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일 월요일

필요를 채우는 전도

교 회의 건강과 성장의 열쇠는 불신자의 당면문제와 필요를 충족시키며 그들이 복음을 듣도록 돕는 전도에 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병든 공동체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인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새신자가 유입되지 않으면 썩게 되어 있다. 문제는 전도 분야만큼 구태의연한 생각과 교리, 신화적인 개념으로 가득차 있는 것도 없다는 데 있다. 전도프로그램 하나만으로 교회가 건강할 수 없다. 균형잡힌 건강한 전도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때 교회가 건강해지며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전도란 무엇인가?
영 국 성공회의 대주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은 다음과 같이 전도를 정의했다. "전도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아가 그분의 몸된 교회와의 교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다."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복음전도를 "이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을 얻어먹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스펄전의 비유는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빵이 필요한 거지와 같다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이미 빵을 얻었고 그 빵을 제공하는곳이 어디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는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윌 로우크릭의 빌 하이벨(Bill Hybels)과 마크 미텔버그(MarkMittelberg)는 성공적인 복음전도를 위한 공식을 HP + CP + CC = Ml라고 소개한다. HP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변화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이 지닌 최고의 잠재력(High Potency)을 의미한다. CP는 전도 대상자와의 친밀도(Close Proximity), CC는 복음의 확실한 전달(Clear Communication)의 약자이다.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고. 전도 대상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확실하게 복음제시를 할 때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마음 속에 최대의 영향력 (Maximum Impact)을 끼치신다는 것이다.
누 가복음 15장에서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목자와 잃은 양, 여인과 잃어버린 동전, 아버지와 잃었던 아들. 이 세 비유의 핵심은 하나다. 하나님은 잃은 것을 찾으시는 분이시라는것이다. 잃은 것을 찾을 때 가장 행복해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된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를 통해 잃은 자를 찾아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만드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우리가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교회의 모습을 보면 건강한 주님의 몸으로서 전도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교회도 많다. 무엇이 문제인가? 크리스찬 슈바르츠의 분석에 따르면 성장하는 교회나 쇠퇴하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똑 같이 평균 8.5명의 불신자와 접촉을 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성장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기존의 관계를 전도의 접촉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필 요중심적 전도란 잠재적 신자와 의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개발함으로 그들을 교회와 공동체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회는 불신자들을 향한 적절한 사역과 불신 이웃과의 친밀한 관계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으로 적절한 복음전도
우 리는 선교현장을 말할 때에는 문화적으로 민감하게 복음을전해야 전라고 강조하면서도 우리의 목회현장에서는 문화적인 민감성에 대해 입을 막고 있다. 영향력 있는 복음전도를 위해서는 이 시대의 문화를 해석함으로 사람들의 필요와 사고방식을 발견해야 한다. 전도 대상자들의 상처와 아픔, 채워지지 못한 필요, 이루어지지 않는 꿈, 해결받지 못한 그들의 질문이 무엇인지 살펴 잃은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불 신자들이 교회생활을 하려면 두 번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복음을 듣고 중생한 뒤에 교회라는 조직체의 문화에 다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교회의 벽이 높다. 높은 벽 때문에 새신자가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 정착하기도 어렵고 교인들이 불신자들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이 담 안에 갇혀 살게 되면 불신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 라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목을 상실하게 된다.
불 신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면 각각의 교회가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 사역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사역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교회의 비전과 가치관에 따라서 특별히 타겟으로 삼게되는 전도의 대상 그룹이 설정된다. 그러므로 지역 사회의 필요를 발견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필요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추수할 일군을 찾으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데 일군이 없다. 오늘 우리는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며 추수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보여주며 모든 교인들이 추수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한다.
모 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름받았다. 모든 지체는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영적 은사를 받았고 이 모든 영적 은사는 추수를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전도는 소명이다. 모든 사람은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행 1 :8).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의 가장 강력한 열매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합력하여 잃은 자들을 향하여 나아갈 때 얻을 수 있다.
보 다 효과적인 동원을 위해서는 특별히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복음전도 사역에서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교회 안에는 전도의 은사를 받은 10%미만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전도사역의 핵심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동 원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오래된 신자들보다는 새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도의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2년이 지나면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두터워지는 반면 불신자들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약화된다. 그러므로 전도는 신앙이 성숙해진 다음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먼저 성숙하도록 도운 다음에 전도에 대해 도전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지않는 친구와 친척,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 전도에 대한도전을 미루지 말라. 새 신자들이 즉시 전도할 수 있도록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 도에 동원을 할 때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행동 계획을 세우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은 도움이 될 것이다.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태신자(아직 믿지는 않지만 전도대상자로 삼고 기도하며 접촉하고 있는 사람)로 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태신자들과 솔직하고 진지한 관계를 개발하라. 태신자의 관심사와 필요를 접촉점으로 삼으라. 교제를위한 모임이나 스포츠 팀, 동아리,구도자를 위한 집회, 소그룹,예배 등을 통해 태신자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만나도록 하라 기회가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라.
소 그룹(구역, 다락방, 목장)은 복음전도를 위해 가장 강력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환경이다. 이곳에서 교인들이 서로서로 전도 할수 있도록 격려하게 된다. 아직 교회에 데리고 갈 수 없는 태신자를 데리고 올 수 있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보다는 평일에 부담없이 모이는 소그룹에서 소외당하는 느낌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따스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신자나 초신자를 위해 때로는 성경공부와 같이 딱딱한 모임보다 그저 음식을 나누며 삶을 나누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갖는것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소그룹은 새신자를 양육할 수 있는좋은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전파사역을 개발하라.
전 도에는 전도 준비 단계(pre-evangelism) 복음 전도 자체(evangelism-proper). 전도 후속조치(post-evangelism)의 세가지 과정으로 분류된다. 현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사역의 흐름을 도표로 작성해 보라. 그리고 이 세 가지 단계에 비추어 보아 전도 이전과 전도 자체, 그리고 전도 이후의 정착과 양육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살펴 보라 혹시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약하다면 전도 사역은 교회 성장에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현재의 효율성을 점검해보고 필요한 부분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기 존에 있는 사역들을 이 도표에 넣어보고 복음전도의 기능을 삽입시켜서 운영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조금만 수정하면 태신자나 아직 믿지는 않지만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잠재적 신자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생활을 위한 어떤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만 하던 프로그램을 지역사회를 위해 오픈할 수 있을 것이다. 불신자들도 참여 할 수 있도록 장소를 교회당에서 조금 떨어진 구청의 강당이나 쇼핑센터의 예식홀 같은 곳으로 정하고 주일보다는 평일에 지역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운영해보라. 이렇게 함으로 기존의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던 사역이 지역사회의 불신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전도 프로그램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생활에 정착하도록 도우라.
정 착단계는 새 신자들이 교회생활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전도 그 자체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다음단계가 소홀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많은 예산을 들여 총동원 주일과 같은 이벤트를 치른 뒤에 그 다음주일에는 다시 이전의 출석 숫자만큼으로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전도 이후의 단계가 소출히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도 프로그램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려면 후속 조치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
방 문자들과 새신자들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새신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방문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찾아내 처음 찾아온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야 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 자신이 이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로 대우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준비하라
초 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친구관계이다. 방문한 첫날 그를 책임지고 만나고 관계를 세워 갈 수 있도록 멘토(mentor)를 선정해 주라. 또한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교회 내의 소그룹이나 사역그룹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 소속감을 갖도록 하라
방 문했던 사람이 교회에 정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는가? 이 교회에서 5-10명의친구를 사귀었는가? 소그룹(구역, 다락방)에 참석하거나 어떤 특정한 사역팀에 참여하는가?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맡거나 임무를 맡았는가? 지속적으로 헌금을 하는가? 말하는 가운데 "우리 교회"라는 표현을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착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방문객으로 공동체를 떠도는지 판단해 볼 수 있다.
결론
전 도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복음을 제시하기 이전에 전도와 복음에 대한 이해와 전도사역에 동원되고 무장되는 과정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부터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도 이후에 교회 안에 정착하고 양육되고 재생산하기까지의 과정이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 그 전도사역은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민과 다양한 시도를 통해 잃은 양을 애타게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며 지금 우리의 목회현장을 진단하며 대안을 마련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스승과 아비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5)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전 1:2)
●스승과 아비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스승과 아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1. 스승은 말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비는 삶으로 가르칩니다.
2. 스승은 길에 서서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아비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3. 스승은 '맡겨졌다'라고 말하지만 아비는 '낳았다'고 말합니다.
4. 스승은 'case'를 말하지만 아비는 'model'를 말합니다.
5. 그래서 스승은 "저 사람을 닮으라"고 말하지만 아비는 "나를 닮으라"고 말합니다.
6. 스승은 참을 수 있을만큼만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비는 죽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7. 스승은 '논리'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비는 '능력'으로 가르칩니다.
8. 스승은 '책임감'으로 가르치지만 아비는 '사랑'으로 가르칩니다.
9. 스승은 '지식'을 부어줌으로 가르치지만 아비는 '자신'을 부어줌으로 가르칩니다.
10. 스승은 '환경'이나 '조건' 허락되면 가르치지만 아비는 '악조건' 속에서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요즘 교회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삯군 목자는 '관리'(management) 하지만 진정한 목자는 '목양'(take care of my sheep, 요21:16)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매니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자가 필요합니다. 아비의 마음을 가진 목자말입니다.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 4:12)
요즘 저에게 도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스승'이 되지말고 '아비'가 되라. '관리자'가 되지말고 '리더'가 되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저의 부르심이고 감당해야할 사명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들 - 적용

철저한 관찰과 정확한 해석을 마친 우리는 이제 말씀을 적용할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와 문화 안에서 진리들을 적용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옳은 방법으로 그 진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정확한 적용을 위한 4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1. 그 책이나 구절이 진술하고 있는 원래의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이 최초의 독자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라. 이것이 해석이다.
2. 만약 그 구절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용되는 바가 거의 없거나 직접적인 적용을 할 수 없는 것 같으면, 일반적인 원칙들을 찾으라.
a. 그 구절에 담겨진 시간을 초월하는 일반적인 원칙들을 찾고, 왜 이러한 명령을 했는가를 질문하라.
b. 그 구절은 사랑에 대한 근본 원리들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 혹은 서로를 사랑하라는 명령.
3. 세기와 문화를 넘어서 시간을 초월하는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내고, 오늘날에 맞는 그 구체적인 적용을 발견하라. 9쪽에 나와있는 적용에 대한 해석학적 질문들을 보라.
4. 말씀을 묵상하라.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진리를 적용해야 하는지 보여주실 것이다.
## 해석학적 적용 질문
@일반적 질문들
1. 나는 저자가 최초의 독자(first reader)들에게 의도한 의미를 잘 이해하는가?
기억할 것은, 성경이 그들에게 의미하지 않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저자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특정한 적용으로 한정된 것인가?
@신약
3. 나/우리는 최초의 독자들과 동일한 특정한 삶의 상황속에 있는가? 우리가 그들과 유사한 삶의 상황 속에 있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4. 특정한 문화적/역사적 적용으로부터 무엇이 시대를 초월한 진리인가를 발견하라.
(시대를 초월한 진리와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적용을 구별)
a. 이것은 복음의 핵심의 부분인가 아니면 거기에만 한정된 것인가?
b. 이것은 거기에만 있는 도덕적인 논쟁인가, 혹은 아닌가?
c. 말씀안에 그것에 대한 일관성있는 증거가 있는가?
신약의 서술들(narratives)
5. 이것은 하나의 명백한 명령인가, 아니면 역사적인 사건을 서술한 것인가?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역사적 예(보기)를 명하고 있는가?
6. 저자는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을 위한 선례를 세우고자 하였는가?
@구약
7. 이 구약 말씀에 대한 나의 적용은 신약 말씀을 통해 걸러졌는가?
8. 이 구약의 명령이 신약에서 재언급되거나 철회되거나 재해석되는가?
9. 이 구절은 사랑에 대한 근본 원리를 어떤 식으로 보여주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 서로를 사랑하라는 명령
10. 이 구약의 명령이 내포하고 있는 원칙은 무엇인가?
11. 이것은 신약의 진리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상(Type)인가? (18쪽을 보라)
12.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고 있는가?
13. 여기에 나를 위한 어떤 삶의 지혜가 있는가?
@예화(보기)들
14. 이 예화는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언급하고 있는가?
15. 그 예화는 어떤 암시적인 인정이나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가?
16. 성경의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원칙들 중 어떤 것들이 내가 그 예를 이해하는데 영향을 주는가?
@약속들
17. 누구에게 이 약속이 주어졌는가?
18. 이 약속과 연결된 어떤 조건들이 있는가?
19. 나/우리는 이 약속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 개인적 적용과 광범위한 적용을 위한 질문들
발견된 진리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고 했던 말을 명심하라. 아래에 나오는 질문들은 여러분 자신의 삶에 그리고 여러분 주위의 세상에 성경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목록은 아니다. 더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적용을 위한 질문들
1. 이 진리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가치관이나 우선 순위를 이야기하고 있거나 거기에 도전하고 있는가?
2. 이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내가 다루어야 할 사고 유형들(thought patterns)이 있는가?
3. 이 진리에 의해 도전받는 나의 태도들은 어떤 것인가?
4. 이 진리들과 불일치하는 나의 행동들은 어떤 것인가?
5.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한 나의 관점은 이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6. 복음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내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진리는 어떻게 도와주고 있는가?
7. 내가 자신을 보는 방식에 있어서 이 진리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8. 내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을 타협할 수 있고, 어떤 것을 타협할 수 없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이 진리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9. 이 진리가 절대적인 것과 내 문화의 한 부분인 것을 구별하는데 도움을 주는가?
@광범위한 적용을 위한 질문들
10. 이 진리가 사업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11. 이 진리가 교회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
12. 이 진리가 우리가 교육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하는가?
13.이 진리가 가정 생활에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하는가?
14. 이 진리가 기독교인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
15. 교회/ 선교 단체의 예배 생활에 있어서 이 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6. 이 진리가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 또는 선교를 접근하는 태도에 어떻게 영향을 줘야 하는가?
17. 이러한 이해가 의료 윤리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데 도움을 주는가?
18. 이러한 통찰이 우리가 미래를 보는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성서 한국을 꿈꾸며...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들 - 해석 질문

해석은 “이것이 첫 번째 독자에게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인간으로서)가 의도하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다음 목록은 여러분이 본문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이다.
1. 이 책이나 구절이 말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은 어떠한가?
a. '왜'라는 질문 공세를 퍼부어라.
b. 저자나 독자의 관심, 확신, 감정,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c. 내가 생각해봐야 할 문화적 요소는?

2. 이것의 의미 또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a. 단어, 구절, 진술, 신학적인 개념, 상징, 단락, 실례
b. 저자가 위와 같은 것들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하고 있는가?

3. 시간적인 요인들을 관찰해보고 그 중요성을 생각해보라.

4. 어디(Where)인가를 관찰해보고 그 중요성을 생각해보라.

5. 대조나 비교 등을 관찰해보고 그 중요성을 생각해보라.

6. 핵심단어, 구절, 생각들, 주제, 반복 등을 관찰해보고 그 중요성을 생각해보라.

7. 비유적 표현과 비유적 언어를 해석하라.

8. 구조와 구성에 관련된 요소를 해석하라.
a. 이것들이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b. 이 구절이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어떻게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c. 이 구절이 주변의 단락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9. 그 문학양식이 나의 해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10. 인용된 성경구절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인용된 구절을 찾고, 전후 문맥을 관찰하라.
왜 저자는 이 구절을 인용했는가?
a. 요점(주제)을 증명하기 위해
b.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c. 저자의 논지를 뒷받침 하기 위해
d. 그 구절의 감정적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11. 관찰하고 해석한 것들을 요약하고,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라.
제시한 해석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는가?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해석해주고, 명확한 구절들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구절들에 빛을 비쳐줄 것이다.

12. 대답되지 않은 질문이나 더 많은 정보를 위해 성구사전, 성경사전, 지도,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는 책들을 참고하라.

13. 성경 용어 색인을 사용하여 “사람, 관습, 장소, 상황에 대해 내가 성경의 다른 성경 말씀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질문하라.

14. 그 책이나 구절을 다른 번역본을 가지고 읽어보라.

15. 주석을 참고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지막에 하라. 단지 도구로만 생각하고 너무 의존하지 말라.
주석과 비교하라. 주석으로부터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주석자의 결론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 정확한 해석 단계(이 부분은 인터넷에서 퍼 왔습니다)
성경 해석의 목적은 성경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관찰 단계에서 살펴본 대로 충분하고 정확한 관찰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히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석은 맨 나중에 자신의 해석과 맞추어 보는 정도,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보충하는 정도로 참조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주석을 붙들고 앉으면 스스로 말씀의 샘을 파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고, 평생 주석에 매달려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정확한 성경 해석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과 자세를 가지고 연구해야 합니까?

