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중국의 예수 가정 (1)

김현진(사귐의 교회 담임목사)

예 수가정은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도 복음을 중국 전역에 널리 전했던 기독교 공동체이다. 예수가정을 알려면 1950년 이전 공산당 치하에서 일어났던 예수가정의 놀라운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 중국의 예수가정(耶蘇家廷, Jesus Family)은 1921년 중국 샨뚱썽(山東省) 타이안 셴(泰安縣) 마쭈앙(馬莊)이란 시골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한 가정의 변화로 시작된 공동체 교회

초 창기 지도자였던 찡 띠엔잉(敬奠瀛, 1890~1949) 형제는 전통적 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감리교 계통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 진심으로 회심한 후 그 증거로 사랑하지 않아 이혼했던 아내를 다시 데려와 살았으며, 이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들 부부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주님께 바쳤던 대지 위에 예배당과 농장을 세웠는데 이 교회가 예수가정 운동의 중심부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었다. 찡 띠엔잉과 함께 쩌우 씬민(周新民) 형제, 뚱(董) 행신 형제, 천 삐시(陳碧璽) 자매, 짜우(趙) 헬렌 자매 등 1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예수가정 공동체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쫏으라”(마 19:21),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5)”라는 말씀에 기초를 두었다.

뚱 행신 형제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형제로서 한때 군악대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카이펙에 있는 침례교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던 중 찡(敬) 형제를 만나 예수가정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중국복음화 일생을 바쳤다. 그는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난 뒤 삶이 변화되었으며 예수가정의 고유한 찬송가를 약 천여 곡이나 작곡하여 예수가정을 천국의 찬양이 넘치는 공동체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두 명의 여성 지도자를 보내주시다

예 수가정에는 천 삐시, 짜우 헬렌이라는 두 명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둘 다 북경조산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천 삐시 자매는 산부인과 박사였고 짜우 헬렌 자매는 그 학교의 강사였다. 그녀는 부유한 한코우 가문 출신으로 2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어로 수업하는 홍콩 의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산부인과 대학원으로 유학하려 했으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수가정을 통한 복음전파에 헌신했다. 그녀의 의학 경력은 짜우 헬렌 자매와 중국 각지에서 행했던 여성복음화의 기반이 되었다.

만주제국의 관료집안 출신의 짜우 헬렌 자매는 북경의 장로교 계통의 여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북경의 작은 선교회 모임에 천 삐시 자매와 참가하던 가운데 모두 회심의 경험을 하였으며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 러한 성령체험으로 인해 조산학교에 부흥의 불길이 번져 나갔으며 나아가 중국의 젊은 여성들은 몽골에서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두 자매가 예수가정의 지도자 찡 형제와 뚱 형제를 만난 것은 몽고에서였다. 그때 찡 형제 일행은 복음전파를 위해 서북부지방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이들을 만난 후 젊은 자매들은 둘로 나뉘어 반은 찡 형제와 함께 여행하였고, 반은 남아서 내몽고에서 사역을 계속하였다. 천 삐시 자매는 그녀의 의술로 예수가정 식구들을 돌보았으며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많은 경건서적과 찬송가들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짜우 헬렌 자매는 그녀의 경영 능력과 열정으로 예수가정 모든 부문에 영향을 끼쳤다.

유무상통을 실현화 한 공동체 마을

예 수가정의 찡 형제는 증조부의 땅 3,600여 평을 예수가정 공동체의 부지로 내놓았다. 그 땅이 대를 이어 오면서 56,000평으로 늘어나 거기서 예수가정 가족들 500여 명이 공동체로 살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위 마을에 살면서 예수가정 교회에 다니는 일반 교인들도 500여 명이 있었다. 마쭈앙은 숲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깊은 시골 마을인데 거기에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약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은 공동 식당 및 공동 작업실로도 쓰였다.

찡 띠엔잉 형제의 헌신된 삶과 그의 전도를 통하여 뚱 행신, 쩌우 씬민, 천 삐시, 짜우 헬렌 자매 등은 마쭈앙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 후 이들의 신실한 삶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이 마쭈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예수가정은 약 5만평의 대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삶을 실천하고자 모든 재산을 공동 소유하여 한 가족으로 살았다. 예수님을 가장(家長)으로 하여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예수 새가족으로 함께 사는 것이 예수가정의 목적이었다.

