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조 목사
기 독교는 출발부터가 공동체였습니다. 오순절날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은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의 임재는 개인에게 임한 사건이 아니라 120명 무리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하나되어 말씀 안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가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또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가 순전한 마음을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보여준 성령공동체로서의 교회였고 오늘날 현대교회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히 유감스러운 일은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 공동체와는 정반대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을 띤 교회로 탈바꿈했고, 일치하는 교회에서 서로 물고 뜯으며 분열하는 교회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변질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각한 영향력을 주게 되어 공동체의 지체로서의 성도라기보다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도로서 모습이 굳어졌습니다.
결국 교회나 세상이 그 본질과 모습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고 크리스천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구별이 업어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갱신이나 변혁은 바로 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곧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 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뜻은 바로 크리스천들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속에 그의 나라가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그 사명을 다 감당하고 그 본질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예배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영과 진리로 예배 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는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짓 예배와 참된 예배의 차이입니다. 우리들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개인적인 예배와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예배 속에서 진정한 예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 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예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가 말입니다. 주일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새벽예배, 가정예배 등 온통 예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예배의 경험이 없이 반복되는 형식 안에서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진정한 예배 속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발견되고 이웃이 발견되고 자신이 발견되는 법입니다. 살아있는 성령의 움직임이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고, 경배와 찬양을 통하여 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은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대교회가 회복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좀더 여적이고 경건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사귐의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체험하고 진정한 형제 됨을 인식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서 먼저는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받고 기도를 나누는 영적인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서로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한 형제 됨을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반드시 이러한 사귐 공동체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만남이 있고 회의가 있고 프로그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허전하고 외롭고 무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이요, 참된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귐 속에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무력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도 환희와 감격과 기쁨이 넘치고, 비록 부유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진정한 성령의 위로와 축복이 강처럼 흘러 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건물도 화려하고 교인도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헌금도 풍성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외롭고 허무하고 무력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진정한 사귐이 없는 현대교회는 자기의 겉모습만 자랑하고 있지만 실상은 헐벗은 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필사적으로 탈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인간화하고 형식화하고 제도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용감하게 탈출하여 진정한 사귐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감격과 눈물이 있고 진정한 위로와 용서가 있으며 새롭게 거듭나고 태어나는 진정한 만남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나눔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초대교회는 예배 공동체였고 사귐 공동체였지만 동시에 나눔 공동체였습니다. 성령 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서 풍성한 교제를 나누고 영적인 놀라운 체험을 했을 때, 그들 안에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나눔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소유한 물건을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기 시작했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나 눔이란 자기 욕심으로부터 탈출이요 자기 성취와 성공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나눔이란 자기해방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기적입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을 했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신원을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멸시 받고 천대 받는 자의 옆에 계셨고 그들의 친구요 위로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교회가 닮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해야 하며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울고 웃어야 하며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나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피눈물 나는 반성과 회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고 있는가? 과연 오늘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나눔 공동체의 모습으로 존재하는가?”라고 자기 스스로 질문해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가 이 땅 위에 세워지도록 함께 교회는 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경제 정의와 함께 분배 정의에 대해서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듣습니다. 특별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갈등의 벽이 심각한 오늘 우리 사회 현실에서 생각할 때 그것은 설득력 있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개념에서 볼 때는 분배라는 말보다는 나눔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모든 것을 공정하게 나누어야 하고 골고루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해야 하지만 이러한 분배 정의가 자의적이 아니고 물리적이거나 강압적일 때는 분배 정의 정신 자체가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배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것을 최상의 목표로 생각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추구하는 분배 정의와는 정반대로 권력을 독점하게 되고 사회경제를 파국으로 이끈 것이 오늘날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날에서 예외 없이 발견되는 현상이 아닙니까? 이 지상에 분배 정의를 목표로 했던 모든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체제가 예외 없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분배 정의 실현에 있어서의 실상과 허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배가 아니라 바로 나눔(sharing)이라는 원리입니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가 사도행전 2장 43~45절에 나타납니다.
“사 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인류 역사상 자기의 소유와 물건을 자진해서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기쁨으로 나누어 준 사건은 여기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밤 성령강림 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나눔의 공동체(sharing community)이며 이것을 원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에게 분배 정의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사회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분 배 정의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입장과 기득권층과 가진 자의 입장이 전혀 다릅니다. 못 가진 자의 입장에서 분배 정의란 나도 가져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생존권이요 인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편 기득권층이나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분배 정의란 자기의 재산이나 소유를 강제로 빼앗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더욱 더 재산 보호의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게 됩니다. 여기에 극한 투쟁과 악랄한 착취의 대결과 갈등이 계속 됩니다. 특별히 분배 정의가 물리적인 강압의 힘으로 작용했을 때 더욱더 부작용은 커지게 되고 경직된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나눔 공동체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요 물리적인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성령의 감동을 입어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그 필요에 따라 나눠 준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분배 정의가 하나님 나라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자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완전한 분배 정의는 인간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분배 정의를 생각할 때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눔의 본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소유와 착취의 본질을 가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나눔의 차원에까지 도달하려면 결코 세상적인 방법이나 제도나 이데올로기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의 소유와 재산을 팔아서 남을 도와 줄 정도로 성숙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았을 때 자진해서 나눔의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나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크리스천들은 근본적으로 나눔의 삶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받은 교회나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세상 속에 뛰어 들어 나눔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속에서 이러한 빛과 소금의 주체로서 교회가 존재할 때 이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갖게 될 것입니다.
나눔의 공동체는 곧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나눔의 공동체는 곧 예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 동안 세상의 필요를 외면한 채 교회당을 짓고 교육관을 짓고 기도원을 짓고 장례지를 만드는데 정신을 쏟아 왔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와 나누는데 신경을 쓰지 못하고 더 가지고 부하려는데 신경을 썼고 성장하고 기적을 일으키려는데 정력을 소비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부흥했고 성장했지만 반대로 세상은 더욱 타락했고 가난해 왔고 더욱 악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왜 일천만의 기독교인이 있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라는 자문을 합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교회가 비만증에 빠진 반면에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과 나눔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삶은 거창하거나 굉장한 영웅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냉수 한 그릇을 소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는 스스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대담하게 세상에 내놓아야 합니다. 돈도 내놓고 사람도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을 때 결코 크리스천들과 교회만을 위해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 스스로가 이기적 집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헌신을 강요했다면 교회도 세상에 대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약 교회가 나눔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이 민족은 순식간에 풍요롭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로 변화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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