⑴ 성경은 스스로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명백한 진리들이 있으며, 특히 복음 진리는 신구약 성경에 일관된 구원의 진리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해 주는 것은 성경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결코 스스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의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 뜻을 묵상해야 합니다.

⑵ 언제나 성경의 전체적 교훈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부분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을 고려하며, 그 본문의 특별한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전체적인 교훈을 무시하고 부분적인 깨달음을 전체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정규적을 읽고, 전체적으로 통독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⑶ 성경을 항상 정확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비주의적인 책도 아니요, 늘 영해가 필요한 책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다른 책들처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곳에 드러나 있지 않은 심오한 감추어진 영적인 의미를 찾기보다 세밀한 관찰과 정확한 해석을 통해서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문학 양식과 표현 방법, 수사학적인 표현, 문법적 구조 등을 통해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문법적인 해석을 정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인 배경을 참조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생명력이 있어서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 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면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⑷ 어떤 모호한 구절을 사용하여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또 해석자들의 해석이 너무나 다양하고, 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주 부분적인 해석을 근거로 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명백한 진리를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⑸ 연구하고 있는 성경의 문학적인 유형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읽고 있는 성경의 문학적 유형에 따라서 그 해석을 달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시편을 연구할 때 그 내용을 시적으로 이해해야지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서를 연구할 때 문학적으로 해석해도 안됩니다. 역사서는 역사서대로, 문학서는 문학서대로, 서신서는 서신서대로 그 문학적 특징을 고려하며 해석해 나가야 합니다.

⑹ 문맥이 해석의 왕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문맥에는 가까운 문맥이 있습니다. 문맥이란 글의 흐름을 말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바로 앞 구절과 다음 구절이 바로 가까운 문맥입니다. 다음에는 먼 문맥이 있는데 이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문단의 앞 문단이나 뒷 문단, 혹은 앞 장이나 뒷 장, 또 그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지금 읽고 있는 그 부분의 위치와 역할, 특징 등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⑺ 항상 성경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성경 해석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하지만 그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해석자의 의무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사상과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문단 한 문단, 한 장 한 장을 통해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자가 말하려고 한 의미를 최대한 가깝게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과연 저자가 이런 뜻으로 말하였을까? 과연 저자가 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려고 한 바가 이것인가 되묻고 그 타당성을 재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⑻ 정확한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때 스스로 많은 질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소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왜 이런 단어를 썼을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저자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이러한 이야기를 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 말씀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어린아이들과 같이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읽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문맥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또 성서 사전이나 주해서를 참조하면서 정확한 단어의 뜻을 파악하고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성서 사전을 자주 찾아보며 성서 용어의 기본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관주를 찾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습니다. 관주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을 뒷받침해 주고 조명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같은 단어가 여러 다른 본문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게 되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정확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훌륭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해답을 얻은 것이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⑼ 다른 건전한 번역 성경을 참조해야 합니다.
성경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오래된 성경도 원본은 하나도 없고 다 사본뿐입니다. 사본은 사람의 손으로 필사한 것이기 때문에 오자도 있고, 후대 사람들이 첨가한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 사본은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을 몇 천 년 후에 한국말로 번역을 한 것이 한글 개역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 번역도 문자적인 번역을 원칙으로 한 것도 있고,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기 위한 의역도 있습니다. 그리고 번역 위원들의 신앙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번역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언어란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도태되어 사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 번역된 표준 번역이라든지 새 번역이라든지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참조해 가면서 읽으면 뜻을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⑽ 얻은 결론을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얻은 결론이 문맥 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점인가?
얻은 결론이 연구하고 있는 성경의 전반적인 주제와 일치하는가?
얻은 결론이 저자가 다른 글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와 조화되거나 일치하는가?
얻은 결론이 성경의 보편적인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가?
얻은 결론이 어떤 특정한 교리나 신학교에 의해 생겨난 선입견에 물들지는 않았는가?
이런 기준으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저자가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요약해 보아야 합니다.

성서 한국을 꿈꾸며..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들 - 관찰 질문

관찰은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아래에 우리가 봐야 할(주목해야 할) 목록이 있는데, 이것이 여러분의 관찰의 능력을 증가시켜 줄 것이다. 관찰의 좌우명은 “보라, 보라, 그리고 보라”이다.

1. 누가(Who)라는 질문을 하라.
a. 주요 인물에 주목하라
b. 대명사를 관찰하라: 나, 그, 그녀, 그것, 우리, 그들,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

2. 무엇(What)을 질문하라.
a.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
b. 사건의 순서는 무엇인가
c. 무엇이 말해졌는가
d. 분위기(atmosphere), 무드(mood), 정서(emotion)를 관찰하라.

3. 언제(When)를 질문하라.
a. 시간의 순서를 알려주는 단어에 주목하라: 전에, 후에, 동안에, 그 때에, ~ 할 때가지ㅣ, 언제 등
b. 동사의 시제를 관찰하라: 과거, 현재, 미래
4. 어디서(Where)를 질문하라.
a. 거론된 장소와 위치를 찾으라.
b. 지도에서 지리적 위치를 관찰하라.

5. 대조(Contrast)를 찾으라.
a.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렇지 않으면 등의 단어
b. 대조되는 견해, 성격, 사건, 개념, 태도 등

6. 비교(Comparisons)를 찾으라.
a. ~같이, 또한, 마치 ~처럼, ~과 마찬가지로 등
b. 비교되는 생각, 성격, 사건, 태도 등

7. 반복(Repetition)을 찾으라.
단어, 구절, 생각, 개념, 주제 등

8. 핵심 단어와 주제를 찾으라.
자주 반복되기에 핵심이 될 수도 있고, 한 단락을 이해하는데 핵심을 이룰 수도 있다.

9. 비유적 표현과 비유적 언어들을 관찰하라.

10. 구조(Structure)와 구성(Composition)의 요소들을 주목하라.
a. 구조의 단계를 찾으라
b. 구조의 종류에 주목하라
c. 다양한 구성의 법칙을 관찰하라
d. 책이나 구절의 처음과 끝을 관찰하라
e. 주제의 전환이나 사고의 흐름, 논리의 전개

11. 사용된 문학 양식에 주목하라.
역사적인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 복음(Gospel), 계시(apocalyptic), 서신(letter), 법(law), 산문(prose), 시(poet), 예언(prophecy) 등

12. 이유, 결과, 결론을 나타내는 단어를 관찰하라.
저자가 내린 요약 진술(summary statement)을 관찰하라.
그러므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13. 명령, 충고, 약속, 경고, 예언, 질문, 조건문(if)을 관찰하라.

14. 강조적인 진술을 관찰하라.
진실로, 보라, 나(바울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15. 목록(List)을 관찰하라.
목록들의 순서에 주의 - 어떤 진전이 있는지 찾아라.

16. 성경을 인용한 것을 찾으라.

17. 저자에 의해서 사용된 예증을 관찰하라.

## 이야기 중심의 본문에서
본문을 관찰할 때 먼저 본문의 문학 양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야기 중심의 본문인지(예를 들면 복음서), 논지와 설득, 주장이 있는 글인지(예를 들면 서신서), 아니면 예언인지(예언서), 시(시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문학양식에 맞는 관찰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주의깊에 관찰해야 합니다.
특히 이야기 중심의 본문에서는 '6하 원칙'의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주의깊에 관찰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한 7가지의 관찰질문을 살펴보도록 하죠.

6W1H
1. WHO : 등장인물, 누구누구에게
2. WHEN : 언제 이 사건(논지)이 발생(전개) 되는가?
3. WHERE : 어디서 어디로
4. WHAT : 분문의 중심된 행동(사상)이나 사건(논지)은?
5. WHY : 사건발생, 논지 전개의 이유와 원인은?
6. WHEREFORE : 그 결과 따라오는 것들은
7. HOW : 어떻게 전개되고 사건이 이어지는가?

복음서의 대부분이 이런 이야기 중심의 글이기 때문에 직접 7가지 질문을 가지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3장 1-6절까의 말씀을 지금 펴시고 지금 직접 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서 한국을 꿈꾸며...

허들링(Hudding)

 


남극의 눈물 '황제펭귄'편

'남국의 눈물'을 보았다. 한 겨울... 남국에서 새끼를 낳아서 키우는 황제펭귄의 모습을 통해서 한 가지 귀중한 교훈을 배운다. 영하 40~50도의 혹한 속에서 얼어죽지 않기 위해 '허들링'(Hudding)이라는 것을 한다.
허들링이란... 알을 품은 황제펭귄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체온으로 혹한의 겨울 추위를 견디는 방법인데, 무리 전체가 돌면서 바깥쪽과 안쪽에 있는 펭귄들이 계속해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바깥쪽에 있는 펭권들의 체온이 떨어질 때 서로의 위치를 바꾸므로 한 겨울의 추위를 함께 극복해 가는 것이다.
요즘 메스컴을 보면 연일 학교 폭력과 왕따, 자살의 문제가 보도되고 있다. 물론 근래에 와서 불거진 문제들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 학생의 자살로 인해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실 공교육의 현실을 보면 더 심각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더 불어 한국교회 주일학교도 심각한 한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일주일(168시간)에 2시간도 안 되는 신앙 교육을 통해 우리의 자녀들이 바른 신앙과 정체성을 갖출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큰 욕심일 것이다. 또한 지금의 주일학교 시스템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얼마나 양육하고 훈련할 수 있는지도 진지하게 점검 및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이 런 상황 속에서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믿음이 있는 부모들이라면 고민이 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추운 바람으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지키고 신앙적으로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방법은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자식들을 품고 서로 의지하며 '허들링'을 해야 한다. 혼자 힘으론 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가 어렵고 힘들다. 함께 뭉쳐서 서로를 의지해야 한다. 개인적인 바램은 이런 일들이 지역교회 안에서 일어나길 바란다. 주일학교와 가정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또한 신앙 교육의 주체가 주일학교가 아닌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지역교회를 뛰어넘어 이런 부분에 관심과 열정이 있는 가정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장이 마련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의지하며 싸워갈 수 있는 장이 열린다면... 그런 연합(허들링)이 일어난다면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혹한의 매서운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상처 치유와 사역

요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깊이 배우게 됩니다. 리더들(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구분이 없이)에게 있어 치유 사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 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너무나 쉽게 리더가 됩니다. 신학대학(교)에 입학하면 하루 아침에 전도사가 됩니다. 안수를 위한 몇 가지 시험만 치루면 목사로 안수를 받습니다. 검증하는 기간도, 훈련하는 기간도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전도사/목사라는 계급장(?)을 얻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이 충분히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사람이 영적인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영적 지도를 받는 성도들에게도 비극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 적인 사역이란 단순히 기술이나 방법, 프로그램들을 배워서 그런 것들을 운영하고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영적 변화는 성령(진리, 말씀) 안에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신학을 좀 공부했다고... 몇 가지 기술들을 배웠다고... 리더가 되기 위한 소정의 과정을 이수했다고... 하루 아침에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참한 결과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 된 영적 사역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의 변화, 내면의 치유는 사역자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이 하나님 앞과 말씀 앞에서 깊이 다루어지지 아니한 사람에게서 좋은 열매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 나님의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 사역자의 죄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순간적인 잘못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소명의 문제나 믿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단의 유혹과 시험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쓰러진 이유... 원인... 그것은 결국 내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깊이 다루어지지 못한 내면을 소유한 사역자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로 세우기 전에 깊은 내적 치유가 필요합니다. 온전한 치유(물론 한 두 번의 치유사역으로 다 회복될 수는 없습니다)를 위한 시간들을 경험한 사역자가 건강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7~18)

참 제자도 (True Discipleship)

참 제자가 되는 길은 다시 태어날(거듭날) 때 시작된다. 그 길은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 시작된다.

(1)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며, 잃어버린 자이며, 눈먼 자이며 벌거벗은 자임을 깨닫고,
(2) 선한 성품이나 선행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대속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4) 믿음의 확고한 결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주님이요 구주로 인정할 때,

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삶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제자의 삶은 초자연적인 삶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성한 능력이 필요하다. 오직 다시 태어나야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삶을 사는 힘을 받게 된다.

여 러분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다시 태어났는가(거듭났는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그 분을 당신의 주님이요 구주로 받아들이라. 그리고 그 대가가 어떠하든지, 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서 그분께 복종하기를 결심하라.

참 제자도의 정의

참된 기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다. 구주께서는 저녁의 여가 시간이나 주말이나 은퇴기를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주님께 첫째 자리를 드릴 사람을 찾으신다.

“주님께서 이전과 같이 오늘도 찾고 계시는 대상은 친히 앞서 걸으신 자기 부정의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자들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솟아나는 불굴의 충성심을 지닌 사람들이다.” (H. A. 에반 흡킨스)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주님의 갈보리 희생에 합당한 보답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 할지라도 어찌 그같이 놀랍고, 그같이 신성한 사랑을 다 채울 수 있겠는가!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요구를 하신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사치한 생활을 좇는 시대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간과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기독교를 단지 지옥을 면하거나 하늘나라를 보장하는 것으로 간주하려 든다.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최고의 것을 누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제자의 삶에 대한 엄숙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말씀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바 기독교에 관한 사상과 조화시키려고 애쓴다.

우 리는 병사들이 애국심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공산주의 자들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피와 땀과 눈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삶에 특징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과 관련이 없거나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명백하다. 우리가 만약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오해의 여지가 결코 있을 수 없다. 다음은 세상의 구주께서 친히 밝히신 참 제자도이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참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눅14:26)

이 말씀은 친족들에게 적의나 악의를 품으라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처럼 커서 다른 모든 사랑은 상대적으로 미움이 된다는 뜻이다. 사실상 이 구절 중에서 가장 어려운 말씀은 “참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란 말씀이다. 자기 사랑은 제자도에서 가장 견고한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있게 된다.

2. 자기 부인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마16:24)

자 기를 부인하는 것은 금욕과 다르다. 금욕은 어떤 음식, 쾌락, 집착 등을 금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완전히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나 권위를 일절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아가 왕좌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 마틴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님, 저로 자신의 뜻을 갖지 않도록 하옵시고, 참된 행복이 외적으로 임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영광스러운 승리자이신 주이시여!
주님께 드리는 이 손을 굳게 잡아 주옵소서.
이제 저의 뜻은 온전히 주님의 것이오니,
곧 구주의 왕좌에서 즐거워하는 종이니다.
(H. G. C. Module)

3. 기꺼이 십자가를 택함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16:24)

십 자가는 어떤 육체적인 연약함이나 정신적인 곤고함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것들이다. 십자가는 기꺼이 선택한 길이다. 그 길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수치와 치욕의 길이다. 십자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과 이 세상의 조류를 거스려 서있기를 택한 자들에게 가한 수치와 핍박과 학대를 뜻한다. 어떠한 믿는 이도 세상의 길을 따르기만 하면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

4.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드려진 삶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이 말씀의 뜻을 알려면 스스로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물어보면 된다. 그 삶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다. 그 삶은 성령님의 권능으로 산 삶이었다. 그 삶은 남을 위해서 아낌없이 드려진 삶이었다. 그 삶은 중대한 불법 앞에서 인내와 오래 참음의 삶이었다. 그 삶은 열심과 아낌없이 드림과 절제와 온유와 친절과 신실함과 헌신의 삶이었다(갈5:22,23).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분이 걸으신 것 같이 걸어야 한다. 반드시 그리스도를 닮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5.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삶을 향한 뜨거운 사람

“너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품으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요13:35)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허다한 죄들을 덮어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오래 참으며 친절히 대해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만하지 아니하며, 우쭐하지 않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고전13:4~7). 이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제자의 삶은 차갑고 율법적인 금욕주의가 될 것이다.

6. 주님의 말씀 안에 확고히 거하는 삶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니” (요8:31)

참 된 제자의 삶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시작을 잘하거나 큰 명성 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나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그 삶이 참된 제자의 삶인가의 시금석은 끝까지 견디는 것에 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왕국에 적합치 아니하니라.”(눅9:62) 일시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묵묵히 순종하며 따라오는 자들을 원하신다.

저로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쟁기를 든 제 손은 눈물에 젖고,
녹슨 가위는 못쓰게 되었지만,
그럴지라도 그럴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저로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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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름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아니하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눅14:33)

이 말씀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참 제자도에 대해서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말씀이자, 성경에서 가장 인구 없는 구절일 것이다. 지혜로운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가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고 많은 이유를 대겠지만, 순수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말씀은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거나 복음 전파에 쓰일 수 있는 물질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은 무위도식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가족과 자신에게 필요한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열망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의 일에 투자하며 자기 앞날을 하나님께 맡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 의를 구하면서, 결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멸망 당하고 있는 때에, 그는 야심상 남은 돈에 집착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하여 다시 오실 때 마귀의 수중에 들어갈 재물을 모으느라고 생애를 낭비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며, 간직할 수 없는 것과 이미 애착을 버린 것들을 드린다.