농업은 그들의 모든 생활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근면성으로 식량과 경제문제를 자급자족하였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또한 노동을 하나님이 맡기신 신성한 위탁으로 여겨 모든 공동체 식구들이 각종 노동에 참여했다. 예수가정의 노동은 논농사, 밭농사와 함께 가축부, 목공부, 제화부, 제과부, 대장간, 기계공작부, 전기류, 석공부, 유치부, 학교, 섭외부, 재정부, 인쇄부 및 제본소 등의 작업 분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노동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다. “기도는 노동이요, 노동은 기도다”라는 6세기 성 베네딕트의 말이 그대로 실천되는 곳이었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공동체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가정의 예배당(천여 명 수용도 가능)은 모든 일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일과는 새벽 4시의 새벽기도회로 시작되었다. 새벽기도회는 통성기도로 시작된다. 한 시간 정도의 간절한 기도 후에 설교와 간증이 이어진다. 이러한 새벽기도회의 전통은 현재 예수가정 교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오전 9시부터는 각 부서별로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예배당은 하루종일 새끼 꼬고 옷감을 짜는 등 다양한 일거리의 작업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일과 후에는 예배당에서 오락회가 이어지기도 하였다.<br>예수가정의 일상생활과 작업은 찬송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은 일하면서 늘 찬양을 하였다. 이러한 찬양은 작업을 매우 유쾌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작업 자체가 예배의 시간이 되게 해주었다. 예수가정에서는 방대한 찬양과 기도가 계속 흘러 넘쳐 나왔으며, 대개는 자신들이 직접 작곡한 매우 아름다운 곡들이 실린 자체 찬송가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도 현재의 예수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 당시 만들었던 찬송가책(600여 곡 수록)을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음악은 천상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찬송이 흘러 나지요. 그런데 어떻게 찬송을 안할 수 있겠습니까?”

식사시간은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식사시간은 교제의 시간이며 타지의 예수가정에서 소식과 그들의 겪고 있는 시련과 핍박에 대해 듣는 자리였다. 식사시간은 또한 지역발전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식사 후 저녁시간은 때때로 간증의 밤으로 열렸다. 성령의 인도로 여러 명이 계속 이어지면 어떤 경우에는 밤 2시에 끝나기도 했다. 예수가정 교인들은 주일을 예배와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날로 보냈다.

자녀양육은 성경에 충실한 가정교육으로

이 공동체의 어린이들은 공산당에게 간증 그 자체였다. 가장 포악한 공산당원이라도 아이들의 생활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마음이 풀어졌다고 한다. 공산당원은 예수가정의 아이들 옷은 늘 깨끗하고 예쁜 데 놀랐다고 한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옷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예수가정에 처음 방문하는 공산당원들은 어린이들을 보고자 요청했는데, 그들은 옛 가정의 주거시설, 지능, 부모들의 지혜, 식탁 위에 놓인 음식, 예의범절, 식기도, 아이들의 예쁜 옷 등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 그들을 위한 장난감과 게임, 오락은 거의 없었으나, 오히려 아이들은 마당을 청소하거나 옥수수 껍질을 벗긴다든지 양모에 빗질을 하는 등 소소한 노동을 하면서 놀았다. 아이들에겐 일이 곧 놀이였고 오락이었다. 아이들은 전혀 구김살 없이 밝았으며 규율이 잡혀있었다. 또한 예수가정의 아이들은 늘 찬양을 흥얼거렸고 흥이 넘치면 타작마당에서 즉흥적인 춤을 추기도 하면서 기쁨에 넘쳐 있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교육의 첫번째 가는 목표였다.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어 보면 “예수님이 머무실 가정을 이루어서 그 가정의 가장(家長)이 될래요” “복음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을 전파할 거예요” 등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렇듯 예수가정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사는 곳이었다.

영적인 공동 지도력을 세워가는 곳

공 산화 이전의 예수가정에는 다섯 명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찡 띠엔잉, 퉁 행신, 쩌우 씬민, 천 삐시, 쵸 헬렌 등이었다. 예수가정의 가장(家長)은 찡 띠엔잉이었으나 제반사는 공동 지도력으로 운영되었다. 예수가정에서 즐겨 부르는 한 찬송가는 예수가정의 지도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랑은 예수가정을 다스리는 원리, 사랑은 천상의 개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한 가족, 성령 안에서 한 형제 되었네, 지도력은 미약하나 그리스도 몸의 생명력은 강대하다네….”

회원은 농민, 교육자, 의사, 기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다. 대학 졸업자도 많았다. 유명한 한 변호사는 예수가정의 회원이 되어 거름통을 들고 일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큰 문제가 생기면 여러 날을 금식하면서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곤 했다. 예수가정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지녔던 능력을 동일하게 소유하기 위하여 기꺼이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였다. 매주 금요일 저녁은 지도자 모임으로 열렸는데 늘 회개와 자백의 영이 역사하였다. 지도자들은 서로 자신의 과실을 고백하였다. 피차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자백하는 것이었다. 

지역마을과 공산당도 감동한 공동체

예 수가정 공동체는 인근 지역마을 주민을 향상시키는 빛과 소금이었으며 강력하게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단체였다. 예수가정은 인근 주민들을 섬기는 다양한 복지사업과 의료사업 및 소비조합을 운영하였다. 예수가정의 훌륭한 삶을 배우고자 먼 지방에서 예수가정을 방문한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가정은 이들에게 조산학, 공중보건, 건축술, 양봉, 원예, 설탕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마을에 야학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소매상 협회를 조직하여 일반 대중과의 매매관계를 원활하게 해주었다.

