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제자도와 제자훈련

방선기 목사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별로 쓰지 않던 제자훈련이란 용어를 요즈음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 일단 전통적인 목회, 전통적인 교육에서 탈피하고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의미에서는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이 용어가 그저 현대교회의 유행어에 그치게 되어버릴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자훈련의 교육적인 면이나 실용적인 면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이것이 성경적인 개념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훈련의 목표 혹은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살펴본 다음 제자훈련의 성경적인 기초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Ⅰ. 제자도의 배경

제자훈련이란 말이 보편화되었지만 사실 이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르친 사실을 보고 제자훈련을 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제자에 대한 정의와 함께 예수님이 의도했던 제자도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구약시대의 제자도, 당시 헬라의 제자도, 당시 유대사회의 제자도에 대해서 차례대로 알아두는 한편 초대교회 이후로 제자도에 대한 이해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1. 구약에서의 제자

구약(칠십인경)에는 신약에서 사용된 '제자(mathetes)'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단지 이 단어와 상응하는 히브리어인 '탈미드(talmid)'가 역대상 25장 8절에서 발견될 뿐이다(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를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렝스토르프(Rengstorf)는 제자라는 단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개념 자체도 구약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흔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나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도 사실 신약적인 의미의 스승과 제자의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제자라기보다는 옆에서 수종을 들던 종의 위치에 있었으며(수 33:11), 엘리사 역시 엘리야의 제자라기보다는 종이라고 했다(왕하 3:11).

그러나 요세푸스는 엘리사 자신이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한 것을 제자도의 결단으로 서술했으며(참고 왕상 19:19~21), 엘리사가 엘리야의 모범을 따른 것은 스승과 제자의 진정한 계승의 관념으로서 이사야를 비롯한 다른 예언자들에서도 나타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자들 가운데 봉함하라(사 8:16~18)"는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승하는 일에 있어서 제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물론 구약성경이 말하는 이러한 제자도가 신약에서 말하는 제자도의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실례들을 볼 때 적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구약에 나타난 인물들이 보여준 제자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2. 헬라 문화에서의 제자도

헬라어로 제자(mathetes)란 말은 어떤 영역에서든지 선생(didaskalos)을 모시고 있는 학생을 가리켰다. 그 일이 옷감 짜는 일이든지, 악기 부는 일이든지, 의술이든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얻기 위해 선생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제자화 과정에서 서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제자가 된다는 말은 공식적인 관계를 벗어나서 오히려 내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로 말미암은 실제적인 결과가 제자가 되는 일의 핵심이 되었다.

특히 헬라 철학자의 제자는 선생이 이야기한 가르침을 기억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생활양식을 본받음으로써 배웠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말보다 그의 성품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했다. 또한 많은 철학자를 길러낸 에피쿠루스도 교실을 통해서보다 한 지붕 밑에서 공동생활을 통해 제자들을 키웠다고 했다. 즉 제자는 생활의 모든 영역이 그가 모시는 스승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생활을 함께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되며(막 3:13~19)이들이 보여준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스승의 영향력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제자의 내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수님의 제자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에게 예수님이 기도하는 대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러나 역시 헬라 철학 선생들에게 제자들이 충성했던 근거는 선생들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대표하는 생각(idea)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헬라 문화에서 제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무래도 스승이 대표하며 그가 전하는 사상이었다. 이런 강조점을 예수님의 제자도와의 차이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3. 유대사회의 제자도