이상이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일곱 가지 길이다. 그 길은 모호하지 않고 명백하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책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패로 인하여 영원히 은폐되어야 하겠는가? 메시지를 전하는 자보다 메시지가 더 위대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참되나 사람은 거짓되다는 말씀이 옳지 않은가? “저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에 담대히 나서자, 그리고 이제부터는 영광스러운 우리 주님의 참 제자가 되도록 힘쓰자.

나의 주님, 저를 주의 문으로 인도하사
원하는 이 귀를 다시 한번 찌르소서.
주의 띠는 자유이니이다.
나로 주의 곁에 있게 하사
수고하며 견디며 순종하게 하소서.
(H. G. C. Moule)

-William MacDonald “True Discipleship”에서 발췌

현대교회와 성경적 공동체

피터 새비지 : 피터 새비지는 기독교 교육학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페루와 볼리비아의 선교사를 지냈다. 현재는 '남미 신학연합'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

완전한 복음을 전세계로

이 제 개인주의의 아성은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서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 우정, 평안, 소속감 등 현대 사회 속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감정들을 애타게 찾아 헤멘다. 심지어 오랜 세월 동안 전혀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 온 가족의 구성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된 이런 의식은 최근 신학계에 일고 있는 '교회의 재발견(rediscovery of the church)' 움직임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그런 움직임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정된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모두 과거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임을 드러내야 할 적절한 시기라 하겠다. 이런 역할을 감당할 때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교회, 로잔언약 6절에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의 핵심이며 복음을 편만케 하시려고 그분이 약속하신 방법' 이라고 표현된 바로 그런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로잔언약에 함축된 의미와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기에는 매우 미흡한 상태이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 전도에 대한 비전이 결핍되어 있어서 불신자 세계로 스며들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로잔언약은 이런 교회들을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 이라고 표현한다. 또 다른 교회들은 비전은 있지만 그들이 복음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 안에서의 생생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사람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잃어버린다든지 신분 상승이나 금전 문제에 있어서 사소한 일이라도 정직하지 못할 때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선교에 있어서 교회가 무슨 기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교회는 어떤 특별한 문화나 사회/정치 체제, 혹은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놓치는 것이다.
이 세대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긴요한 문제는 세계 복음화의 주역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성경적인 교회 모델을 찾아내는 일이다. 세계 복음화의 과업은 전문가들이나 직업목회자들에게 맡겨서 간단히 완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로잔언약에 표현된 대로 '전(全) 교회가 완전한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그런 비전을 회복할 때 세계 복음화의 목표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현대 교회의 네 가지 모델

오 늘날 지역 교회나 '모여진 교회'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 이제 가장 보편적인 현대 교회의 모델 네 가지를 택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한편 성경적인 교회 모델과 비교하는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1) 강의실과 같은 교회

이 모델은 루터와 칼빈시대 이래로 개신교 전통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이 모델의 교회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열쇠는 설교이며 그 설교는 교리를 설명하는데 중점을 둔다. 목회자들은 복음적인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믿음을 세우는 방향으로 설교를 이끌어간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은 비범한 권능을 부여 받은 사람들로 여겨지는데 칼빈은 그 권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겼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모텔은 뛰어난 성경 해석이 발달하는데 자극이 되기는 하지만 성도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성도들은 활동적인 주체가 되기보다는 관객이나 방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목표를 제시 받고 있지만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기회는 거의 없다. 이것은 성도들이 참된 제자로 성장하는데 장애 요인이 된다. 우리 모임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요소는 바로 영적인 성장이다. 그런데 이 영적 성장은 정확하고 정돈된 메시지에서 성경 지식을 요약해내고 재활용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2) 극장과 같은 교회

성 도들은 기대에 차서 자리에 앉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날 밤 죄를 고백하고 지금은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있다. 이제 교회에서 시작될 본격적인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목사가 나타나고 성가대가 찬양을 시작하면 성도들이 화답한다. 모든 관심은 강대상 위에서 막 재연(再演)되려 하는 드라마에 집중되어 있다. 종이 울리고 성가를 부르고 나면 이제 성찬식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과 피'를 베풀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에 참여한다. 이 모든 드라마가 끝나면 성도들은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간직한 채 가정과 사회 활동으로 돌아간다.

이 모델에서 목회자는 성례를 집전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앞서 설명한 모델과 마찬가지로 늘 수동적인 입장에 머무르게 된다. 게다가 교회가 지니고 있는 복음 전파의 잠재력마저도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계 각처에 가서 전하라는 '특별 명령'을 제정해야 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 기업과 같은 교회

이 모델에서 교회는 복음을 판매하는 소매상이다. 이것은 다른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한 교회들의 목표는 신앙적인 재화와 용역을 사람들에게 쓸모 있게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박사는 기업, 혹은 슈퍼마켓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원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또 그렇게 운영해왔다. "나는 때때로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Garden Grove Comunity Church)를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20에이커 짜리 쇼핑센터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무료 고속도로의 입체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을 위한 넓은 주차장과 몇 개의 부속건물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과 예배의 안내서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찾고 원할만한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게 고안된 것입니다."

그는 운영 본부로 쓰이도록 커다란 교회 건물이 있어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훈련된 평신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무언가 위대한 일을 행하시길 기대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사역을 더욱 확장 발전시키길 원한다면 원만한 현금유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교회는 잘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 교육받으며 전임 사역자는 팀을 이루어 기업체의 간부 구실을 한다. 성공적인 비지니스에서 도출된 경영 원리들은 전혀 무리 없이 이런 모델의 교회에 적용된다. 이익은 교인의 숫자로 측정되는데 그들이 초신자든, 등록 교인이든, 헌신된 사람이든 구분하지 않는다. 전임 사역자 팀은 고도로 질이 높고 전문적이다. "아픈 곳을 찾아서 고쳐라'는 말이 목표가 되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델의 교회들은 복음을 사업상의 표현에다 꿰어 맞추려 한다는 말이 나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런 환경에서 성경적인 제자화가 얼마만큼이나 지속될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4) 친목회 성격의 교회

이 모델은 풍요로운 사회가 낳은 문화적인 부작용 가운데 하나이다. 개중에는 교회가 내세우는 사회적 관심과 유익에 마음이 끌려서 마치 친목회에 가입하듯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 지위 따위의 몇 가지 요건만 충족되면 그는 어엿한 회원(교인)이 된다. 사람들은 신앙적인 교제에서 얻어지는 종교적인 유익을 위해서 교회에 등록하거나 교회를 이용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익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헌신적으로 일했던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들끓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영혼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모임은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그저 위안을 찾아 모였을 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위하여 모이지도 않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통치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모임도 아니다. 이 클럽은 그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활동에만 동참하고자 하는 회원들의 '숨은 욕구'를 충족시켜 줄뿐이다. 실제로 이 클럽회원의 열도(熱度)는 '관계의 질'과는 상관없이 활동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 넣었느냐로 판가름되게 마련이다.
그 신앙클럽은 목회자가 활동의 조정자, 상담자, 혹은 관리인의 역할을 하는 사회활동 센터가 된다. 성취도는 그 클럽이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지위, 가치 및 사회적 안정 등에 의해 결정된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교회는 오로지 사회에서 선택 받는 집단의 요구에 부응할 뿐이며 선교에 대한 소명감이 거의 없다. 또한 그 교회는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 밖으로 움직이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말고도 오늘날 많은 교회모델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모델들은 다양한 현상 속에서 어떤 개념을 심어주는데는 별 모자람이 없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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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교회 모델

(1) 공동체의 성격

성 경에 따르면 크리스찬 공동체는 '관용과 응집'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는 동시에 매우 단단한 유대를 맺고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던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화합하려고 애썼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피부색이 검든 희든, 지적인 성격을 가졌든 행동 지향적이든, 초신자든 성숙한 신자이든 아무 제한 없이 하나가 되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교회 안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유대계 크리스찬과 비유대계 크리스찬 사이의 문제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운동이 문화와 인종에 따라 나누어지고 자신들의 문화 성향에 따르기를 기대했다. 새로운 일치를 이루라는 바울의 주장은 이런 상황 하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사도행전 15장은 사도들이 교회 생활에서 이 원칙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그 원칙은 현대 교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크리스찬 공동체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열려져 있었다면 어떻게 응집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복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을 앨런 스팁스(Alan Stibbs)는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잘 다듬어진 기교로 원숙한 화음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나 몇 그룹이 따로따로 갈라진 채로 서로 흉내 내는 것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을 분명히 연주하고 노래해야 가능하다. 그들이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도 화음을 내는 것은 악보에 따라서 지휘자의 인도에 기꺼이 따르기 때문이다."

크리스찬 공동체의 토대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 속에 그의 백성을 끌어들이시고 세상을 위하여 온 세계로 내보내신다. 로잔언약은 '성도들의 집단 거주지'로서의 교회를 깨뜨려버리고 불신자들의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크리스찬 공동체의 토대가 하나님의 언약인 반면 그 언약을 이끌어 가는 원칙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는데 언약에 참여함과 동시에 주께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을 축복하신다. 세례는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좋은 예표가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덧입고 있는 것이다.

공 동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단단한 유대를 갖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공동체 안에서 은총과 직무와 사명을 심어 주어서 성도들이 서로를 세우고 교회의 몸을 이루는 관계를 견고하게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완수해야 할 역할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결코 그 사명을 다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크리스찬 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성장하도록 격려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개인이 성장하는 것과 그의 사역이 커 가는 것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한 편 이 사랑은 공동체가 지닌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사명은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과 정신이 연합된 존재이며 결코 물질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할 수 없음을 상기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요한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요일3:17).

성 경은 공동체가 반드시 유기적인 존재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점은 교회를 묘사하는데 몸, 결혼, 가족, 형제 등 여러 유사개념을 사용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공동체는 매우 구체적으로 조직된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 어떤 공동체라도 형태, 범위, 규율과 승인을 규정하는 기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하며 성령을 통해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가 실제 세상에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움직일 때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개요를 염두에 두호 성경적인 공동체를 종말론적인 차원, 제자화의 차원, 그리고 성례전의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종말론적인 공동체

크 리스찬 공동체는 이미 이루어진 언약과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의 선상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미래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역사에 뛰어든 하나님 나라의 실재 가운데서 산다는 말이다. 공동체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실제로 그것은 '역사를 만드는' 일을 수반한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크리스찬들의 일상적인 삶에 뛰어들면서 움직이셨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행5:19,7:52,10:8~43,13:28~41,14:3). 그 공동체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을 기뻐했을 뿐 아니라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행3:19)'을 간구 했다. 그들은 미래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았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시각은 초대교회에 세상을 향한 사명의 일체감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을 향해 문을 걸어 잠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을 밀어 제치고 그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사명감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28:18~20)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했다.

크리스찬 공동체는 '새 시대', '새 사람'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새로운 하늘과 땅을 기다리는 나그네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믿음의 개척자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격적이고 가슴 설레이는 인식이 초대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현대 교회의 특징으로 이어져야 한다.

(3) 제자들의 공동체

크 리스찬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학습 공동체이다. 주님이 이미 가르쳐 주신 것과 성령님 안에서 계속 알려 주시는 것들을 그대로 따르고 자라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화를 두 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의 관계이다. 폴 미니어(Paul Minea.)는 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산다. 그분과 더불어 고난을 받으며 영광도 함께 누린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스린다."

다른 한 측면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분명한 제자화를 이루지 못하면 크리스찬 공동체는 쉽게 신앙 클럽으로 전락하고 만다. 모든 사람을 제자화 해서 다시 제자 삼게 하는 크리스찬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엡4:12~13).
이 제자화 사역의 핵심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섬김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는데 있다. 이 공동체는 또한 선교의 수단이 된다.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크리스찬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평화나 부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크리스찬 공동체에 가입하는 순간 지상명령 성취를 위한 요원으로 위임 받는 것이다.

(4) 성례 공동체

성례 공동체의 핵심은 영적인 헌신과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있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공동체는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는 헌신을 하게 된다. 이제 이 성례전 공동체를 3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 저 이 성례 공동체는 이미 말한 것처럼 경배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정기적으로 그리스도의 중보 하심과 하나님의 권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배와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한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어 있으며 감사는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재 헌신하는 고백이 된다. 이러한 경배와 헌신의 행위는 말의 차원을 넘어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둘째로, 성례 공동체는 중재의 공동체이다.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분은 성도들과 일반 사람들, 정부와 그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셨다.

셋 째로, 성례 공동체는 고난의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남을 위하여, 또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한다. 고난은 종종 선교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로잔언약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한다. 크리스찬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토대로한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사랑으로 묶여 있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학습 공동체이다. 제자화의 공동체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희생의 공동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처음에 살펴보았던 강의실과 같은 교회, 기업과 같은 교회, 극장으로서의 교회, 친목회로서의 교회 등은 모두 문제점을 함유하고 있다. 하나같이 깊이가 없고 성경적인 공동체에 요구되는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http://jeondo.org/making/community.php?PageNum=030201 이곳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한국교회 공동체의 실패와 회복

고 대천덕(예수원 원장)

한국교회에 팽배해있는 개인주의의 문제는 사실상 거의가 개신교와 성공회의 문제이다. 가톨릭의 경우는 이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우상숭배(탐심)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이기적 야망)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같은 것들이 육체의 일(즉 개인주의)일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신 갈라디아서 5장의 가르침을 그 동안 철저하게 무시해왔다. 이는 수많은 현대의 한국 크리스찬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라 불리 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지만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인 것이다. 더우기 시기나 분리함이나 당 짓는 것과 같은 분파주의에 빠져있지 않은 성도들조차도 성경이 '코이노니아'라고 부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 철저히 개념과 이해가 결핍된 상태에 놓여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에서의 공동체개념 희석의 원인

이 런 문제의 뿌리들은 무엇인가? 이 문제의 원인, 또 이 문제가 오랜 역사를 두고 존재해 왔으면서도 이면(裏面)에 가려져 왔던 원인을 나는 크게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문제는 한국 기독교(아니면 적어도 한국 개신교)의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오역된 어휘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원인은 최초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번역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오역 가운데는 두 개의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그 후의 다른 번역판들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하나는 '교회'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오역과 근원지는 중국이었다.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세기였는데 그들은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말을 번역할 때 '敎會'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그들은 '交會'라고 번역했어야 옳았다. 이 말이 성령의 교제로서의 교회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정확히 반영해주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교회는 이 최초의 선교사들 시절로부터 이미 교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선택한 '敎'라는 글자에는 유학자들의 우월 의식과 어우러진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담겨져 있으며, 이런 사고방식은 이미 서방의 교회에 깊이 잠식해 들어와 있었다.
번 역이 문제가 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교회와 매우 관계가 깊은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호산나나 할렐루야나 셀라 같은 말처럼 번역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쓰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이 일반 세상에는 해당되지 않고 오직 기독교에만 쓰이는 하나의 전문적인 용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 러나 불행히도 한글 성경은 코이노니아와 그의 동원어(同源語)들을 17개의 다른 말들로 번역함으로써 크리스찬만의 어휘에서 이 말을 사실상 빼내버리게 되었고, 말과 더불어 개념마저도 흐지부지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사도신경에 겨우 이 말이 나타나지만 거의 무시되고 있고, 종전엔 성직자들이 축도 할 때 쓰이던 것이 그나마 요즘엔 무슨 협의라도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내던져지고 그 자리엔 고도로 개인주의적인 단어인 '감화'나 '감정 ' 따위의 말들이 들어서고 말았다. 사실 이런 말들은 헬라어엔 상응단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정신과도 어긋나는 것이다(#1 ‘성령의 코이노니아’라는 표현대신 ‘성령의 감화, 감동, 위로’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렇듯 현대의 목회자들은 초기의 번역자들이 시작한 실책을 잘도 이어받고 있으며 결국 공동체의 개념을 깨끗이 추방해버리고 말았다. 매주일 그들은 "우리는 공동체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의 목표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만족감입니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잘못은 한국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의 선교사들도 똑같은 잘못을 범했다. 성공회의 모든 아침 예배나 저녁 기도회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말씀으로 끝나도록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에 규정돼있다. 그런데 성공회 선교사들도 ‘코이노니아’를 '감화'라는 말로의 오역을 용인했고 그것은 이후의 모든 번역판에서 그대로 답습되었다.
성공회에 있어서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었다. 사실 한국에 건너온 초기의 성공회 선교사들은 로마를 추종하던 아주 특이한 계열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로마를 따르느라 성공회의 공동체 개념을 거부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성공회는 다른 전통을 따르던 첫 선교사들 때부터 이미 정체감의 위기를 경험해야 했고, 후에 한국의 첫 성공회 성도들이 외국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그들은 성공회가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어떠한가를 직접 보게 되었다.

