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목사(공동체 코이노니아 하우스 대표)
구속사는 세속사의 중심이며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문제는 바로 교회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문제의 해결점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동반자적으로 부패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의도하신 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지 교회의 본질을 먼저 살펴보고 이 본질적인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세계관 운동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 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성도의 교통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고백했던 용어였으며,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을 때 그들도 역시 '교회란 성도의 교통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성도의 교통'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하나된 몸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성도의 교통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들 간에 서로 하나되어 교제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성도의 교통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삼차원의 코이노니아
코 이노니아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를 교제(koinonia)케 하시고, 성도들 간에 서로 영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교제케 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도들끼리만 아니라 교회 밖의 고통 당하는 이웃과도 교제토록 하셔서 더불어 함께 살도록 하신다. 즉 성령은 수직적 코이노니아, 수평적 코이노니아,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의 삼차원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신다. 이 삼차원의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것이 본질적 교회이며 온전한 공동체이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된 신약교회의 공동체 됨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며 전 생활적인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세례를 받자마자 속사람이 변하여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으며 자원해서 물질을 나눔으로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행 4:34). 이뿐 아니라 대사회적으로는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온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즉 초대교회의 '성도의 교통'은 결코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제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가시적인 공동체성'(可視的 共同體性)이었다. 교회의 핵심은 온전한 교제(Koinonia)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부패한 심령에 오셔서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됨'(oneness)을 이루신다.
성도들 간의 수평적인 코이노니아에는 영적인 교제, 정신적인 교제, 그리고 물질적인 교제의 세 차원이 있다. 영적인 교제는 성도들 간에 기도로서 영교하는 것과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것이다(요일 1:3, 빌 1:4). 정신적인 교제는 지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서로 위로, 권면, 격려하는 태도로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 지체를 세워주는 정신적인 차원의 교제(빌 2:1-2, 고전 12:26, 롬 12:15), 그리고 지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말로서만이 아니라 필요한 물질로 채워줌으로써 한 몸의 삶을 실제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물질적인 교제가 있다.
" 믿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으로써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행 2:44-45, 4:32)라는 사실은 물질적인 교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원래 코이노니아라는 헬라어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할 때 쓰는 상업적인 단어였으며, 또한 친척이 아닌 '직계 가족'의 관계를 나타낼 때 쓰였던 단어였다. 물질을 공동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란 이렇듯 '예수 새 가족'(Jesus new family)이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영적, 정신적인 교제만 아니라 필요한 물질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집단 이기주의를 좇아 예수 믿는 자들끼리만 아름답게 삶을 나누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교제가 아니다. 온전한 코이노니아는 기독교인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역사회 속에 있는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삶을 같이하는 영역을 포함한다. 코이노니아의 더욱 깊은 신학적인 의미는 구약 희년의 신약적 구현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희년은 50년마다 땅과 집과 몸에게 자유를 선포하여 토지반환, 노예해방, 부채탕감이 되게 함으로써 토지독점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영구적 부익부 빈익빈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경제법이었다.
예수님은 눅 4:18-19에서 새로운 희년(은혜의 해)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결과 코이노니아의 역사를 통한 교회공동체의 자원적인 나눔과 섬김으로 지역사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다 담당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하여 이뤄지는 새로운 차원의 희년(자원의 희년)이다. 구약의 희년은 신약에서 코이노니아로 대체된다. 즉 교회라는 공동체는 구약 희년의 의미를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지역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기관이다.