마이클 그리피스는 유대사회 안에서 헬라의 문화적 제국주의와 부딪히면서 유대의 동질성을 지키려는 투쟁이 있었지만 헬라 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랍비-제자의 관계의 어떤 측면은 헬라의 스승-제자관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즉 랍비(rabbi)는 선생(didaskalos)에 해당하고 탈미드(talmid) 는 제자(mathetes)에 해당했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 선생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면에서 공통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스승의 말씀들을 배웠을 뿐 아니라 생활방식도 배웠다(막 2:18). 제자들은 스승이 앞에서 걷거나 나귀를 타고 갈 때 그를 문자 그대로 따랐으며 또한 도덕적으로도 따라서 행했다. 심지어는 벤 아자이란 제자는 그의 스승인 아키바가 용변을 하는 모습까지 본받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랍비주의의 강조점은 역시 토라였다. 제자들이 스승을 따르는 궁극적인 목적은 스승 자신이 아니라 그 스승을 통해 토라를 알고 지킴으로써 의(義)에 이르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제자도와 차이로 지적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흥미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제자들이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정신은 토라를 배우려는 탈미드와 랍비 사이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대사회는 강조점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사회 전반에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겉으로는 당시 사회에서 아주 보편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도의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Ⅱ. 예수님의 제자도

예수님은 헬라 문화권에 있었던 유대사회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이들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의 제자도가 당시 헬라 철학자들이나 유대종교인의 제자도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다. 특히 제자들이 스승의 모범을 따른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도를 이해하면서 또한 다른 제자도에 비해 예수님의 제자도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면을 찾아보도록 한다.

1. 예수님의 주도권

유대사회의 제자도와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유대교 랍비의 제자들은 선생들과 그들에 따르는 규칙을 연결시킨 다음 그것을 지키는 것을 자기 의로 삼았는데 비해 예수님 제자들의 경우는 주도권이 철저히 예수님에게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자기가 그들을 택하여 세웠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까지 했다(요15:16). 물론 예수님을 그 당시 선생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따라다닌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이해관계를 따라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는데 바로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자기에게 속한 제자의 여부를 결정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요6:60이하).

2. 인격적인 관계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철저하게 인격적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말씀이 갖는 구속력은 제자들의 헌신이 바탕이 될 때 의미가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도 그가 준 강하고 직접적인 인상 때문이었다. 강조점은 항상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베드로에게 미친 내적인 영향이었다(눅 5:1).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단순히 그의 가르침만을 전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눅 24:48). 이것은 랍비들을 찾아온 탈미드들이 랍비의 지식과 방법에 매력을 느끼고 모여들었던 것이나 헬라철학의 스승을 찾는 제자들이 그들의 사상에 매료된 것과 대조가 된다. 랍비와 탈미드와의 관계는 랍비의 지식이나 능력에 대한 존경심에 좌우되는데 비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그에 대한 믿음에 좌우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예수의 모범

택함을 받아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원했고, 또 제자들이 실제로 보여주었던 제자도의 기본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았다는데 있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예수님만의 독특한 제자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제자들에게 원했던 모범은 독특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인간 예수 이전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바로 제자도의 핵심이었다. 성품이나 행동에서는(마 5:48)물론 사역에서(요 5:17),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을 닮고 그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었고 예수님은 생애를 통해서 그 본을 주셨다(요 15:9~10, 요일 3: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순히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의 본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이다.

4. 철저한 헌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이다(막 1:18, 20).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기에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랍비 학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아키바라는 랍비는 자기를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토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결혼과 자손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요구한 내용은 비슷하나 그들의 권위는 그들이 가르치는 토라에 있는데 비해 예수님은 그의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명령했던 것이다. 이때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게 순종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종으로도 비유되었던 것은(마 10:24, 요 13:16, 15:20) 유대주의에서는 낯선 일이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입성 때 사용하기 위해서 나귀를 찾아오라고 했던 것이나 만찬을 준비하도록 한 것은 그 당시 랍비 세계에서는 별로 없었던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른 랍비들과는 달리 메시야인 것을 증거하는 좋은 예가 된다. 탈미드들이 랍비에게 배우는 것은 더 배우기 위한 일시적인 준비단계인데 비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더 나은 것을 약속하는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탈미드의 목적은 토라를 완전히 공부하는 일인데 비해 제자들의 일은 예수님에게 인침을 받은 후 그의 뜻대로 형성되는 것이었다.