2) 초창기의 선교사들

이러한 성경 어휘의 개인주의적 오역들과 더불어, 한국에 건너온 초기의 선교사들이 또한 모두 급진적인 개인주의 - 종교개혁에서 비롯되어 19세기에는 온 서방을 휩쓸어 버린 - 의 산물이었다. 여기에는 서구의 경건주의 - 올바른 교회관과 균형만 이룬다면 아주 바람직한 운동이 될, 그러나 그것 자체로만 남아있으면 위험한 개인주의로 치닫고만 - 도 한몫 거들었다.

초 기의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들 가운데 하나는 무디(D. L. Moody)의 사역이었다. 무디는 당시 본궤도를 심각하게 벗어나 형식주의, 교파주의, 세속주의의 수렁에 빠져있던 서방의 교회에 부흥을 가져오는 능력 있는 일군으로서 하나님께 사용된 사람이었다. 명목상으로만 크리스찬이었던 많은 사람들이며 결코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무디에 의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되었다.
내한 선교사들은 무디와 같이 이렇게 개인구원(개인의 죄로부터의 구원을 생각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죄란 곧 술, 담배, 성(性) 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을 강조하는 것이 한국에서도 올바른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불교나 유교나 민간신앙(그들이 무디의 메시지를 듣고 구원을 받던 문화에는 이에 상용하는 아무런 요소도 없었다)에 젖어있던 한국인들이 이제 그들의 말을 똑같은 맥락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식으로도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조금도 점검을 해 보지 않았다.

무디의 보수주의는 미국에서는 다소 균형이 잡혀있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마침 그 당시 막 피어 오르던 자유주의 신학운동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선교사들은 모든 자유주의적인 것들은 일본으로나 보내라고 선교본부를 애써 설득했다. 이는 한국교회의 균형을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당시 막 좋은 출발을 하고 있던 일본의 경건한 복음주의 운동에마저 쐐기를 박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요컨대 초기의 선교사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가졌지만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모세는 그의 믿음을 온 국가에 적용을 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에스라의 믿음(성경에의 깊은 헌신)은 가졌지만 에스라의 주변정황(강한 공동운명체 의식)에는 눈이 어두웠다. 개인주의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종교를 향한 이 모든 치우침들은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가르쳐 준 찬송가들을 살펴볼 때 한술 더 뜬다는 느낌을 준다.
오늘날 한국 크리스찬들의 태도를 결정짓는 우선적인 요인은 성경이나 설교라기보다는 찬송가가 되고 있다. 찬송가란 공동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책이다. 공동체 개념이 표현된 몇 개의 찬송가가 있긴 하지만 그나마 잘 불려지지 않고 있다. 반면 개인주의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찬송가들은 마르고 닳도록 불려지고 또 불려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아주 초창기부터 한국교회에 잠재적으로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약 50여 년이 지나도록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이면에 가려져 있었다. 그 50여 년 동안에는 여러 역사적인 요인들이 교회에 상당량의 연대감과 공동체의식을 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지난 35년 전부터였다.

그러면 이 문제를 이면에 가려두었던 요인들은 무엇인가? 초기의 크리스찬들은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로 뭉쳐 이 핍박 받는 새 크리스찬들을 위해 새로운 가정이 되어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다. 더우기 얼마 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됐는데 이 때 교회는 전부 다 연합하여 그에 항거했으며 차츰 온 가족들과 심지어 온 마을 사람들이 크리스찬이 되어갔다. 제국주의에 대한 항거는 교회에 놀라운 연합과 공동체의식을 심어주었다.
이 런 현상은 1935~1945년의 핍박이 극도에 이르던 시기에 오히려 그 심도를 더해갔다. 다만 영국 선교사들이 관여하던 교회들만은 예외여서 그들은 신사참배 건에서 타협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이로써 철저한 보수신학에 맹렬한 반일감정까지 지닌 미국 선교사들 관여하의 교회들로부터 자연히 분리되기 시작했다(결국 미국이라는 제국과 일본이라는 제국이 태평양의 가장자리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격돌 상태에 놓였던 셈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불화(disunity)의 첫 번째 조짐이었다. 이 조짐은 해방 후 곧바로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즉 일제와 타협했던 교회들은 그들의 재산이 고스란히 손에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들은 참배 거절로 재산을 몰수당한 교회나 일반 가난한 교회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분열은 이렇게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상황은 다시 한번 반전되었다. 모든 크리스찬들이 파(派)를 불문하고 무조건 공산당의 표적이 돼있음을 알게 되자 그들의 불화는 다시 막 뒤로 가려지고 만 것이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교파의 차이나 이권다툼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 휴전이 되고 민족중흥의 역사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면서 더 이상 경제적 불황이나 종교적 핍박의 압력들이 없게 되자 드디어 잠자고 있던 한국교회의 개인주의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만연하는 개인주의, 권력과 이권과 자리를 노리는 치열한 경쟁,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육체의 일들로 점철되는 삭막한 분열의 장면들, 이미 익숙해져 있는 분열 중에서도 으뜸의 분열인 그러한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3) '성공한' 교회

한 국교회의 공동체개념을 희박하게 만든 세 번째 원인을 생각해보자(우리는 지금까지 초기의 성경번역자들과 초창기 선교사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것은 성공이다.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해내지 못하던 일을 성공이 해낸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해묵은 장난이다. 사단은 그의 적의 모든 관심이 한가지 일에만 집중될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슬슬 밀어준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탁 잡아 당겨버린다. 상대는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갔다가는 이내 땅바닥에 코를 박으며 곤두박질하고 만다. 태권도나 유도나 레슬링 선수들이 이런 수법을 배운다면 아마 금메달을 따내기도 어렵지 않으리라.
우리는 쓰러졌다. 성공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3P’ 즉 권력(power), 명예(p.estige), 그리고 지위(position)가 찾아왔다. 성공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해외유학 붐이 찾아왔다. 한 때 가난에 쪼들리던 신학교가 이제는 해외에서 수여 받은 학위 가운들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성공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실제적인 신학은 뒷전에 밀쳐두고 순전히 이론적인 학문에만 탐닉해 들어가는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여 기에 의미 파악 없는 암기식/주입식 교육방법(유교의 형식주의에서 비롯된 한국의 전통적 교육방법)이 한몫 거들었고 마침내 신학교의 강단은 목자를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학위를 다투는 아주 무의미하고 이론만 난무하고 그저 학적(學的)일 뿐인 곳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협력의 자리엔 경쟁이 들어섰고, 이제 코이노니아는 종전에 이론에서 무시되어져 왔던 것 못지 않게 지금은 실제에서도 무시되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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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공동체개념 회복의 방향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공동체를 잃어버린 원인을 세 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얘기가 좀 길어진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을 것인가? 여기 그 길을 제시하려고 하거니와 그것은 이미 시작이 되고 있다.

1) 평신도운동

첫 번째 단계는 목회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교회에 강하게 번져나가고 있는 평신도운동이다. 목회자들이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날 그들은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것을 와해시키려 들거나 지배하려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운동은 초교파적이고 실제적이며 성경적이다. 이것이야말로 행동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은 교회가 목회자들과 몇몇 직분 관료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 지체들의 것이며 그 지체의 99%는 평신도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들 평신도들이 그들의 직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이며 그 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들 등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찾아내고자 노력함에 있어서 그들은 '피차 권면 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이른바 '파라처치 (para-church, 기독교 사회단체 혹은 선교단체)'와 단체들과 협회들을 설립해오고 있다.
사실 '파라처치'라는 말은 교회와 그 관료제는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이다. 관료제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파라처치'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파라처치’이라면 목회자와 관료조직은 단지 한 기관을 교회로 존속시켜주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참 교회란 이 세상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며 그 삶을 바탕으로 한 일대일 전도를 통하여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을 뜻하는 것이다.

2) 신학교의 공동체 회복

신 학교가 코이노니아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을 배출해내지 않는 한에는 건강한 교회란 그저 소망사항에 머무를 뿐이다. 더우기 공동체를 향한 평신도운동이 퍼져나가기가 무섭게 목회자들은 그것을 방해하며 나서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교는 무슨 일을 할 수있을까?

첫 째로, 그들은 지금 당장부터 교회(ecclesia)의 정확한 의미를 가르치기 시작해야 한다. 에클레시아에 대한 모든 관주들을 찾아 비교해보는 성경연구 프로젝트 같은 것을 만들어 학생들을 참여케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왕국(basileia)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을 해야만 한다.

셋 째로, 그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중요한 헬라어 단어 하나 하나마다 그것이 나오는 모든 구절들을 찾아본 뒤 그 용어가 각각의 구절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에 따라 그 구절들을 분류해낼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물론 성구사전(concordance) 사용법 숙지는 말할 것도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런 연구를 해야만 하며 그밖에 코이노니아와 유사한 의미의 단어들(예컨대 고후6:14~16상)에 대한 연구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넷째로, 신학교는 성경연구 뿐 아니라 동양의(한국의 것만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절실한 요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한국신학은 서양신학자들을 맹종하는 지금의 모습을 정말이지 벗어나야 한다. 또한 성경을 연구할 때에도 지금까지의 전통을 정당화하거나 그 전통에 안주하는 일을 그만두고 성경이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묻기 시작해야 한다.

다섯째로 신학교는 성령에 대해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 초기의 우리 성경번역자들은 성령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에 성경 도처의 성령에 관한 구절들을 오역하고 있다. 이제 신학교가 성령의 본래 의미를 가려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대하여 성경이 표방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교리는 바로 성령의 코이노니아 사역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코이노니아는 성령의 열매, 은사, 지혜, 성화, 그 밖의 어느 것보다도 우선되는 성령의 사역이다. 고후 13장 13절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단어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그 세 위의 각각의 중요한 속성인 사랑, 은혜,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우리의 신학자들은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변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세 번째 관심사로서는 믿음이니 소망이니 성화니 은사니 능력이니 하면서 코이노니아만을 쏙 뺀 그 모든 것들에 마음을 다 집중해왔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성공하는 교회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교회가 가난할 때는 그게 뭔지 모르면서도 코이노니아를 실행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크리스찬들은 배운 적이 없었어도 어려움을 나누었다. 그러나 교회가 성공하기 시작하자 코이노니아는 좀 당혹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교회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심이 줄어지고 성령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정신 없이 분열되고 혼돈되게 되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성령론의 진수는 코이노니아이다. 그런데 이 코이노니아는 값 지불을 요한다. 그것도 아주 비싸고 또한 심리적 위협을 가해오는 값을. 그러나 이 코이노니아를 바로잡기 전에는 신학교는 교회의 부흥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열매, 은사, 지혜 등에 대해서는 올바른 코이노니아를 가르치고 난 후에도 얼마든지 가르칠 시간이 있는 것이다.
여섯째는 실험 작업이다. 코이노니아는 결코 진공관 속에서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은 삶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험 상황 속에서 즉 실험과 병행하여 연구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두가 지의 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담당교수와 학생들이 소그룹을 이루어 코이노니아를 실험할 한 단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는 이 목적으로 따로 할당된 기숙사에 들어간다. 우리 딸이 다니던 미국의 대학은 이런 것이 잘 돼있었는데 그것이 그 아이에게는 아주 값진 경험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상적 인 방법은 신학교마다 학교 전체가 실험장이 되고 학교 전체가 살아있는 코이노이나가 되는 것이다.
한 국에 이런 것들이 가능한 신학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는 내가 한 학교를 알고 있고 그 밖에도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학위를 주는 신학교는 아니지만 성경연구소나 선교사 훈련센터 등에는 그런 데가 많이 있다). 내가 신학교의 학장으로 있던 그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그것을 시도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일부 교수들과 많은 목회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를 하는 바람에 뜻을 이를 수 없었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았을 때 나는 그 학교를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그 방법 외에는 신학을 가르칠 방법이 달리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둔 후에 나는 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나를 그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 동원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곱째로 신학교가 자체적으로 개선해야 할 것은 명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 7월 13일자 ‘코리아 타임즈’지에는 콜럼반(Columban) 신부회 소속의 맥매한(Hugh MacMahon) 신부의 팔이 실렸었다. 그는 이 세상이 온통 감투와 명예에 눈이 멀어 있다고 지적하며 이것은 기독교 정신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자들은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5:44).
장 로회 신학대학 내 제3세계 교회지도자센터의 오콜라(Chalton S. Ochola) 목사도 같은 신문 7월 11일자에서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서구의 기독교'와 '제3세계의 기독교' 사이의 잘못된 분열현상을 지적하면서 그런 현상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버젓이 실재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계속하여 날카로운 도전들을 던져주는데, 잠시 그의 말을 인용해본다. "누군가가 신학자에게 질문하기를 '당신은 불이라고는 조그만 등잔불 밖에 없는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신학공부를 한달 동안만 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다면 그는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그 곳은 굶주림과 질병과 가난으로 인하여 뼈만 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달할 것인가 등과 같은 우리 주위의 현실문제들에 대한 학위논문을 쓰는 데는 아주 적격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벤츠나 대우 로얄에 기사가 딸려 있고 다년간 권력과 특권을 누려오던 국회의원이 어느 날 갑자기 군사 쿠데타에 의해 감옥신세를 지게 되고 먹는 거라곤 하루 두끼 냄새 나는 접시 위의 빈약한 곡물에 잠은 변기에 엎드려서 자고 눈을 뜨면 끔찍한 고문의 연속에 시달리며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하게 되었을 때에 이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과연 따뜻한 방, 배부른 상태에서 가능할 수 있겠는가?"
신학자들이 난민이 천만을 넘어서고 매 사흘마다(올해에는 아마 매 이틀마다 인지도 모르리라) 원자폭탄 하나에 죽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 세상의 무서운 현실들과 씨름을 해나간다면 우리는 코이노니아가 진정 무엇이며 또 성경이 사회적, 경제적 현실들에 대해서 무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지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학교가 참으로 진지하게 이러한 문제들에 우선권을 두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권력, 명예, 지위의 3P가 아닌 것을 관심사로 삼는 새로운 세대의 성직자를 배출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덟째로 신학교가 서둘러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모습은 교파를 초월한 신학교들간의 의미 있는 코이노니아이다. 이것은 일일 수련회를 몇 번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일주일은 함께 모여 보낼 필요가 있다. 신학생들은 함께 모여 단순히 서로를 알아가며, 중고등부나 대학부 학생들의 여름수련회에 이런 공동체를 적용할 수 있게끔 훈련을 받기도 할 것이다. 이런 초교파적 신학생 여름캠프를 해마다 연속적으로 개최하는 것이다. 여기서 훈련 받은 신학생들은 함께 초교파적 팀을 이뤄 마을전도 등을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3)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

끝 으로 우리는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신학교는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른바 '목회'를 위한 사람들을 길러내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원시적인 공동체들에는 장로(연장자), 행정가, 교사라는 세 부류의 지도자가 있게 마련이다.