공동체성이란 교회 내적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영적, 정신적인 교제만 아니라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교제를 실천하여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것이고, 교회 밖으로는 주위의 필요를 채우면서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초대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나그네가 있으면 집으로 영접하여 돌봐주었으며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그를 돕기 위해 그들은 이삼일은 금식하였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가 실제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것을 교부들은 전해준다. 이러한 구제는 곧 사회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회 선교의 발판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연속성
성령 강림으로 형성된 초대교회 공동체는 신약 최초의 공동체였고 모든 공동체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통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 됨에도 불구하고 늘 제기되는 의문은 과연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 형태가 계속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령이 최초로 강림하심으로 가능한 일시적인 공동체였으므로 잠시 후 성경에서 곧 사라졌으며, 그것이 소비적인 공동체였으므로 발전된 현대교회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는 신학적인 반론이 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사도행전 2장과 4장 이후에도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사가 여러 방면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초대교회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는 획기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행 2:37-47).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강림 후 개인의 소유형태는 여전하였지만 소유에 대한 의미와 태도가 변화되었다. 성도들은 재산을 소유하되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 소유(common ownership)'의 형태로 바뀌었다(행 2:42 -47). 그것은 소유를 자발적으로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이것은 최초의 강력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돌발적이고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후 계속 실행된 것이었다. 사도행전 4장 32-35절에서는 이러한 공동소유의 실천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 공동소유의 실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만 실천된 것이 아니라 신약의 여러 교회에서도 계속 실행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 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써라"(롬 12:13)고 말한다. 여기서 '공급하다'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코이노니아 즉 공동소유를 실행하라"는 말이다. 즉 필요하다면 내 것도 그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공동 소유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공동소유의 형태가 로마 교회에서도 일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동소유적 삶의 확장은 마케도니아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연보하여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koinonia)한 경우에서 나타난다(고후 8:1-14). 연보는 "유여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한다"(고후 8:14)는 것이다. 이 연보란 바로 '코이노니아'의 정신이었다. 연보는 단순히 예배시의 헌금이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 삶에서 '물질적인 교제'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이었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유무상통하던 습관은 교회의 박해와 여러 지역으로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한곳에서 '共有'하던 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지역교회 간의 형제애적 '共用'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 삶이 그 후에도 작은 가정교회 공동체의 형태로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로 인해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원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두세 가정이 작은 한 단위가 되어 서로 자연스럽게 전인적인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성전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행 2:42-47).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나자 그 당시 그러한 공동체적 삶을 살고 있던 일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가지고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6:1-3). 성도들은 흩어진 장소에서 몇몇 가정들이 뭉쳐 작은 공동체들을 형성하여 가정교회의 역할을 해 나갔으며 코이노니아의 삶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빛과 소금의 삶으로 영향력 있는 선교사역을 해 나갔었다. 이 작은 단위의 공동체들은 후에 바울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 바울이 선교 거점으로 사용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란 바로 이러한 평신도들의 작은 공동체의 한 예이다.
바 울의 신앙 변증서인 로마서(16:5)에서도 바울은 로마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언급하고 있고 이외에 골로새서(4:15)와 빌레몬서(2절)에서는 라오디게아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와 골로새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 형태의 작은 공동체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러한 작은 공동체들이 로마 제국 전역에 두루 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로마의 압제 속에서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의 역사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삶으로 보여주는 복음이 그 요인이었다. 그들의 공동체 삶은 공동소유만 아니라 지체의식과 형제애, 그리고 서로 간의 자발적인 섬김이 있었다. 사도 바울 시대 이후에 들어서서 교부 저스틴(Justin Martyr)은 그의 저술 <변증>(Apology)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라,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유행어가 붙여졌다고 전해준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하의 각 지역에서도 공동체적 삶을 계속 유지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스틴은 또한 당시 성도들의 공동체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무엇보다도 부와 소유의 획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우리들이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내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공동소유하고 있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하면서 우리의 동족이 아닌 사람들과는 생활습관이 달라서 한번도 공동 유대를 이뤄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후로 이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산다."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형제 관계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 계속 살아 있었다. 바울의 경우 '성도들'이란 서로 돌아보는 형제애를 가진 '공동체'의 동의어였다(롬 1:7; 16:15; 고전 1:2; 빌 1:1; 4:22). 저스틴은 이러한 '성도들' 의 삶을 또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부유한 자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헌납을 하고, 그렇게 모인 것이 성찬식 집행자에게 전달되어 고아와 과부들, 병이나 그밖에 이유로 빈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에 속해 있는 포로된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을 찾아가서 도와준다."
