있다. 가난한 시골지역인지라 보통 때는 치료비의 절반 값을 받다가 돈이 없는 환자의 경우에는 아주 무료로 치료해 준다. 이럴 경우, 의사들은 자신의 월급(약 500웬 수준)으로 치료비와 약값을 충당하게 되어 보통 200웬 대의 노동자 수준으로 살고 있다.
이 병원에는 8명의 전문의 외에도 수련의들이 25명이나 일하고 있다. 예수가정 사역에 감동 받은 젊은 인재들이 형편없는 시골 병원에 와서 동역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를 안내했던 정부 관리들도 열악한 시설에도 귀한 일 하는 병원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의료기계에 도움 주실 분은 전화 2611-8177로 문의). 병원은 현 전체에서 환자가 많이 몰리는 데 비해 의료시설이 매우 부족하다. 특히 필요한 것은 안과 현미경과 위 내시경이다. 그 동안 공산주의 통치 아래서 받은 압박으로 인구의 80퍼센트가 위장병 환자라고 한다.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위 내시경(內視鏡) 기계가 매우 필요한 실정이지만 현재로서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다.
이 러한 헌신적인 진료로 애덕의원은 공산당 간부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병원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병원에 십자가를 달 수 없지만 유일하게 십자가를 단 기독교 병원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짜우 원장은 이 병원사역의 목적은 치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며, 예수가정 사역을 보존해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했다. 현재 예수가정은 공산당이 공동생활 형태를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공동체로 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짜우 원장은 가족 전체가 의사 공동체를 이루어 병원을 통해 예수가정 공동체를 유지하며 복음전파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짜우 원장은 예수가정을 이끌기 위해 의사로서 일해 왔는데 교회가 커지면서 공식적인 지위에서 보다 원활한 사역을 위해 산동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95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의사들로 구성된 대가족 공동체
필 자가 예수가정 본부격인 짜우 원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경이었다. 애덕의원 원장 겸 예수가정교회 목사인 그의 집은 매우 초라했다. 하루종일 여행한 터라 저녁식사로 나온 산동성 만두와 나물국을 맛있게 먹었다. 현재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고 있느냐는 질문에, 어느 집사님은 “만두는 목사님 댁에서 나온 것이고 나물국은 우리 집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30~50년대의 공동생활 형태로 살지는 못하지만 이 마을에 함께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짜우 원장은 어머니와 동생들 자녀들로 구성된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그 어머니는 초대 예수가정의 회원이었다. 짜우 원장은 그의 동생과 제수, 여동생과 매제,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 3대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현대 중국에서 이렇게 3대로 대가족 공동체를 이룬 의사 가족은 짜우 원장 가족밖에 없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도무지 의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검소하고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실력 있는 의사 집안 사람들이 누추한 곳에서 불편하게 사는 이유는, 비록 한 가족 공동체에 지나지 않지만, 심한 박해로 해체되어 버렸던 초대 예수가정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데 있었다.
신앙과 삶이 예수 마을로 전염되다
현 재 예수가정 본부는 애덕의원이 있는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100여 호가 사는 작은 농촌마을이며, 그중 80여 호가 예수가정교회 교인들이다. 이 마을 중심부 낮은 언덕 위에 2년 전 신축한 예수가정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배당 신축 이전에는 짜우 원장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예배당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빛 찬란한 현관 입구가 있는 훌륭한 대예배당(약 500명 수용)이 있었고 거기에 400여 명이나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다른 마을에서도 교인들이 오기 때문이다.
대개 중국 사람의 대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같은 복을 비는 문구을 붙이는데, 이 동네의 교인들 집에는 ‘팔복전임문’(八福專臨門, 팔복이 전적으로 우리 집 문에 임한다). ‘영신익인’(榮神益人,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 ‘주애무한’(主愛無限,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시다) ‘찬미음시천신수(贊美吟詩遷新壽, 시와 찬미를 드리면 더욱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와 같은 문구들이 대문에 줄줄이 붙어 있다. 동네 전체가 예수가정의 영향력 아래 있는 예수 마을이었다. 교인들의 이름에도 신은(神恩, 하나님의 은혜), 복음(福音) 같은 믿음의 이름을 지어 부른다.<br>지난 ’85년 애덕의원을 통한 예수가정 사역이 재개된 후 예수가정의 영향력은 계속 퍼져나가 현재 중국 북부에 42개의 지부 예수가정 교회가 있다. 매년 1월에는 한 달 동안 성경학습반을 운영하여 100여 명 지도자를 공동생활 가운데 집중 훈련시키고 있다. 이미 1만여 명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훈련을 받았고 신청자가 넘친다고 한다. 이 현에는 기독교인들이 1만여 명이 되는데 현재 예수가정의 지도자인 짜우 원장이 총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가정교회 지도자는 “예수가정은 현의 일반인들에게도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수가정은 현 전체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예전처럼 공동체로 함께 모여 살지는 못하지만 애덕의원을 통한 헌신적인 치료사역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고결한 신앙은 박해 이후에도 병원사역과 교회사역을 통해 면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예수께 밀착된 영성과 헌신이 있다
주 일 예배는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여 3시간 동안 진행된다. 예배당 전면에 ‘기독예수 강세위요 극구죄인’(基督耶蘇 降世爲要 極救罪人,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구하셨다)이라는 큰 글씨와 ‘임마누엘’(以馬內利)이란 글씨도 보였다. 교인들은 시골인데도 남녀 각각 200여 명씩 동등한 비율로 참석하였다. 10여 분씩 되는 긴 찬송을 거의 암송하여 부르는 데 놀랐다. 비록 느릿느릿 진행되는 전통적 중국식 토착 찬양이었으나 진실된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이 가득한 예배였다. 이들은 3시간 이상 진지하게 예배를 드린다.