장로는 제사를 수행하고 전통을 보존한다. 행정가는 시장(市長)이나 더 작은 행정구역단위의 장(長)을 맡아 봉사하며 일반적으로 보수를 받지 않는다. 교사들만이 보수를 받으며 또한 교사들만이 외부로부터 영입되어 들어온다. 교사들은 그 마을의 종교의식이나 그 마을의 행정에 대해선 아무런 간여도 하지 않는다.
여 기서 우리는 장로와 집사와 교사에 대한 아주 자연스런 구분을 시사 받게 된다. 교회의 장로들은 성찬식을 집도하며 세례를 베푼다. 집사들은 교회를 운영하며 재정을 관할한다.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남자 건 여자 건 보수를 받는 교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은 교회의 성례부분이나 행정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한다. 이러한 사역의 구분은 사회학적으로만 온당한 것이 아니라 또한 성경적인 것이며 교회의 부패를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는 흔히 사도적 혹은 선교적 모델로 불리우는 또 하나의 모델을 볼 수 있다. 사도들은 모든 은사와 모든 카리스마적인 능력과 모든 신학적 훈련과 모든 교회설립의 권위(재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목회에 관한)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들을 세운 후 바로 앞서 말한 직분들에 따라 조직을 편성하였다. 그들은 또한 예언자들 - 예리한 영적 통찰력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즉 대언자로서의)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받은 지역교회의 평신도들 - 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그들은 아직 성경번역이 안된 지역에서는 성경번역을 장려했고, 문맹률이 높은 곳에서는 문맹퇴치를 겸한 전도를 하도록 지도했다. 이 성경번역자들과 문맹퇴치 전도자들이 바로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오는 '복음 전하는 자들'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목사라는 말은 사도행전 20장 17,28절에 나오는 장로나 감독과 같은 말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있고 연단을 받은 지혜로운 지역교회의 사람이어야 하며 집사들의 보필을 받도록 되어있다(목사는 사도행전에는 '장로'로 표현돼 있고 '집사'로 표현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집사'는 크게 보면 모든 종류의 '교회 일꾼'을 뜻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후서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자신을 집사라고 표현했고, 디모데도 감독을 안수할 권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사라고 불리 운 적이 있다).
교사는 보수는 받아야 하지만 다스리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교사가 다스리려 한다면 교회는 곧 하나의 몸이 아니라 기업체나 아니면 완연한 관료제가 숨쉬는 공공기관이 되고 말 것이다. 공동체에는 관료주의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한국교회는 '주의 종'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한다. 만일 주의 종들이 그들의 주의 모범을 따라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교회의 종이 되기를 시작한다면 공동체 회복엔 희망의 서광이 비쳐올 것이다.
만일 목회자들이 그들의 평신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타협의 유혹들로 인하여 고통 당할 때 기꺼이 그들을 지원해주는 일에 평소의 마음이 가 있다면 - 나는 지금 세력 경쟁을 하고 있는 어떤 야심 찬 교단의 선배 목회자를 지원해주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바로 거기서 공동체의 갱신은 피어날 것이다. 교회의 지체들이 시장에서, 회사에서, 개인사업체에서, 공장에서, 논밭에서, 정부기관 사무실에서, 정치활동에서 바로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가기를 힘쓸 때, 그리고 그런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피차 권면 할 때에,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한국교회에 공동체의 회복을 가져다줄 사람들이 될 것이다.

http://jeondo.org/making/community04.php?PageNum=030204 이곳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독교세계관운동

김현진 목사(공동체 코이노니아 하우스 대표)

구속사는 세속사의 중심이며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문제는 바로 교회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문제의 해결점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동반자적으로 부패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의도하신 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지 교회의 본질을 먼저 살펴보고 이 본질적인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세계관 운동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 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성도의 교통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고백했던 용어였으며,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을 때 그들도 역시 '교회란 성도의 교통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성도의 교통'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하나된 몸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성도의 교통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들 간에 서로 하나되어 교제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성도의 교통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삼차원의 코이노니아

코 이노니아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를 교제(koinonia)케 하시고, 성도들 간에 서로 영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교제케 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도들끼리만 아니라 교회 밖의 고통 당하는 이웃과도 교제토록 하셔서 더불어 함께 살도록 하신다. 즉 성령은 수직적 코이노니아, 수평적 코이노니아,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의 삼차원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신다. 이 삼차원의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것이 본질적 교회이며 온전한 공동체이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된 신약교회의 공동체 됨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며 전 생활적인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세례를 받자마자 속사람이 변하여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으며 자원해서 물질을 나눔으로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행 4:34). 이뿐 아니라 대사회적으로는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온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즉 초대교회의 '성도의 교통'은 결코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제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가시적인 공동체성'(可視的 共同體性)이었다. 교회의 핵심은 온전한 교제(Koinonia)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부패한 심령에 오셔서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됨'(oneness)을 이루신다.

성도들 간의 수평적인 코이노니아에는 영적인 교제, 정신적인 교제, 그리고 물질적인 교제의 세 차원이 있다. 영적인 교제는 성도들 간에 기도로서 영교하는 것과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것이다(요일 1:3, 빌 1:4). 정신적인 교제는 지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서로 위로, 권면, 격려하는 태도로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 지체를 세워주는 정신적인 차원의 교제(빌 2:1-2, 고전 12:26, 롬 12:15), 그리고 지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말로서만이 아니라 필요한 물질로 채워줌으로써 한 몸의 삶을 실제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물질적인 교제가 있다.

" 믿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으로써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행 2:44-45, 4:32)라는 사실은 물질적인 교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원래 코이노니아라는 헬라어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할 때 쓰는 상업적인 단어였으며, 또한 친척이 아닌 '직계 가족'의 관계를 나타낼 때 쓰였던 단어였다. 물질을 공동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란 이렇듯 '예수 새 가족'(Jesus new family)이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영적, 정신적인 교제만 아니라 필요한 물질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집단 이기주의를 좇아 예수 믿는 자들끼리만 아름답게 삶을 나누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교제가 아니다. 온전한 코이노니아는 기독교인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역사회 속에 있는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삶을 같이하는 영역을 포함한다. 코이노니아의 더욱 깊은 신학적인 의미는 구약 희년의 신약적 구현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희년은 50년마다 땅과 집과 몸에게 자유를 선포하여 토지반환, 노예해방, 부채탕감이 되게 함으로써 토지독점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영구적 부익부 빈익빈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경제법이었다.

예수님은 눅 4:18-19에서 새로운 희년(은혜의 해)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결과 코이노니아의 역사를 통한 교회공동체의 자원적인 나눔과 섬김으로 지역사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다 담당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하여 이뤄지는 새로운 차원의 희년(자원의 희년)이다. 구약의 희년은 신약에서 코이노니아로 대체된다. 즉 교회라는 공동체는 구약 희년의 의미를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지역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기관이다.

공동체성이란 교회 내적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영적, 정신적인 교제만 아니라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교제를 실천하여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것이고, 교회 밖으로는 주위의 필요를 채우면서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초대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나그네가 있으면 집으로 영접하여 돌봐주었으며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그를 돕기 위해 그들은 이삼일은 금식하였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가 실제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것을 교부들은 전해준다. 이러한 구제는 곧 사회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회 선교의 발판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연속성

성령 강림으로 형성된 초대교회 공동체는 신약 최초의 공동체였고 모든 공동체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통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 됨에도 불구하고 늘 제기되는 의문은 과연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 형태가 계속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령이 최초로 강림하심으로 가능한 일시적인 공동체였으므로 잠시 후 성경에서 곧 사라졌으며, 그것이 소비적인 공동체였으므로 발전된 현대교회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는 신학적인 반론이 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사도행전 2장과 4장 이후에도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사가 여러 방면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초대교회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는 획기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행 2:37-47).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강림 후 개인의 소유형태는 여전하였지만 소유에 대한 의미와 태도가 변화되었다. 성도들은 재산을 소유하되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 소유(common ownership)'의 형태로 바뀌었다(행 2:42 -47). 그것은 소유를 자발적으로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이것은 최초의 강력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돌발적이고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후 계속 실행된 것이었다. 사도행전 4장 32-35절에서는 이러한 공동소유의 실천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 공동소유의 실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만 실천된 것이 아니라 신약의 여러 교회에서도 계속 실행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 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써라"(롬 12:13)고 말한다. 여기서 '공급하다'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코이노니아 즉 공동소유를 실행하라"는 말이다. 즉 필요하다면 내 것도 그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공동 소유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공동소유의 형태가 로마 교회에서도 일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동소유적 삶의 확장은 마케도니아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연보하여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koinonia)한 경우에서 나타난다(고후 8:1-14). 연보는 "유여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한다"(고후 8:14)는 것이다. 이 연보란 바로 '코이노니아'의 정신이었다. 연보는 단순히 예배시의 헌금이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 삶에서 '물질적인 교제'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이었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유무상통하던 습관은 교회의 박해와 여러 지역으로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한곳에서 '共有'하던 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지역교회 간의 형제애적 '共用'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 삶이 그 후에도 작은 가정교회 공동체의 형태로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로 인해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원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두세 가정이 작은 한 단위가 되어 서로 자연스럽게 전인적인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성전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행 2:42-47).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나자 그 당시 그러한 공동체적 삶을 살고 있던 일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가지고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6:1-3). 성도들은 흩어진 장소에서 몇몇 가정들이 뭉쳐 작은 공동체들을 형성하여 가정교회의 역할을 해 나갔으며 코이노니아의 삶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빛과 소금의 삶으로 영향력 있는 선교사역을 해 나갔었다. 이 작은 단위의 공동체들은 후에 바울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 바울이 선교 거점으로 사용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란 바로 이러한 평신도들의 작은 공동체의 한 예이다.

바 울의 신앙 변증서인 로마서(16:5)에서도 바울은 로마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언급하고 있고 이외에 골로새서(4:15)와 빌레몬서(2절)에서는 라오디게아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와 골로새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 형태의 작은 공동체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러한 작은 공동체들이 로마 제국 전역에 두루 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로마의 압제 속에서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의 역사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삶으로 보여주는 복음이 그 요인이었다. 그들의 공동체 삶은 공동소유만 아니라 지체의식과 형제애, 그리고 서로 간의 자발적인 섬김이 있었다. 사도 바울 시대 이후에 들어서서 교부 저스틴(Justin Martyr)은 그의 저술 <변증>(Apology)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라,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유행어가 붙여졌다고 전해준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하의 각 지역에서도 공동체적 삶을 계속 유지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스틴은 또한 당시 성도들의 공동체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무엇보다도 부와 소유의 획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우리들이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내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공동소유하고 있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하면서 우리의 동족이 아닌 사람들과는 생활습관이 달라서 한번도 공동 유대를 이뤄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후로 이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산다."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형제 관계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 계속 살아 있었다. 바울의 경우 '성도들'이란 서로 돌아보는 형제애를 가진 '공동체'의 동의어였다(롬 1:7; 16:15; 고전 1:2; 빌 1:1; 4:22). 저스틴은 이러한 '성도들' 의 삶을 또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부유한 자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헌납을 하고, 그렇게 모인 것이 성찬식 집행자에게 전달되어 고아와 과부들, 병이나 그밖에 이유로 빈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에 속해 있는 포로된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을 찾아가서 도와준다."

이러한 코이노니아는 지역교회 내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른 지방의 교회들도 도움으로써 지체된 형제애를 실천하였다. 170년경 고린도 교회의 디오니시우스(Dionicius) 감독이 로마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부터 여러분들은 모든 형제들을 여러 가지로 돕고 모든 도시에 수많은 원조를 보내주었다. 예로부터 여러분이 보내 온 선물들을 통하여 여러분은 로마인으로서 전래의 로마교회의 관습을 고수하여 궁핍한 사람들의 가난을 덜어주고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고, 이것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은 그곳의 교회 성도들의 공동체적 섬김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우리의 형제들은 대부분이 넘치는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서로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이 병자들을 데려와 세심하게 보살피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병자들과 똑같이 지극히 기쁜 마음으로 죽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앓는 병에 전염되면서, 다른 사람의 병에 자기도 걸리면서, 자발적으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이렇게 해서 우리 형제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들은 성도들의 몸을 품에 안아 눈을 감겨 주고 입을 닫아 주며 어깨에 메고 가서 진심으로 얼싸안고 몸을 씻기며 옷을 입힌 다음 장례를 치렀기에, 그들도 얼마 안가서 똑같은 시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때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또 언제나 먼저 간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꺼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독교를 변증했던 아리스티데스(Aristides)도 당시 성도들의 공동체적 섬김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과부들에게서 그냥 돌아서는 일이 없다. 고아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사람들로부터 구해 내며, 외인들을 보면 집으로 영접하여 형제처럼 대우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난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한 자가 죽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 한도 내에서 그의 장례를 부담한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의 메시야 때문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옥에 갇히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들 모두가 그의 필요를 채워 주고 될 수 있으면 그를 풀려나게 해 준다. 그리고 그들 중에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과 양식이 없는 자가 있으면 그들은 그를 돕기 위해 이틀이나 삼 일을 금식한다."

교부 오리겐(Origenus)은 이러한 생명력 있는 공동체들이 소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서 세속사회 속에서 복음을 권능 있게 증거하고 있음을 증언하였다.

"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이러한 공동체들을 일으키시어 미신과 무례와 불의에 젖은 인간들의 공동체들에 대항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스승과 교육자가 되어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공동체들에 비하여 '세상 안에서 하늘의 등불'처럼 그들 속에서 낯선 사람들로서 살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지역에 분리해서 게토(ghetto)화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사회 속에서 보편적인 모습으로 살면서도 공동체적 삶을 살아갔고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내용이 산상수훈적인 삶과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해 나갔다. 극진한 형제애와 지체의식, 그리고 물질까지 자원해서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삶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만 아니라 교부 시대에도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계속해서 실행되고 있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공동체 삶은 성령강림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지하 교회가 공인되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예루살렘 공동체처럼 유무상통을 하면서 많은 인원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후터 형제회와 메노나이트 공동체들,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등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를 성경적 근거로 해서 이룩된 예이다. 즉 초기 예루살렘의 대규모의 공동체는 박해로 해체되어 다른 형태로 계속 발전했으나, 만약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한다면 성령의 동일한 역사로 현대에서도 예루살렘 공동체와 같은 형태는 실제로 가능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공동생활은 하지 않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코이노니아의 본질을 구현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여 기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교통, 코이노니아가 공동체 삶을 통해 초대교회 이후 약 300여 년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현대교회에는 그러한 초대교회의 사랑의 공동체 삶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지하교회가 지상교회로 바뀌면서 교회 내에서 세속적인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이러한 나눔의 공동체적인 삶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을 되고 난 뒤부터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적 정절이 약화되면서 교회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은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교회의 본질인 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단절되어 버렸으며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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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 공동체 운동들

그 후 제도권 교회가 상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을 찾기 원했던 뜻있는 성도들은 이름도 없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매세기마다 끊임없이 나타났다. 2세기에는 성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시도가 있었고 5세기에는 훌륭한 신앙선배들의 공동체가 정통교회에 의해서 수도원화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 수도원 공동체들이 부패하게 되자 성 프란시스코, 도미니크 수도회를 통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나 진정한 복음의 본질 회복을 촉구했다. 12세기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평신도 교회갱신 운동단체인 왈도파, 14세기 네덜란드의 공동생활 형제단을 통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인 Devotio Moderna운동(오늘의 헌신이란 뜻),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과 더불어 보다 철저한 교회개혁을 천명한 재세례파의 공동체 생활, 18세기 모라비아 지방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헤른후트 선교공동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선교회들이 공동체 바탕을 두고 효과적이고 활발한 사역을 펼쳤다. 현세기에 와서는 보다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기독교 공동체 시도가 급증하고 있다.

2차대전 후 나타난 세계의 대표적인 기독교 공동체는 교파와 교회간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프랑스 떼제공동체, 강력한 영적 각성을 통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개신교 여성독신 공동체인 독일의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 성령의 능력과 자비량 선교를 통한 선교공동체인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고독과 소외의식이 만연한 대도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랑의 공동체인 시카고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 미국 남부 흑인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코이노니아 동역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성경 진리의 온전성을 증거하는 라브리 공동체 등이 있다.

템플대학교의 F. 릿텔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참된 교회의 회복'이라고 했으며 해롤드 벤더 교수는 '철저한 제자도의 삶'으로 보았다. 결국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어떤 특정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도날드 블뢰쉬는 "기독교 공동체는 기성교회에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우쳐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우리의 기존 교회가 상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균형'잡는 역할을 해 주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꾸준히 공동체 사역이 진행되어 왔다. 많은 교회들이 공동체교회를 시도하고 있으며 민중교회들도 신학적인 입장과 강조점이 다소 다르지만 역시 공동체적인 교회를 실험하고 있다. 교파가 다른 교회들도 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에서 함께 만나고 일치를 도모하게 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교 회의 주요한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표시'이다.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지 우선 그 일반적인 개념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임박성에 따라 미래적 하나님 나라와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 구분된다.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며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 땅에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다. 전자를 '종말론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하며 후자는 '천국의 현재적 개시'라고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을까 하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공동체를 다루고자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떠한 관계인가? 조지 래드(George Ladd)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교회는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래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 기관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지만 교회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있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도구이며 대리 기관(agent)이라는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의 사신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화해의 뜻을 이루시는 최상의 수단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교회는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며, 현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둘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형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자.

미 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계 21:1-5), 눈물과 고통과 죄와 사망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된 나라(계 21:4-5),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나라인 새 예루살렘(계 21: 10-27),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왕 노릇(통치) 하는 나라(계 22:1-5)이다. 미래에 완성될 천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서 새로운 영토(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회복(죄와 사망의 문제 해결), 새로운 통치(하나님과 영원히 왕 노릇 함)이다.

아름답고 권능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온 세상을 회복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즉 지금 여기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그 러면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고(마 3:2; 막 1:1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요 3:1-5) 복음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눅 17:21).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시 22:3).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고(눅 11:20) 또한 어린아이 같은 겸손함과 단순한 믿음(마 18:1-5), 헌신과 충성, 낮아지고, 주고, 버려지는 섬김의 삶(마 19:13-30), 가난한 자와 나누는 공의의 삶(막 10:21 -23; 눅 18:22-24), 온전한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천국의 헌장인 산상수훈(마 5-7장)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통하여 나타나는가를 총괄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 법으로서의 제자도이다. 그 제자도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를 가리킨다. 이 제자도는 인간으로서는 지키기가 매우 힘든 명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졌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의 역사를 물리치는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었고, 또한 물질까지 온전히 나누어 가난한 자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감으로써 예수님이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실천하였다.