가 난한 사람들을 위한 식당을 운영하였다. 공산당 치하에서도 부패가 만연되었지만, 예수가정의 정착지 주변에는 언제나 도로시설의 확충 및 교량보수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축산, 영농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농축산 생산이 향상되었으며 향학열과 기업정신도 왕성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예수가정의 성실한 대민 봉사로 인해 공산당 당국자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례였다. 공산당 간부들도 이곳에 배우러 찾아왔다.

1940년대 쟝 제스(將介石)의 국민 정부군과 마오 쩌뚱(毛澤東)의 공산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한 국부군 병사가 예수가정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루 재워 달라고 애원해서 예수가정에서 재워 준 것이 드러나 그 가정의 가장은 사형을 받게 되었고, 요식적인 재판 절차를 위해 판사가 왔다.

재 판 한 시간 전에 국부군을 재워 주었던 가장 집에 주인 모르는 닭이 들어와서 알을 낳았다. 그 가장은 닭을 붙잡아 다리에 계란 값을 지불한다는 메모와 함께 돈을 넣어 다리에 싸매어 밭에 놓아 보냈다. 한 시간 후 닭 주인과 판사가 찾아왔다. 그 가장이 계란 값을 지불한 것을 알게 된 그 판사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정직할 수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가장은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증거하였다. 그 판사는 “나는 이전에 이렇게 정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다음날 사형재판을 취소해 버렸다고 한다. 예수가정은 공산당에게도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예수가정은 정직과 진실이 생명이었으며 그것이 통하는 사회였다. 산상수훈이 그대로 지켜지는 공동체였다.

예수가정은 의료사업으로 유명하였다. 천 삐시, 쪼 헬렌 같은 여의사들의 헌신으로 예수가정의 의료사업은 인근지역에서 유명하였다. 예수가정의 전문적인 의료사역과 성령의 능력은 수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었다. 1949년 여름에 마쭈앙 전역에 유행성 홍역이 창궐하여 사망률이 80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나 예수가정의 유아 사망률은 단지 3퍼센트였다. 3퍼센트의 낮은 사망률은 공산당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 일에 감명 받아 공산당원 수백 명이 몰려와 수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예수가정의 간호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만일 아이들이 주 예수님을 그들 마음에 모신다면 그렇게 됩니다.”

찡 형제는 “예수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강압과 압제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이보다 더 월등한 예수가정의 사랑을 통해 실천되었다. 예수가정은 공산당에게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광활한 중국 땅을 헤집는 전도여행

예 수가정의 중요사역은 전도였다. 예수가정 운동의 태동기는 1920년대였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930년대 초, 찡 형제와 그의 동료들은 중국 북부 전역에 걸쳐 전도여행 사역을 펼쳐 나갔다. 예수가정 전도대들은 주로 농촌에서 전도하였으며 3~4명이 한 팀을 이루어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삶의 변화를 주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예수가정 공동체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여행을 떠날 때는 언제나 돈이나 의류 등을 일체 소유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막 6:8)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전도하였다. 마치 중세기의 성 프란치스코 전도대와 같았다. 전도여행은 산서(山西), 협서(陜西), 하북(河北), 하남(河南) 지방을 포함하여, 북으로는 동북(東北) 지방, 남으로는 양자강에 이르는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도사역을 하였다. <br>1949년 봄에 중국 선교사였던 로믹(T. F. Romig) 목사는 남경의 남쪽 어느 시골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 마을은 수십 년 동안 한번도 기독교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사는 여덟 가정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들 가정으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는 바로 예수가정 전도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고 매우 놀랐다고 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1시간 정도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예수가정 식구들은 로믹 선교사를 외국인 선교사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영접해 주었다고 보고하였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현재의 OMF)는 예수가정의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준 모체였다. 1950년 당시 예수가정의 수는 전국에 약 123개의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고 회원 수는 약 15,000명 정도로 발전하였다. 예수가정은 중국 서쪽 변방인 신강 위루르 지역, 서장 지역, 그리고 북쪽으로는 몽골과 센양 쪽에 5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복음을 모르는 중국 땅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1949년 중국 공산화 직후, 중화 인민공화국 정부는 중국 전역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예수가정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일차적으로 예수가정 해체 작업에 손을 대었다. 먼저 지도자인 찡 띠엔잉 형제를 구속하여 가장 악랄한 죄목을 만들었다. 인민의 노동력 착취, 토지 수탈 등 여러 죄목이었다. 그래도 예수가정이 와해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부책임자 뚱 행신 형제를 고문하여 그의 사상을 개조시키려 했는데 그 와중에 뚱 형제도 죽었다. 그 후 예수가정 본부 마쭈앙은 폐쇄되고 예수가정은 박해를 받아 강제로 해체되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예수가정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교육의 첫 번째 목표로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예수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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