예수가정교회는 매일 새벽기도회(오전 4:30~6:00)를 드린다. 새벽기도회는 이 마을에 있는 교인들 약 50여 명이 참석하는데 남자 청년, 처녀, 중년, 노인 등 골고루 참석한다. 한 시간 정도 이들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다. 이들의 찬송은 장중하며 비장한 게 특징인데,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가겠다는 결사적인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의 기도는 단순히 능력을 구하거나 무엇을 달라는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깊은 흐느낌과 감격이 계속 터져 나오는 간절한 기도였다.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영성의 기도였다.
새 벽기도회를 마칠 때에는 모두 일어서서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이 때 부르는 찬송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왕 노릇하리라’는 내용이 실린, 비장한 신앙각오가 엿보이는 장중한 찬송이었다. 오랫동안 박해를 받으면서 지켜 온 신앙인지라 주님과 밀착된 삶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고난은 우리를 더욱 주께로 가까이 이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을 체험한 감격과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는 비장한 찬송, 생명력이 넘치는 심령의 기도는, 마치 초대교회의 예배 가운데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예수가정은 매일 저녁에도(7:30~8:30) 기도회를 가진다. 그만큼 예수가정 사람들은 매일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이들은 예수께 가까운 사람들이다.
예수가정은 진정 ‘예수님이 가장(家長)인 공동체’이다. 1920년대 시작된 이후 1950년까지 공산당 치하에서 참혹한 박해를 받았지만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조용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헌신된 삶에서 오는 것이다. 초창기에 공동체를 통한 복음의 철저한 실천이 오늘날까지 그 후예들이 본받고 따를 수 있도록 깊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예수가정 공동체 사람들은 모두 눈동자가 맑은 사람들이었다. 핍박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찌든 사람들 같지 않게 해맑은 표정과 건강한 모습이었다. 천상(天上)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누가 이들을 보고 공산당 치하에서 지독한 핍박과 수모를 거친 사람들이라고 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헌신된 몸 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임재로부터 온 것이다.
1920년대에 예수가정이 시작될 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는 말씀은 예수가정의 정신을 나타내 주는 중심 말씀이었다. 예수가정은 이러한 말씀을 붙잡고 지금까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살아왔다고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에 대해 죽고, 고난을 달게 받으라”는 예수가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한다. 이 정신 있기에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들도 예수가정의 낮은 자리에서 계속 헌신하고 있다.
토착화 선교와 공동체 선교의 성공적인 모델
예 수가정 공동체는 중국 전체에 가정교회가 확산되도록 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공산화 이전에 일어났던 많은 기독교 단체들과 운동들이 사라졌지만 예수가정 공동체는 아직도 건재하며 계속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주를 위해 고난을 달게 받기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지체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은 지대합니다.” 중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독교 운동과는 달리 예수가정 운동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틀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예수가정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30여 가정이 한 단위가 되어, 집의 구조나 생활형태는 바꾸지 않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그들의 신실한 삶을 통해 증거사역을 해나간다.
예수가정은 소위 ‘공동체 선교’(community mission)의 귀중한 모델이다. 60여 년 전 1940년대에 예수가정은 신장 위구르, 서장, 몽골, 심양 등 변방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 하였는데, 각 팀은 6~7가정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선교하였다. 이 팀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뿌리를 내려 평생 헌신하면서 교회를 세워 훌륭하게 사역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선교가 개인 단위의 선교사를 파송 하여 복음을 전하는 원심력적 선교 차원에만 치중하는 경향이다. 21세기 선교는 선교사가 공동체 삶의 훈련을 받고 작은 소그룹 단위의 공동체로 파송 되어 현지에서 신실한 공동체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적 선교’(centripetal mission)가 되어야 한다. 예수가정은 동양에서도 이러한 구심력적 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소중한 모델이다.