이 제자도는 개인적으로 지키고자 할 때는 거의 불가능한 윤리 같지만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힘을 합하여 한 몸 안에서 공동체로 지키고자 할 때는 산상수훈이란 실천 가능한 윤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이다.

마태복음의 여덟 가지 복은 세상 사람들의 사회 가치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형태를 규정지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제자도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성령 강림 이전에는 주로 예수님 한 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 받은 사람들'의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보여졌다. 성령이 임함으로써 초대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풀고 모든 물질을 온전히 나누어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기적인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탐욕을 떨치고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지경까지 간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사의 혁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된 실체의 증거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통로라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능력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즉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한 온전한 공동체로 회복될 때 하나님 나라가 기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 보여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2:28 -31).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 4:12)"고 말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보여 주는 실재이다.

하 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 삶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 임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산상수훈을 실천하고 물질까지 전적으로 포기하고 나눌 수 있는 '철저한' 공동체여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철저한 제자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철저한 공동체의 모본이다.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은 재세례파 공동체인 후터 형제회(Hutterian Brethren)의 삶을 언급하면서 "산상수훈과 무조건적인 제자도, 제자도와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 형제자매들의 공동체 생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주와 구라파에 있는 후터 형제회를 방문해 보면 역시 몰트만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후터 형제회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방식대로 재산을 공유하며 신실한 형제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로 지금도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후터 형제회는 종교개혁 이래 현재까지 5백여 년 동안 존속해 왔다.

금세기의 위대한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박사는 인도 남부에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여사가 세운 도나버 공동체(Dohnaver Fellowship)에 대하여 "만일 이 지구상에 천국(the kingdom of God)이 있다면, 아마 그곳은 이곳 도나버 공동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나버 공동체는 사회봉사와 함께 선교를 하는 공동체로서 힌두교 사원에 창녀로 팔려 간 소녀들을 교화시키는 사역을 했었다. 원래 CEZMS(영국성공회 제나나 선교회) 소속이던 이 선교단체는 자라면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모든 회원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소유(all things in common)'하며 '믿음의 선교(faith mission)' 방식을 취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외국에서 온 요원들과 인도 요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all one in Christ)'가 되었으며 계급이나 서열, 국적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없는 사랑과 포용의 분위기가 가득한 사랑의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정녕 하나님 나라의 삶이 구현된 실재를 접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은 여호와께서 영생의 복을 명하는 삶'이라고 노래했다(시 133:1-3).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이 구현될 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 선재(先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차 다가올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단편적으로나마 미리 이곳에서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라고 기도한다. 어떻게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가?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생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통로이다. 공동체 생활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삶의 방식(life style)이다. 이것이 교회됨의 의미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실제로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실재(visible reality)'이며,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열린 창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공동체 생활, 즉 한곳에 모여 재산을 공유하며 사는 그러한 공동체 생활 형태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하는 통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보편 교회의 형태와 삶 속에서도 그의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체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철저성'이다. 보편 교회에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나타나려면 제자도와 공동체성이 보다 '철저(radical)'하게 실천되어야 하며 보다 격상된 헌신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의미는 단순히 함께 모여 사는 집단이 아니라 철저한 제자도와 깊은 형제애적 삶의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제자도는 물질까지 완전히 나누어 형제애적 사랑을 실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의 필요에 동참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실제적인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떠한 교회를 통하여 그 나라가 구현되는가? 교회의 본질이 실천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공동체 됨이었다. 개인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다. 참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온전한 공동체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성이 철저히 구현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다. 철저하지 않으면 처절하게 된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는 철저한 공동체의 실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하며, 미래에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보여 주는 대안적 사회(alternative society)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절정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 안에 있으니 곧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된 그러한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는 경우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영토(영역)'냐 혹은 '통치'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종래의 주장은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이 아니라 '통치'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앞서 미래에 새롭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천국)의 특징이 '새로운 영토, 새로운 회복, 새로운 통치'임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다면 미래의 세 가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이 땅에서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장소적인 영역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은 하나님의 통치에 종점을 두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영역적 의미보다 주권적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구체성이 결여된 막연한 개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통치는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통치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 구체적인 영역을 통해서 나타난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이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너무 치중했었기에 통치의 영역인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적 의미만 아니라 영역적인 의미에서도 균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인 개념이 약화된 것은 종래의 신학적 영향도 있었다.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교회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가 전 세계에 있는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들과 그러한 공동체성을 온전히 지닌 교회들을 접해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에도 가시적으로 임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란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고 개념적이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막연한 관념적인 하나님 나라가 되기 십상이다. 진실로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도 임재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과 영역의 개념이 균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할 때 균형잡힌 하나님 나라론이 확립될 것이다. 막연한 통치 개념으로서의 실재가 없는 하나님 나라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항상 이 땅 위에서 눈에 보이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현대 교회의 비극 중의 하나는 현재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접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성경 해석이 대개 영해(靈解)되는 쪽으로 흐르거나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에 관념적인 기독교로 정체되어 나중에는 체념적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다. 교회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가 보여져야 한다.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기독교는 체념적인 기독교로 전락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성이 보다 실제적으로 가시적으로 철저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이다.

요즈음 기독교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기 독교 세계관은 일상적인 세계관과 달리 하나님 편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세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세계관 혹은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의 틀을 가진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뒤 저 세상에서 펼쳐지는 천국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 공동체 삶이다.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도 밝혔듯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 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교회 내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 속에서 조명하여 확대해 나가게 하는데 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은 학문적이고 사변적인 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기독교 세계관 책 저술, 강연, 세미나, 스터디 수준에 그치고 만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이 사회 전 영역을 다스린다면 그것이 옳음을 밝혀내는 것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 가능함을 실제 삶으로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론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실천될 수도 있지 않는가?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박식한 이론만을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 이원론에 매여 있다. 삶과 괴리된 세계관 지식이 문제이다. 신약 성경의 구조를 묵상해 보면 왜 하나님이 바울을 예수님의 12제자 군에 미리 부르지 않고 나중에 부르셨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비교적 학문과 이론에 무식한 12제자들이 먼저 '행' 한 후에 그것을 바울이 나중에 학문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 1:1) 기독교 세계관이 어떠하다고 이론은 박식하게 늘어놓으면서 그 세계관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이원론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말'에 지친 종교가 되어 버렸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를 확인하고 증명할 삶의 현장이 없다는 것이다. 예배 시 수많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그 설교가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실천의 생활은 보기 힘들게 되고 선포된 말씀이 실제로 실천되지 않고, 또한 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말씀의 능력은 상실된다. 기독교의 지식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성경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 가는 즉 '실천함으로써 체득하는 진리' 를 말한다. 브루더호프 (Bruderhof) 공동체를 가보면 그들은 "우리의 삶이 바로 학교다" 라고 말한다. 공동체 삶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 학교이며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은 이론 중심의 세계관 교육이 아닌 체험적인 삶의 현장을 통한 기독교 세계관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그 삶의 체험의 현장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기독교가 세속 사회에 대항하여 기독교 문화관과 세계관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속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세속 사회에 영향을 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믿음과 생활 체험을 공유한 공동체 생활이다.

기독교공동체를 통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 독교 공동체 삶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생활 속에서 실천 해 나갔던 예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하는 네 공동체는 필자가 직접 탐방하여 생활해 보았던 사례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는 공동체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범적 모델 중의 하나이다.

schaeffer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

1948 년 미국 정통 장로교회로부터 유럽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쉐퍼는 1951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 샹뻬리 지역으로 이사해서 산 속의 조그만 산장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는 거기서 중대한 영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정립하고 유럽의 신학적, 사상적, 문화적 공허의 심각성을 안타까워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과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사명감을 가진다. 그는 미국 정통 장로교단의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재정적 후원도 끊었다. 1954년 그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모든 남녀들을 위한 '진리의 피난처' 로 바꿀 것을 결심한다.

그는 기도를 생활화했으며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세워 준수하였다. "첫째, 기부금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만 아뢴다. 둘째, 간사를 모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셋째,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고 그날그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넷째, 우리의 사역을 알리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매우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것을 믿는다."

쉐퍼 부부는 엄청난 위험을 각오하였다. 1954년경에는 벌써 아시아와 중남미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왔다. 1955년 2월에 그들은 스위스 연방 정부로부터 가톨릭 지역에서 개신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6주 이내에 스위스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전은 모든 산꼭대기에 서리라(사 2: 3)" 는 말씀의 약속 아래, 기적적으로 그들을 도운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150여명이 보내 준 헌금으로 현재의 라브리 공동체의 모체가 된 웨이모의 멜레즈 산장을 구입하여 스위스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1955년 6월 4일 불어로 '피난처(L'abri)' 를 뜻하는 라브리 공동체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라브리에 오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불신자이다. 오전에는 개인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노동을 한다. 현재 세계 7개국에 라브리가 있는데 어느 곳이든지 라브리에 가면 간사 중 한사람이 학생의 개인 교수가 되어 모든 문제를 도와준다. 개인 교수는 학생의 개인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연구 과정을 정하여 준다. 공부는 도서관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거나 담당 간사와 개인 공부를 한다. 라브리에는 미리 짜여진 교과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학생 개인의 관심과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 과정을 정한다. 라브리 도서관에는 오십여 권에 이르는 라브리 서적과 라브리 강연을 녹음한 이천여 개의 카세트테이프 혹은 기타 여러 가지 라브리 자료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담당 간사와 공부나 그 밖에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오후 노동 시간에는 라브리 생활 운영에 필요한 노동을 한다. 스위스 라브리의 경우 겨울에는 매일 눈 치우기를 하며 그 외에 장작 패기, 채소밭 가꾸기 청소, 요리, 잡초 뽑기 등이 있다.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하면서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을 나누고 철학적인 문제와 성경의 기본 진리, 결혼 생활이나 이혼, 동성연애와 같은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기회가 된다. 매주 목요일은 쉼의 날로서 여행도 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한다. 저녁에는 주로 간사들이 인도하는 강좌가 주 2회씩 있는데 전문적인 주제에 대한 강의, 성경 공부 등이 있고 이외에 영화나 음악 세미나 등에 참석하여 함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눈다. 주1회 기도의 날로 정하여 중요한 문제를 두고 각자 자유로이 시간을 정해서 기도한다. 라브리 공동체의 간사 가족들은 큰집에서 가족들과 공동생활을 한다. 결혼한 간사이든지 미혼의 간사이든지 모두 공동체 내에서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산다.

라브리는 일과 공부 그리고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전 영역이 하나로 회복되었고 치유된 것을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곳이다. 스위스 라브리 간사 엘리스 포터(Ellis Potter)는 "라브리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삶의 실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을 실험하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쉐퍼 박사가 유럽 선교사로 파송되어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그는 당시의 비관적인 신앙과 현실 앞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하여 심각한 재고를 하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로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팽배해 있었으며, 사상적․문화적으로 공허해 있는 당시 유럽의 상태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이 진리라면 어째서 기독교인들은 실천이 부족하며 교회는 생명력이 없고, 교회가 분열되며 대사회적으로 무기력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쉐퍼는 그러한 문제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그릇된 세계관으로부터 왜곡된 정치. 사회. 문화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고가 행동을 규정한다" 고 하면서,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 바른 믿음의 대상은 바로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 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기초로 삼을 때 비로소 바른 영성(true spirituality)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라브리의 사역은 단지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 에 관한 것이고 지성의 참된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전체성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라브리는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라브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물을 판단, 분석하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 이다. 그러한 지혜는 쉐퍼가 현실과 분리된 신학교나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강의한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손님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개신교인이건, 가톨릭이든, 보수주의자이건, 진보주의자이건, 배운 사람이건, 무식자이건 간에 마약중독자, 히피와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열린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실험되고 실천된 삶의 열매였다는 사실이다. 라브리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배움터이다. 삶 속에서 실험되는 않은 지식은 공허한 것이다. 라브리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한 개인에 의해서만 사역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헌신되고 잘 훈련된 많은 간사들과 함께 라브리 사역이 수행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의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의 문제는 바로 삶 속에서 실험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은 신학이다.

쉐 퍼와 라브리 공동체의 의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체로 믿고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메이첸의 정통보수 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입증한 것이다. 실천되지 않은 정통은 죽은 정통이다. 한국에도 신학이 삶의 전 영역에서 실험되는 라브리 공동체와 같은 신학교, 몸으로 신학을 사는 쉐퍼와 같은 신학교 교수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

베다니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이상에 충실하고자 하여 물질을 완전히 공유하며 권능있는 선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자신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베다니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 나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직도 세계의 반 정도만 복음화 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선교인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일의 시급함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우리의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43-47절과 4장 32-37절에 나오는 초대 교회를 이 시대에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오늘날 크리스챤의 삶을 사는 우리의 자발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이 일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지만 주께서 시작하신 것을 그가 완성하실 줄 우리는 믿는다. "

베다니 공동체는 1940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성 누가 루터교회"에 다니던 5명의 집사들이 가정에서 세계 선교에 비전을 가진 성경공부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세계 선교를 위한 재정 충당을 위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공동생활이 성숙해 감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더 큰 집이 필요했으므로 30여개의 방을 가진 큰 저택을 아주 헐값에 구입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공동생활과 함께 베다니 선교 훈련원(Bethany Missionary Training Center)을 시작해 선교사 후보생들을 모집해서 훈련시켰다.

계속 회원들이 늘어나자 다시 그 집을 팔고 미니에폴리스 교외로 이사해서 약 57에이커의 농장을 산 다음 2년 정도 농사와 목축을 하였다. 그 후 한 회원의 제의로 자체 내에 공장을 지어서 기업을 경영하기로 하고 목각, 가구, 장난감, 스피커 시스템을 제조하였으며 1950-1981년까지는 캠핑 트레일러를 만들어 팔아서 큰 수익을 보았다. 그래서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자체 내에 더 많은 아파트와 시설을 확충하게 되었다. 1981년의 오일 파동으로 캠핑 트레일러 제작을 중단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안도로 기독교 서적출판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 출판물을 판매한 이익은 베다니 공동체 수익의 약 90%를 충당하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의 하루는 아침 6시 아침 기도로 시작된다. 아침 7시부터 7시 40분까지 식사시간에 이어 8시부터는 선교 신학생들의 오전 수업이 12시까지 이어진다. 일반 멤버들은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공동체 회원들의 자녀는 자체 내의 공동체 학교(Community School)에 다닌다. 이곳에는 유치원, 국민학교 과정이 있어서 공동체 가족 중 아이들의 교육을 효율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오후 작업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아침에는 각자의 아파트에서 따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점심과 저녁은 반드시 다함께 공동 식당에서 해야 한다.

선교 신학교 학생들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 일반 공동체 회원들은 7개동의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정회원 모임이 있고 수요일엔 수요 예배, 주일에는 11시 대예배와 저녁 7시 찬양 예배가 있다. 이 공동체는 웬만한 단과대학 캠퍼스 넓이의 면적에 선교 신학교를 비롯해 학생 기숙사, 회원들의 아파트, 공동 식당, 체육관, 대규모 인쇄소, 1천여 명을 수용하는 교회 등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안에 공동체 가족 160여명과 선교신학교 학생 150여명을 합해 모두 300여명이 더불어 함께 사는 상당히 규모가 큰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내에는 선교 훈련원에서 발전된 선교 신학교(Bethany College Of Mission)가 있다. 학생들은 오전 4시간 동안 신학과 선교학을 공부하며, 오후 4시간은 노동을 하는데 노동은 노동학점으로 가산된다. 또한 학생들은 공동체 내의 출판사, 건축, 자동차 정비, 환경정리 등의 일을 하게 되며 학생들의 학비는 노동으로 대치된다. 학생들은 노동을 통해서 학과 시간에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는 매우 실제적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이 선교 신학교의 4학년의 과정을 마치면 1년간의 인턴쉽(Internship)이라는 선교 실습 과정을 가진다. 학생들은 베다니 선교회에서 파송한 세계의 선교 지부나 베다니 선교회와 연결된 선교 단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선교 현장 실습훈련을 받는다. 이 기간 동안에는 베다니의 재정후원 없이 믿음의 선교 방식이든지 지교회의 후원이든지 간에 학생 스스로 선교비 문제는 해결해 가면서 훈련에 임하게 되어 있다.

요즘 한국 신학교의 문제는 '학'은 있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 중심의 신학교육과 교리 논쟁은 신학교의 생명력을 상실케 하고 신학생들은 체념적인 상태에 있다. 이러한 신학교의 현상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은 교회와 사회의 문제로 직결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생활은 이러한 '학' 중심적인 신학교 갱신의 새로운 희망과 비젼을 주는 모델이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어 있으며, 기혼자일 경우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지원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공동체 가족들이 모두 기숙사와 아파트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는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예배하는 기쁨이 가득 차 있고, 능력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과 신학 교육의 병존이 가능한 삶의 배움터이다. 이러한 공동체 생활과 선교신학교를 통해서 현재 3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권능 있는 세계선교 사역을 펼치고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

미국 조오지아(Georgia)주에 아메리쿠스(Americus) 근교에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라는 공동체가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는 1942년 클래런스 조단 (Clarence Jordan)과 마틴 잉글랜드(Martin England)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이다. 원래 이 공동체의 이름은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이었다.