5. 절대적인 순종

흔히들 예수님이 제자들과 토론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박을 해서 토론을 벌인 적은 없다. 예수님의 토론은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반박하는데서 시작하곤 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로 듣기만 했으며 다만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 질문했을 뿐이었다(막 4:10),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의지로써 받아들이는 일이었다(마 7:2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에 대한 사랑은 바로 자기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요 15:10). 예수님의 제자도는 대화를 통해서 잘 깨닫는데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명하는 일에 순종하는데 강조점이 있었다.

6. 고난에 동참

헌신과 순종은 쉽게 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일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고난을 당하는 길이다. 고난에 대한 경고는 열두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경우도 있지만(마10:17, 요15:18, 16:1)제자 일반에게 주어진 경우도 있다(막8:34, 죽14:26).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강조한 것이나(벧전 2:21)바울이 강조한 바(빌 1:29)가 다 크리스천의 고난이었다. 고난의 영역이나 강도는 사람이나 시대에 따라 다를지 모르나 고난을 기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도의 핵심이다.

7. 사역자로 부르심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와 함께 일을 나누어 할 사람을 부르셨다(마 4:19).단순히 제자들의 마음만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일을 맡기시기 위해 함께 지내면서 그 일을 담당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고, 계속되는 과정을 통해 일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 것이다. 그가 마지막 제자들에 게 남긴 말은(마 28:19, 막 1615, 행 1:18) 결국 그가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했던 말과 똑같았다 "부려먹기 위해 키운다" 표현이 거칠게 느껴지기는 히지만 예수님의 제자도를 표현하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8. 제자들의 공동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인격적인(personal)만남으로 시작이 되지만 개인적인(Private, individualistic)관계에 머물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동안 생활하시면서 삶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 공동체는 나중에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이 공동체는 초대교회에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모습으로 구체화되었으며(행2:4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해서 가르쳤다(롬 12:4~5). 예수님의 제자도는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면서 그 교회공동체가 그의 존재와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해야 할 것이다.

9. 제자들의 다양성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역사에 참여한 자로서 구성요소에 있어서 당시 다른 그룹들과 대조가 된다. 대부분의 제자 그룹은 구성원이 동질성(homogeneity)이 있었는데 비해 예수님 제자들은 아주 다양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보다 배반할 것을 알았던 유다를 제자들의 공동체 속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제자들 가운데는 열심당원과 세리가 함께 있었으며 헬라 이름과 유대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렸고 유대와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함께 지냈다. 이 구성요소를 볼 때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 당시 유대사회의 축소판이었다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구성요소는 그 당시 헬라 철학자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다양성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그로 말미암은 부정적인 결과를 감수하셨던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제자들을 훈련할 때 성경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말한 제자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가 없이 제자훈련에 시작하게 되면 모르는 사이에 세상 교육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 철학원리를 따라 훈련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성경구절을 삽입하더라도 성경적인 교육이나 훈련에서 멀어지게 된다.

Ⅲ. 교회사 속의 제자도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초대교회의 들어서면서 많은 서신서에서는 형제, 성도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됨에 따라 제자라는 말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1. 사도행전

사도행전에서 "제자"라는 말이 사용된 것을 보면 예수님과 개인적인 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크리스천을 가리킨다. 예수님과 개인적인 접촉이 없었던 디모데를 제자로 부른 것이나(16:1)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가 결신하게 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른 것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13:52, 14:20, 18:23), 그 밖에도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으로 말한 경우가 많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는 말(6:7)은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말이며,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이 제자인 것을 믿지 못했다는 말은(9:26)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는지를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제자가 일반신자들과 구별되어 사용되지만 사도행전에서 제자는 곧 신자였다. 이것을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연결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그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적인 접촉을 하지 못한 사람들일지라도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 때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행전에서는 제자와 성령의 임재와의 관계를 강조한다(행 9:17, 13:52, 19:1, 21;4). 비록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그의 제자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2. 그 이후의 제자도