예수가정은 중국에서 생겨난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초교파 공동체이다. 중국 공산화 당시 중국 교회들은 외국 선교회와 절교하는 일이 많았지만, 예수가정의 경우 외국 선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 인종을 초월하여 외국 선교사들을 돕고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실천해 나갔다. 예수가정은 성경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생활양식이 순수 중국식임을 자부했으며, 그것이 중국적 기독교라고 여겼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강화하는 사역에 강조점을 두었다.
쪼 목사라는 분은 장로교 목사로서 예수가정 회원이 되었다.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왔던 딜렌벡(Miss. N. Dillenbeck) 선교사는 1936년 예수가정의 삶에 감동을 받고 예수가정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파송교회와 교인들에게 예수가정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 공동체라고 알렸다. 그녀의 무덤은 아직도 예수가정의 이전 본부 마쭈앙에 있다.
필 자와 함께 예수가정을 방문했던 한국의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R. A. Torrey III) 신부는 “중국의 예수가정은 예수원의 중요한 모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와 함께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공동체가 예수가정 공동체였다고 하였다. 중국의 예수가정 본부는 대천덕 신부의 고향 성 지난(濟南)에서 약 3시간 거리에 있다. 대 신부는 중국 선교사의 아들로 그곳에서 태어나 생활하였고 한국에 최초로 예수가정을 책으로 소개하였으나, 한번도 예수가정에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10월, 80세가 넘은 나이로 금세기 마지막에 필자의 안내로 아내 제인(Jane Torrey)과 예수가정을 방문한 대 신부는, “내 평생 가장 감격스러운 공동체 방문이었다”고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가정은 기독교 토착화와 공동체 삶에 대한 실제적인 모형을 제공해 줍니다. 예수가정은 오늘날 존재하는 공동체 중 가장 성공한 기독교 공동체일 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 토착화 운동의 가장 훌륭한 모형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중 국 기독교인들은 ‘만약 기독교가 땅 끝까지 전파된다면 그 일은 중국 땅에서 재출발하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또한 모슬렘 선교는 중국을 통하여 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중국이 거대한 인구와 온갖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 치하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국내외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예수가정은, 중국에 선교하고자 하는 선교사들과 단체들이 연구해야 할 좋은 대상이다. 공산당 박해 속에서도 성령충만한 삶, 많은 병자들을 고친 기적,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생활, 중국 전역을 누빈 활발한 전도,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봉사, 성령 안에서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기독교회의 설립. 이 모든 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증거가 아닌가?
이들은 성경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그대로 실천한다. 그리고 그 역사가 나타난다. 최근 중국 선교사 한 분은 “선교지에서 예수가정 운동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어 있음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칭따오(靑島)에서도 1940년대에 예수가정 본부에서 살았던 가족들이 아직도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1940년대 당시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던 127개의 예수가정 지부 공동체들은 1949년 공산당 집권 후 핍박을 받으면서 점차 흩어졌고, 1966년에서 1976년 사이 일어났던 문화혁명시 거의 폐쇄되었다. 그러나 1976년 이후에도 소수의 헌신된 예수가정 회원들은 모임을 계속해 나갔으며 전성기 때에 127개에 달했던 지부 공동체들은 현재 약 2배로 불어나 중국전역에서 활발히 사역하고 있다. 작지만 큰 파장을 일으킨 예수가정 공동체의 여진(餘震)은 아직도 중국 전역 조용히 흔들고 있다.
참된 생활공동체에서 선교와 헌신이 태동된다
예 수가정의 초기 지도자였던 찡 띠엔잉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은 죽음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 안에 갈보리의 거룩한 뜻이 나타나게 하소서. 내가 택할 것은 능력이 아니라 더 심오한 죽음입니다. 갈보리의 능력이 내 속에서 역사하기를 더욱 바랄 뿐입니다.”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죽고자 하는 순종과 헌신의 영성. 이것이 예수가정의 영성이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비결이었다.
필자가 떠날 때 짜우 원장은 자신의 집에서 자장면을 대접해 주었다. 샨뚱썽(山東省)은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자장면의 원조이다. 덕분에 원조 자장면을 맛보면서 의사들의 대가족 공동체와 함께 원초적인 복음을 맛보는 감동적 교제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초대 예수가정 공동체 생활의 전형이었다. 짜우 원장은 “앞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면 원래의 공동체 형태를 복원할 것입니다”라고 다짐하였다. 예수가정 공동체와 같은 운동과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중국 전역과 한국교회에도 더욱 불일듯 일어나도록 기도하자!
새벽기도회를 마칠 때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는 찬송을 불렀다. 오랜 박해 동안 지켜온 신앙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죽고자 하는 순종과 헌신의 영성. 이것이 예수가정의 영성이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비결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