켄터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헬라어 원어 연구로 신약학 부문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있던 클래런스 조단은 그의 신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검증해 보기를 원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와 믿음의 실천이 가장 절실한 곳은 남부 흑인 지역이었다.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흑인들만이 사는 농촌 지역인 조오지아주 섬터 카운티(Sumter County)를 택하여 그의 몇몇 동료들과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에 세웠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모든 이들로 더불어 화평케 하며 인종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가난한 흑인들의 농촌을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실험해 볼 사역지로 백인이 전혀 살지 않는 가난한 농촌지역을 택하였던 것이다.

처 음엔 400에이커의 땅을 사서 흑인들과 함께 살고 예배하며 일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농장에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여름 성경 학교, 청소년을 위한 캠프 등 인근 지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들을 열었다.

1968년 코이노니아 농장은 코이노니아 파트너스(Koinonia Partners)라고 개명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재다짐하였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떠남으로 인류애를 상실하여 서로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대안이 되는 삶(Alternative Life-style)을 계속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역을 펼치고 있다.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사역(Low Cost Housing) : 농장 주위에 있는 가난한 흑인들의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했는데, 지난 20여년 동안 170여채의 집을 인근 지역인 섬터 카운티에 지어주었다. 여기에서 해비타트 사역이 나왔다.

인근 주민을 위한 고용사역 : 코이노니아 농장의 땅콩 농사에 인근 주민을 고용해서 그들의 생계를 구체적으로 도운다.

어 린이 양육 센터(Child Development Center) : 섬터 카운티의 아이들, 특히 학교에 가지 못해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가정에 내버려진 흑인 아이들을 돌보고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이 사역은 탁아소의 기능도 포함하여 생후 6개월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들 35명을 맡고 있다.

청소년 사역(Youth Ministry) :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으로, 방과 후 오후 세시 경에서 다섯 시까지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 사역의 목적은 그들에게 오후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놀이와 교육 공간을 제공해 주며 인근 지역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리더쉽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교육한다.

목화판 성경(The Cotton Patch Version) : 남침레교 신학교에서 신약 성경의 헬라어 원어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클래런스 조단은 촉망받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장에서 흑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부 흑인들의 정황에 맞는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복음의 본질과 신약성경의 본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약 성경의 지명과 당시의 정황을 미국 남부의 흑인들, 즉 고통당하는 소외층들의 용어로 번역본을 내었다.

1968 년 코이노니아 농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밀라드 풀러 가족이 코이노니아 농장에 와서 살게 되었고 농장은 자선기금을 만들어 인근의 빈곤층에게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 당시 밀라드 풀러는 자선기금을 통한 저소득층 주택공급 사역에 동참하면서 큰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주택 사역이 코이노니아 농장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읍내 아메리쿠스의 빈곤층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1976년 코이노니아 동역회에서 나와서 별도로 '자선을 위한 헤비타트'(Habitat for Humanity)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빈곤층을 위한 주택공급 사역을 코이노니아 농장에서 15분 거리인 아메리쿠스에 본부를 두고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사역은 80년대에 들어서 전 미국으로 확산되었으며, 80년대 후반엔 전 세계로 확산되어 국제 헤비타트 협회 (Habitat International)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 캐나다, 호주에 450개의 지회가 있으며 개발도상국 26개국에 80여개의 지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전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사실 '인류를 위한 처소 혹은 거처'라는 뜻으로 불리는 헤비타트 운동은 코이노니아의 '자선을 위한 기금(Fund for Humanity)'에서 나온 것이다. 코이노니아 농장의 창립자 클래런스 조단은 동역회로 전환한지 1년 후인 1969년에 급작스럽게 죽게 되었다. 신학박사였던 그가 약 30여 년 동안 공동체의 기초를 닦느라 겪은 온갖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단박사는 열매를 보기도 전에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코이노니아 농장을 통하여 시작한 저소득층을 위한 섬타 카운티의 주택 사역은 오늘날 헤비타트 사역으로 발전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필자도 한국 헤비타트 사역본부(사랑의 집짓기 운동)에서 사역하고 있다.

클래런스 조단이 복음의 본질을 실천하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통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을 때 그 믿음의 열매는 생전에 그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정녕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예수원(Jesus Abbey)

예 수원은 한국 및 한국교회의 쇄신과 세계 평화, 그리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의 집으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 예수원은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정신으로 '십자가 지기'를 배우고 '받기보다는 주기'를 배우는 공동체다. 또한 공동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와 같이 진정한 '코이노니아' 를 나누는 곳이다.

설 립자 대천덕 신부는 1957년 한국 선교사로 부름 받아 성공회 미카엘 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신학교 학생들에게 오후에는 노동을 하는 등 실험적인 커리큘럼을 운용하였으나 학생들의 반대로 교장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대천덕 신부는 1965년 예수원을 설립하였다. 대천덕 신부 부부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로 옮기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며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 여부를 실험해 보는 실험실을 갖기 위해서였다. 대천덕 신부는 "신앙은 과학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원 식구들은 기막힌 방법으로 지난 25년 동안 쓸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아왔다. 어떤 때는 그날 쓸 것을, 어떤 때는 일주일 단위로 필요한 것을 많지도 적지도 않을 양만큼 적당히 공급받는다. 또한 사도 바울의 자립정신을 본받아 그 동안 작물을 재배하고, 관목 숲을 쳐서 목초지로 만들어 젖소를 키우고,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일, 한 때는 양을 키워 옷을 짜고, 치즈를 만들기도 했다. 주 수익 사업으로는 분수령 목장에서 양을 키워 나오는 양모로 양털 이불을 제작하여 주문 판매하고 있으며 목각 제품 제작, 도서 및 테이프 판매 등이 있다. 예수원의 경제는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노동과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하 루 일과는 아침 5시 30분부터 6시 30분 아침기도, 조식, 오전, 오후로 각자의 분야에서 노동하며, 매일 12시에는 중보기도, 오후 1-2시, 밤10시 이후에는 침묵 시간, 주 2회의 성경공부 시간을 갖는다. 매주 저녁에는 월: 대신부님 강의, 화: 찬양에배, 수: 수요예배, 목: 은사의 밤, 금: 구역예배회, 토: 감사예배로 드린다.

예수원의 손님 맞는 사역은 중요한 한 부분이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천사 대접하듯 하라'는 정신을 갖고 섬긴다. 요즈음에는 방문객이 매년 8000명에 달한다.

현 대 도시와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산골짜기의 예수원 삶이 과소평가되기 쉽다. 그러나 예수원을 통해서 대천덕 신부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별히 대천덕 신부의 사상은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 주었다. 대천덕 신부는 성령론, 코이노니아의 신학, 희년 사상, 교회의 일치, 공동체, 기독교 대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에 '헨리 죠지'(Henry George)라는 경세 사상가와 함께 토지문제를 다루는 희년 사상을 한국교회 앞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여 보수 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경직된 성령론에 갇혀 있는 장로교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고 한국 헨리 죠지 협회(성토모), 가난한 자들의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인 헤비타트 운동(사랑의 집짓기 운동),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 전국 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전신공연) 등의 단체와 운동들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원 공동체는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제 분야를 통해 한국교회가 신선한 기독교로 갱신케 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대천덕 신부는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기만 하지 않고 공동체로 살면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그는 신학자이며 사상가이며 동시에 철저한 실천가이다. 그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자이나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매우 진보적이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대천덕 신부를 가리켜 '그는 진정한 급진주의자'(real radicalist)라고 평했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신학적인 입장은 '근본적인 급진주의'(Fundamental Radicalism)이다. 현대 기술 문명과 정치를 철저히 해부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하여 현대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쟉크 엘룰(Jacque Ellul)의 사상 역시 근본적인 급진주의이다. 대천덕 신부와 마찬가지로 엘룰도 성경을 그대로 믿는 개혁주의 토대 위에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실천하는 삶'(radical life)만이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미 타계했지만 20세기 최대의 지성인인 엘룰도 역시 프랑스 보르도에서 출감한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면서 수많은 저술로 기독교 세계관 사역에 공헌하였다. 그의 예언자적인 지성의 메시지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런 점에서 상통된다.

예수님이 제자훈련의 핵심 지침으로서 제자들에게 준 산상수훈은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의 내용이며 이 철저한 제자도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이다. 공동체적 생활방식은 세속 사회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이며 그것은 대조 사회로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사회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A Way of Life)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천덕신부는 "모든 기독교 대학들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믿음과 기도

이상 기독교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해 나가는 경우들을 살펴보았다. 라브리는 열린 공동체 생활의 현장을 통해 쉐퍼 특유의 기독교 세계관 학교를 운용, 확대해 나갔다. 코이노니아 동역회의 클래런스 조단 박사는 가난한 흑인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확대하였다. 그의 열매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망치 소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힘차게 울리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능력 있는 공동체 생활과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체재를 통해 오늘날 세계 선교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한국의 예수원은 공동체의 생활의 실험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 갱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기독교 공동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 세계관을 생활 현장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생활이다. 이론만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기 위해서 미국의 베다니 선교 신학교와 같이 총체적인 공동체 삶 속에서 학문을 하는 형태가 요구된다.

그러면 이러한 공동체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단순한 믿음과 기도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세계관을 가졌다면 그 세계관을 실천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과 출발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기독교 공동체들은 모두 단순한 믿음과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근래에 시작된 벤쿠버 세계관 대학원(VIEW)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구체적 헌신으로 실천의 단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귀한 과정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작업을 통하여 세계관 공동체가 진행될 것이다. 패트릭 존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본적인 사항이다. 기도 없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기독교 세계관)은 이루어질 수 없다. 기도는 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을 신성한 것으로 끌어 올린다. 우리가 일할 때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러한 믿음과 기도 가운데서 소수의 인원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여 그 삶의 현장을 가지고 유치원, 홈 스쿨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오늘 여기서 직접 적용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을 이루는 기독교 세계관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그 위에 그 동안 꿈꾸던 참된 기독교 대학이 설립될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편)

기독교대학 178, 179 / DEW 181호 (2001. 2) 

온전한 복음의 공동체

김 현진 목사 (사귐의 교회)

"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 롬 15:18~19

한국 교회의 세속화의 가속과 본질적인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위기 상황 가운데, 온전한 복음의 내용을 통하여 교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온전한 복음의 반대는 부분적인 북음이다. 한국 교회의 흐름들은 말씀 운동, 성령 운동, 공동체 운동, 사회정의 운동, 선교 운동 등이다. 문제는 한 가지 복음의 특정한 부분에만 극단적으로 치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인 복음에 치우친 행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막1:15). 그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온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온전한 복음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으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하셨으며,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셨고, 즉 온전한 복음의 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능력, 공동체, 정의, 선교로 요약할 수 있다. 온전한 복음의 내용으로 다른 요소들도 더 있겠으나 이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와 온전한 복음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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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말씀

하 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실행의 최종 권위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한 복음의 기반이며 출발점이다. 성경은 교회의 전통, 개인의 체험, 개인적 계시와 환상보다 우선한다. 성경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매일 당면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은 말씀의 권위를 수용하는 편이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칼빈주의의 주류 전통 위에 서 있는 한국 교회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라는 소중하고 견고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경건주의 신학자 알브레히트 벵겔(J. A. Benge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 경은 교회의 생명력이다. 교회는 성경의 후견인이다. 교회가 강할 때는 성경이 널리 빛을 발하지만, 교회가 병들면 성경은 감금되고 만다. 이처럼 성경과 교회는 다 함께 건강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다 같이 병든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성경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곧 교회의 상태를 좌우하게 된다.”

교회의 건강과 성경의 권세는 서로 맞물려 있다. 교회 생활에서 성경이 제 역할을 못하면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교회 공동체는 성경에 계시된 말씀에 충실할 때라야만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 러나 오늘날 교회의 근본적인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기이다. 교회는 말씀의 역동성을 온전히 되살려 내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을 그저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히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성육신 하신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관점과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는 복음주의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복되어야 한다.

어떤 교단과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 무오한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종교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가운데 종교 다원주위와 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교회 공동체의 가장 근본된 기초는 절대 진리의 기둥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온전한 복음의 근본적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성령의 능력

20세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기독교 운동은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 이며 최대의 성장을 보인 교파는 오순절 교파이다. 1904년 미국의 토페카라는 작은 동네에서 시작된 오순절 성령운동은 당시에는 신자가 약 1만 명이었으나 현재는 전 세계에서 3억 5천만 명의 신자를 가진 교파로 급성장했다. 교회성장 학자인 엘머 타운즈(Elmer Townes) 박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10개의 교회들 중에 네 교회가 오순절 교파에 속한 교회이다.” 라고 보고하였다.

성령운동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의 역동적인 영적 현상과 체험을 되살리자는 운동으로서, 성령 세례를 강조하며 방언, 은사, 신유 등과 같은 초월적 현상과 기적을 추구한다. 오늘날 세계교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현상은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들이 오순절 교회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딱딱한 교리보다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교회 안에서의 신앙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 현장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역동적인 능력의 삶을 선호한다.

예수님은 40일 금식 기도하신 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치유, 축사, 기적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120여명의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 임하신 성령으로 이루어졌다. 성령의 사역의 특징은 ‘능력(power)’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될 것을 당부하셨다(행 1:8), 그 권능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능력이었으며, 성령으로 제자들과 성도들도 동일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이 전통적 신학의 영향으로 이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온전한 복음이 이루어지려면 성령을 적극 환영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했는데 왜 현대교회는 이 성령의 능력을 회피하는가? 말씀 사역은 고상하고 성령 사역은 저급하다는 것은 이상한 전통이며,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저지하는 사탄의 덧이다.

성령의 역사에는 중생과 성화를 이루는 내적인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통하여 사역하는 외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다. 전자에 치중하는 흐름을 ‘내향적 성령운동’이라고 하며 침묵기도, 관상기도 같은 영성 훈련을 한다. 후자에 치중하는 흐름을 ‘외향적 성령 운동’이라고 하며 방언, 예언, 치유, 능력전도 등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주로 내향적 성령의 역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다. 침묵 기도, 관상 기도 등은 고상한 기도이고, 성령의 세례를 받아 방언으로 하는 통성기도는 저급한 기도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세계적인 개신교 자매회인 독일의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는 수도적인 영성과 성령 운동적인 영성을 모두 견지하여 침묵기도와 함께 방언기도, 예언기도와 신유의 사역도 함께 실행한다. 예수원도 두 영성을 모두 포괄하여 성령 운동과 수도적 영성을 균형 있게 추구한다.

최근 성령운동의 새로운 추세는 성령의 능력과 섬김의 사역이 통합되는 흐름이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을 견지하면서 고통 당하는 이웃을 섬기는 ‘섬김의 성령운동’이다. 이 운동은 성령의 능력과 사회 정의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회 참여의 힘을 성령의 능력에서 찾는다. 섬김의 성령운동은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서 교육과 집을 제공하고, 윤락 여성과 미혼모를 돌보며, 에이즈의 위험성에 놓인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운영하며,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며, 빈민가에서 무료진료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사회적 빈곤을 조장하는 사회 체계와 구조의 문제까지 근본적으로 다루려는 단계까지 접근하고 있다. 이전에 민중, 해방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의 문제들을 이제는 성령운동이 취급하고 있다. 섬김의 성령운동은 온전한 성령운동의 모습이다. 진정한 성령운동은 민중운동과 통합된다.

현대는 오순절 성령의 시대이다. 중국과 남미의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인 외향적인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다. 한국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초대교회의 오순절적 성령의 역사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도 내향적인 성령의 역사와 외향적인 성령의 역사를 모두 받아들여 인격과 능력이 겸비된 균형 잡힌 영성을 함양하여 온전한 복음의 교회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예배

3. 공동체

교 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가족이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the saints)’라고 정의한다. 성도의 교제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이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이 공동체가 너무 개념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만 공동체이지 실제로는 공동체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공동체는 실제 가족이 되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가족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물질까지 공유하며 진정한 사랑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도를 ‘기독교 공동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것이다. 사랑이야 말로 결국 최고의 계명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서로 사랑’은 구체적인 공동체 삶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공동체를 상실한 가운데 그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이 사랑의 공동체야 말로 온전한 복음을 회복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기 독교 공동체에는 수도 공동체, 생활 공동체, 공동체 교회 등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수도 공동체는 공동생활, 영성 수련, 독신의 삶, 생활 공동체는 공동소유, 확대 가족, 검소한 생활, 공동체 교회는 두 종류로서 기성교회 내에 일부 공동생활 그룹을 가지고 있는 경우와 일부 공동생활 그룹은 없지만 교회 지체 전체가 헌신된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는 셀 공동체 교회의 형태가 있다.