한편 헬라 세계에 있던 크리스천들은 신자를 제자와 같은 것으로 보게 될 때 그 당시 제자에 대한 헬라적인 이해와 혼동되어 기독교 신앙이 또 하나의 철학적인 흐름에 불과하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단어를 헬라 세계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초대교회에 보내진 편지들 속에서 제자란 단어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3. 제자도의 변천

초대교회에서 아무런 헌신이 없이 지적으로만 따르는 헬라적인 제자상이 침투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개념으로 극단적인 제자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이그나티우스에서부터 생겨 순교자를 "그리스도의 진리의 제자"라고 불렀다. 4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은둔해서 지내는 교부들 사이에서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무혈의 순교자"라고 부르면서 그런 삶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예수님의 가난을 그대로 따르려는 극단적인 제자도를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요구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들은 성경적인 제자도를 강조한 것이지만 제자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신자들로부터 제자도를 멀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유명한 실존주의 신학자 키에르케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 생각해 심지어는 그 당시 기성교회가 진정한 제자도의 길에 방해물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서는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성경의 제자도를 기독교 신앙의 회복이란 측면에서 강조하면서 당시의 독일교회를 향해 도전하였다.

이러한 도전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1974년 로잔에서 열렸던 국제복음화대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책임과 관련해서 성경적인 제자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여러 각도에서 성경적인 제자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게 되었다.

Ⅳ. 제자훈련의 기원과 역사

제자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러한 제자들을 만드는 제자훈련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해보아야 한다. 제자훈련에 대한 성경적인 기원을 찾기 위해서 제자(mathetes)의 동사형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동사형인 ‘matheteuo’는 성경 밖에서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타동사로 사용되어 '제자로 만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마 13:52, 28:19, 행 14:21) 이런 용법의 배후에는 제자도로 인도하는 부르심을 기초로 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 삼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명명(마 28:19~20)의 명령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도날드 맥가브란은 제자 삼는 일을 복음전도와 거의 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그 일과 제자 삼는 일은 분명히 구별된다고 했다.

사도행전 교회에서 제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차원에서 보면 제자 삼는 일이 그렇게 정의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도 차원에서 보면 제자 삼는 일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 나오는 신자를 만드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캐나다의 교회성장 전문가인 테니스 올리버의 정의가 더 접근한 것 같다. 그는 제자 삼는 일은 회심자가 처음부터 제자 됨의 값 지불을 깨닫고 자신을 무조건 복종으로 헌신하는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나타내도록 만드는 정의했다. 제자도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히 옳다고 생각되나 성경 자체가 전도를 받은 단계와 계속되는 성장의 과정을 인정하는 것과 또 실제로 세례 받는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헌신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이 둘 사이에 단계를 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둘 사이에 구별된 단계를 두면서 제자 삼는 일을 전도 이후에 성숙된 크리스천으로 훈련하는 과정으로 정의한 월드론 스코트의 정의에 공감한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어떻게 정의하든 성경은 제자훈련에 대한 그 이상의 지식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제자훈련의 실례들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초대교회 이후의 역사에서도 역시 제자훈련이란 말을 별로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훈련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크리스천들을 훈련시켜왔다. 아마도 3~4세기경에 처음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까지 2년 혹은 3년씩 훈련을 시켰던 "학습학교 (Catechumenal School)"는 이름은 달리 붙여졌으나 결국 제자훈련과 같은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교회사 속에서 성경 속의 제자훈련과 현대의 제자훈련을 잇는 제자훈련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런 훈련과정 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종교 개혁 이후에는 요리문답 공부가 나타나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제자도에 대한 이해가 사라짐과 같이해서 성경적인 의미의 제자훈련은 교회에서는 점차 사라져갔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제자도의 회복과 때를 같이하여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60년대 이후로 한국교회에 소개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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