교 회사적으로 기존 교회의 세속화에 반발하여 생명력 있는 기독교를 추구하기 위한 수도 공동체와 생활 공동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탄압 받던 지하의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면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본질과 생명력을 점차 상실해 갔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수도 공동체가 등장하였으며 나중에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중세의 수도원이 이원론적 신비주의로 상당히 오염되기도 했으나, 중세 암흑기에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계승시킨 것은 일부 복음적 수도원들이었다.

복음적 수도원과 함께 교회사에서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큰 빛을 던져 준 것은 산상수훈의 철저한 실행을 통한 제자도의 확립과 사랑의 공동체 삶, 평화주의를 확립한 16세기의 재세례파 운동이다. 우리는 후터라이트(Hutterite: 재산공유 공동체), 메노나이트(Mennonite: 지역 공동체성), 아미쉬(Amish: 부락 공동체) 등의 다양한 재세례파 공동체들의 실례를 통해서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풍부한 유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하여 부패한 가톨릭에서 갱신된 기독교인 개신교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한지 70여년 정도가 지나서 유럽 대륙의 루터교회는 이미 교회의 본질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주류 교회의 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어난 갱신의 움직임이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경건주의는 지적인 교리보다는 내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며 체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중심을 두었다. 또한 기존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본질적인 공동체로 갱신하고자 했던 운동이었다. 이 경건주의 운동에의 대표적 주자들은 야곱 쉬페너(Jakob Spener), 아우구스트 프랑케(August Francke),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Nicolaus Zinzendorf), 존 웨슬리(John Wesley) 등이다.

야곱 쉬페너는 기성교회 내에서 10명 내외의 헌신된 멤버들의 정기적인 모임인 ‘경건한 모임’을 통해서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운동을 펴나갔으며 이를 통하여 기존 교회를 갱신하는 역할을 했다. 야곱 쉬페너의 제자 아우구스트 프랑케는 기독교 학교들을 세워 청소년들을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지금의 기독 대안학교 운동과 유사하다고 불 수 있다. 아우구스트 프랑케의 제자인 진젠도르프 백작은 자신의 땅에 기독교의 자유를 찾아 나선 모라비안 교도와 다양한 교파 배경의 지체들을 수용하여 성령의 역사로 500여명이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인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이 공동체로부터 중보기도 운동과 근대의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760년까지 헤른후트 공동체는 모라비안으로 구성된 226명의 선교사들을 해외 오지에 파송하였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해외 13개 지부를 통해 3,057명이 세례를 받고 6,125명이 모라비안들의 양육을 받았다.

한편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신부였던 존 웨슬리는 1735년 미국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중 폭풍우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던 선상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었다. 2년간의 미국 선교사역에 실패하여 영국에 돌아와서 그는 런던의 모라비안 교도의 집회에 참석하여 진정한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모라비안 교도의 본부가 있던 독일의 헤른후트 공동체를 두 주간 방문하여 진젠도르프 백작을 만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경험하였고 공동체 안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10여 종의 소그룹 모임들을 또한 배우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생활공동체보다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전체 영국 성공회를 갱신하고자 하였다. 주 1회 모이는 밴드(속회)는 10여명 내외의 작은 모임으로서 말씀 나눔, 죄의 상호 고백, 물질 나눔, 형제애적 교제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이 속회 모임은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삶의 능력과 수준을 기성교회 내의 헌신된 소그룹 모임 안에 안착시키고자 하는 웨슬리의 의도였다. 영국 성공회가 웨슬리의 운동을 배척하자 그 운동은 감리교 운동으로 변환되었다. 웨슬리의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운동이 바로 현대 교회의 셀 교회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셀 교회는 생활 공동체와 기성 교회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소그룹 공동체 운동이다. 우리는 비록 공동체 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기성 교회가 헌신된 제자들로 구성되어 자발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을 때 이를 ‘공동체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요즈음 이러한 교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시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을 경우 기성교회로서 건전하고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로서 교회의 공동체 됨을 이루어 나가는 교회들은 매우 바람직한 공동체 운동인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는 셀 교회였다. 그들은 한 공간에 모여 살지 않고 각자 집에서 살면서 성령의 역사로 자발적으로 물질을 나누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행 2:44~46). 공동체 신학자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 리는 특별한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를 교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신실한 제자도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주님의 임재가 분명하고 철저한 제자도를 실행하는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서로 간에 생명력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고, 또 성경에 부합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 증거를 고양하는 것이라면 어떤 유형이라도 수 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 기존 교회이건, 셀 교회이건, 가정교회이건, 공동생활체이건 모두 수용 가능한 것이다. 공동생활의 공동체가 만능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 매니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체들은 “우리는 공동체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라고 고백하며, 독일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의 창설자 바실레아 슐링크는 “우리가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만큼 지체들에게 더욱 이끌린다.”라고 말했다. 공동체의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머리이신 주님의 임재하심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현대 의 일부 셀 교회들이 셀(cell)을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도 있으나,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추구하는 셀 교회들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 운동에는 제도 교회 밖에서 일어난 교회를 갱신하고자 일어난 생활공동체 운동과 제도교회 내에서 교회를 갱신하고자 했던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운동(셀 교회 운동)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셀 교회는 생활공동체와 기존 제도교회를 연결해 하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공동체교회 운동이다. 제도 교회와 제도권 밖의 기독교 공동체 모두 예수님이 자신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그분의 몸된 교회이다. 예수님은 양자를 모두 사랑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통로로 귀하게 사용하신다. 셀 교회의 출현은 온전한 교회와 온전한 복음으로 나아가는 교회갱신의 희망적 전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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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 정의

예 수님은 누가복음 4:17~19에서 자신의 사역을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눈 멀고 눌린 자를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 레위기 25장의 ‘희년’을 말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사역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년 사역이다. 대안식년인 희년에는 50년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부채가 탕감되어 돈을 내지 않고 자기의 땅을 되찾을 수 있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다. 부익부 빈익빈 없이 모두 안정되게 살게 되고, 가난한 동포가 있으면 그를 도와 더불어 함께 생활하는 삶을 의미한다. 희년은 모두가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이루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해법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제도가 인간의 탐욕 때문에 파괴되고 말았다.

구약에서 폐지된 희년법을 예수님이 다시 선포하신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성령을 받아 내적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원하여 나누고 섬김으로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가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신약의 희년 사역이며 교회가 바로 희년 사역의 통로이다. 구약의 희년의 기능은 신약의 ‘코이노니아’로 대체되었으며 코이노니아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을 넘어서 대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원적인 나눔과 섬김으로 사회 문제를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해결하라는 신약적 인권 선언이다.

예전에 교회 사역은 복음 선포가 우선이냐, 사회 정의 사역도 포함시켜야 하느냐 라고 하는 신학적 논란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극적인 나눔으로 교회 지체들과 주변에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행 4:34)라고 증거한다. 신약 교회는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를 시행하여 본질상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교회이기에 복음 선포와 사회 정의의 구분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누가복음 4:17~19 에서 예수님의 사명 선언은 단지 가난한 자에게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므로 가난한 자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즉시 물질을 가난한 자와 나누어 희년을 실천하였다. 즉 희년을 실천하는 것은 법을 지키거나 인간의 정의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자원해서 지키게 된다는 말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7~18)”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았을 때 가난한 자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자 하는 사회정의 운동은 바로 성령과 함께 가야함을 보여준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정의 사역을 해야 할 때 균형 잡힌 인권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자는 성령의 우선적 사역 대상이다. 즉 성령운동은 방언, 예언, 치유, 축사 사역 등 능력 사역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가난한 자는 헬라어 원어로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민중(ptokos)’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은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의 요청이다. 즉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영적이기만 한 복음도 아니고 사회 정의적인 복음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영육의 문제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복음’이란 의미이다. 예수님의 이 선언 안에서 복음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 가며, 성령운동과 사회운동이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은 '총체적인 복음(holistic gospel)'의 선언이다.

성경은 빈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게으름이 아니라 불공평과 압제의 구조라고 밝힌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불공평의 희생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역사 속에 일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서 태어나서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고 고통 받는 자를 치유하셨으며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키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가난한 자 중에서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셨다. 예수님은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의 불공평과 위선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및 경제적 압제를 문제 삼으셨다(마 23:1~36; 막 12:38~40; 눅 20:45~47).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정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셨다. 참으로 의로운 교회라면 가난한 자의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 속에 있을 때에 그들을 진정 위할 수 있다. 교회의 전도와 사회 참여와 생활 방식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특별 관심사로 삼아야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들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교회는 스스로를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해야 하고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가난한 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2) 교회는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변호해야 한다(사 1:17; 58:6~7; 암 5:14~15, 24). 가난한 자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들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생업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자신의 생활방식을 점검하고 더욱 검소하고 책임 있는 생활방식을 추구해 나간다.

3)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구주와 해방자로 선포하고 알려야 한다.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삶을 통해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와 삶을 함께하면서 복음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하는 나눔의 삶은 대개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지향하고 있는 요소이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지이며, 대개의 경우 근본적인 갱신의 징조가 된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될 대에 사회 정의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하여 온전한 복음이 더욱 구현될 것이다.

사회 정의 문제와 함께 생태 운동도 부가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생태학과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생태학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아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환경을 조성하는 분야를 다룬다. 생태학은 조화로운 지구촌 가족의 삶을 위해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영적 모든 요소들이 밀접하게 상호 관계되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요청에 따라 근자 한국에 생태 공동체들이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생태 공동체들이 비기독교 공동체들이며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 사상에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들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유기체성을 더욱 함양하기 위한 기독교 생태공동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한다.

아시아 지도_39393

5. 선 교

예 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이 땅에 오셨다. 선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부과하신 지상 명령이며(마28:18~20; 막 16:15),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종적인 사역이다. 에밀 부르너가 말한 대로 “불이 타는 불길 때문에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 때문에 존재한다.” 선교에는 하나된 사랑의 공동체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심적 선교(와 보라)와 나가서 불신자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원심적 선교(가서 전하라)가 있다. 선교의 출발점은 나가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에 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진실 되게 사랑하는 한 몸의 삶을 보여주면 불신자들도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에 이끌리게 되고 또한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한지 호기심을 갖게 된다. 바로 그때 사랑의 공동체 삶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줌으로서 예수님을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사랑의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공동체 삶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랑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구심적 선교의 삶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구심적 선교를 이룰 정도의 수준은 아직 미미하다.

또한 나가서 직접 불신자에게 복음을 외치며 전하는 원심적 선교도 병행해야 한다.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하면서 이웃 주민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도 균형을 잃는 것이다.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상하고, 입으로 복음을 외치는 전도는 저급한 행위라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는 희생적인 공동체 삶으로 350여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 하지만, 인근 지역에 나가서 거리 전도와 축호 전도도 실행하고 있다. 120여 년 전 미개함과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조선에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셀러 등의 선교사들이 조선이라는 먼 나라까지 와서 복음을 입으로 직접 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현재 선교사들을 통한 복음의 서진 운동은 70년대의 중국, 80년대의 러시아, 90년대의 중앙아시아, 2000년대의 페르시아, 현재 아랍 등의 지역들을 강타하고 있으며 유대인 복음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국교회가 특히 해외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세계복음화에 앞장서는 선교대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해외선교를 통한 주님의 지상 명령에 한국 교회가 적극 참여 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온전한 선교가 되기 위해서는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를 균형 있게 실행하여 ‘온전한 선교’를 펼치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한다.

종합적으로 진단해 볼 때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는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중생과 성화를 강조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에 치우쳐 있다. 공동체에 관해서는 셀 교회 운동이 일어나 교회 공동체성 향상에 약진이 있었으나 셀 교회 운동은 대게 교회 성장의 방편에 기울어져 있다.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일부 생활 공동체의 양식에 치우쳐 있어 한국의 기존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사회 정의의 추구 역시 취약한 단계이다. 선교는 원심적 선교인 해외선교는 강점을 보이나 구심적 선교는 미미한 단계이다. 말씀, 성령의 능력, 사랑의 공동체, 사회 정의, 세계 선교라는 요소로 이루어진 온전한 영성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교회는 아직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는 말씀은 강조하나 성령의 능력은 외면한다. 선교에는 적극적이지만 사회정의 사역에는 소홀하다. 구제는 강조하나 전도와 선교에는 소극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각 교파와 교단의 신학적 경향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원의 고 대천덕 신부는 이를 두고 ‘분열된 복음의 재난(Disaster of the Fragmented Gospel)’ 이라고 표현했다. 서로 교파의 상이한 신학적 노선이 온전한 복음의 추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선교 사역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이 예루살렘에서 일루이곤(현재의 알바니아) 지방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말(word)과 행동(work)과 표적과 이적(wonder)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롬 15:18~19)

말 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전파하는 것이며, 행동은 이웃을 섬기는 다양한 일이며, 표적과 이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기적적 사역을 말한다. 바울이 바로 총체적인 복음의 내용으로 사역했음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총체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발칸 반도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총체적인 복음으로 사역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에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고 한국 교회를 이끌고 나가야할 사명을 지닌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온전한 복음의 영성으로 균형 잡혀있을 때에 한국교회 갱신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Reba Place Fellowship)는 말씀을 순수히 믿으며, 관상기도와 함께 방언, 예언 등 성령의 능력을 통한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하면서, 도시에서 공동소유, 공동생활의 공동체와 지역 교회의 역할을 겸하는 공동체 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아가 교회 주변의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한 다양한 구제와 인권 신장을 위한 사역들을 활발히 펼침으로서 사회 정의적인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또한 해외 7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선교 사역에 동참한다. 이로서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는 균형 잡힌 영성을 추구하는 온전한 공동체의 모델로서 미국과 전 세계의 공동체운동을 선도하고 있다. 1992년 제 2회 공동체 세미나 시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의 대표 버질 보트(Vergil Vogt) 목사를 주강사로 초청하여 온전한 복음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풍미를 접할 수 있었다.

이 시대는 말씀 운동과 성령 운동이 만나고, 내향적인 영성 운동과 외향적인 성령 운동이 소통하며, 사회정의 운동과 오순절 운동이 합력하며,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 방식이 함께 시행되는 균형 잡힌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이 형성되는 영적 호기이다. 현대는 교파와 교단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제도 교회와 선교단체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서로 융합하여 본질적 교회가 출현될 수 있는 2,000년 교회사 사상 교회의 봄날을 구가할 수 있는 카이로스의 때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재림 전에 있을 성령의 늦은 비의 역사의 때가 세계 복음화 운동과 함께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안에 개체주의와 편협하고 배타적인 영성, 생존 지향적 태도를 깨고 균형 잡힌 온전한 복음으로 회복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할 때에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힘 있게 이 땅 위에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Reba Place Fellowship1

맺는 말

예 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를 드리면서 예수님은 네 번이나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즉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하나이듯이 제자들과 앞으로 예수 믿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거하도록 기도하셨다.

기독교 공동체는 갈라진 교단과 교파들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는 열린 만남의 장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일치 사역의 중재자이며 매개체 역할을 한다.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교회 갱신의 샘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한국 교회의 영적 나침판과 희망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한국 교회는 어디서 교회의 소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타인을 위해 나누고 섬기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서로 하나 됨을 이룰 때 진정한 교회갱신 사역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예수님이 피를 토하며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중보기도에 부응하여 서로 하나 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일치’ 사역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회복을 위한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온전한 영성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 된 모습을 이룰 때, 혼란한 한국 교회는 교회와 복음의 본질인 일치된 공동체 운동을 주목하고 올바른 방향을 잡게 될 것이다.

온전한 복음의 온전한 공동체 운동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 1700년대의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가 경건주의 운동의 요람이 되고 근대 세계 선교운동의 효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선교를 위한 ‘100년 연쇄중보기도 운동’ 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른후트 공동체에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 공동생활의 공동생활, 자체 셀 모임, 교회갱신, 지역 구제사역, 해외선교 등 총체적인 복음의 요소를 거의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24시간 쉬지 않고 100년 동안 한 중보기도에 그 비밀이 있다. 우리가 일할 때에는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한국교회가 바울이 말한 ‘영광스러운 교회’(엡 3장)가 회복될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쉬지 못하시게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사 62:7).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금식 기도로 시작되었고, 매일 기도로 사역을 온전히 수행하시고. 최종적 십자가 사역도 겟세마네의 기도로 완수하셨다. 성령의 강림과 교회 탄생도 제자들과 성도들의 합심 기도 모임으로 이루어졌고, 안디옥 교회를 통한 세계 선교도 합심 금식기도 중 이루어졌다. 예수님도 기도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맡기신 사역을 모두 이루셨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모든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연합하여 중보 기도하는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러할 때에 연합된 중보기도를 기반으로 하여 온전한 복음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운동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