이러한 코이노니아는 지역교회 내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른 지방의 교회들도 도움으로써 지체된 형제애를 실천하였다. 170년경 고린도 교회의 디오니시우스(Dionicius) 감독이 로마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부터 여러분들은 모든 형제들을 여러 가지로 돕고 모든 도시에 수많은 원조를 보내주었다. 예로부터 여러분이 보내 온 선물들을 통하여 여러분은 로마인으로서 전래의 로마교회의 관습을 고수하여 궁핍한 사람들의 가난을 덜어주고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고, 이것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은 그곳의 교회 성도들의 공동체적 섬김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우리의 형제들은 대부분이 넘치는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서로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이 병자들을 데려와 세심하게 보살피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병자들과 똑같이 지극히 기쁜 마음으로 죽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앓는 병에 전염되면서, 다른 사람의 병에 자기도 걸리면서, 자발적으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이렇게 해서 우리 형제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들은 성도들의 몸을 품에 안아 눈을 감겨 주고 입을 닫아 주며 어깨에 메고 가서 진심으로 얼싸안고 몸을 씻기며 옷을 입힌 다음 장례를 치렀기에, 그들도 얼마 안가서 똑같은 시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때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또 언제나 먼저 간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꺼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독교를 변증했던 아리스티데스(Aristides)도 당시 성도들의 공동체적 섬김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과부들에게서 그냥 돌아서는 일이 없다. 고아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사람들로부터 구해 내며, 외인들을 보면 집으로 영접하여 형제처럼 대우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난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한 자가 죽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 한도 내에서 그의 장례를 부담한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의 메시야 때문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옥에 갇히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들 모두가 그의 필요를 채워 주고 될 수 있으면 그를 풀려나게 해 준다. 그리고 그들 중에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과 양식이 없는 자가 있으면 그들은 그를 돕기 위해 이틀이나 삼 일을 금식한다."
교부 오리겐(Origenus)은 이러한 생명력 있는 공동체들이 소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서 세속사회 속에서 복음을 권능 있게 증거하고 있음을 증언하였다.
"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이러한 공동체들을 일으키시어 미신과 무례와 불의에 젖은 인간들의 공동체들에 대항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스승과 교육자가 되어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공동체들에 비하여 '세상 안에서 하늘의 등불'처럼 그들 속에서 낯선 사람들로서 살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지역에 분리해서 게토(ghetto)화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사회 속에서 보편적인 모습으로 살면서도 공동체적 삶을 살아갔고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내용이 산상수훈적인 삶과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해 나갔다. 극진한 형제애와 지체의식, 그리고 물질까지 자원해서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삶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만 아니라 교부 시대에도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계속해서 실행되고 있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공동체 삶은 성령강림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지하 교회가 공인되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예루살렘 공동체처럼 유무상통을 하면서 많은 인원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후터 형제회와 메노나이트 공동체들,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등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를 성경적 근거로 해서 이룩된 예이다. 즉 초기 예루살렘의 대규모의 공동체는 박해로 해체되어 다른 형태로 계속 발전했으나, 만약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한다면 성령의 동일한 역사로 현대에서도 예루살렘 공동체와 같은 형태는 실제로 가능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공동생활은 하지 않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코이노니아의 본질을 구현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여 기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교통, 코이노니아가 공동체 삶을 통해 초대교회 이후 약 300여 년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현대교회에는 그러한 초대교회의 사랑의 공동체 삶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지하교회가 지상교회로 바뀌면서 교회 내에서 세속적인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이러한 나눔의 공동체적인 삶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을 되고 난 뒤부터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적 정절이 약화되면서 교회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은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교회의 본질인 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단절되어 버렸으며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가 되어 버렸다.
교회사의 공동체 운동들
그 후 제도권 교회가 상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을 찾기 원했던 뜻있는 성도들은 이름도 없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매세기마다 끊임없이 나타났다. 2세기에는 성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시도가 있었고 5세기에는 훌륭한 신앙선배들의 공동체가 정통교회에 의해서 수도원화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 수도원 공동체들이 부패하게 되자 성 프란시스코, 도미니크 수도회를 통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나 진정한 복음의 본질 회복을 촉구했다. 12세기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평신도 교회갱신 운동단체인 왈도파, 14세기 네덜란드의 공동생활 형제단을 통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인 Devotio Moderna운동(오늘의 헌신이란 뜻),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과 더불어 보다 철저한 교회개혁을 천명한 재세례파의 공동체 생활, 18세기 모라비아 지방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헤른후트 선교공동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선교회들이 공동체 바탕을 두고 효과적이고 활발한 사역을 펼쳤다. 현세기에 와서는 보다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기독교 공동체 시도가 급증하고 있다.
2차대전 후 나타난 세계의 대표적인 기독교 공동체는 교파와 교회간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프랑스 떼제공동체, 강력한 영적 각성을 통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개신교 여성독신 공동체인 독일의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 성령의 능력과 자비량 선교를 통한 선교공동체인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고독과 소외의식이 만연한 대도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랑의 공동체인 시카고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 미국 남부 흑인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코이노니아 동역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성경 진리의 온전성을 증거하는 라브리 공동체 등이 있다.
템플대학교의 F. 릿텔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참된 교회의 회복'이라고 했으며 해롤드 벤더 교수는 '철저한 제자도의 삶'으로 보았다. 결국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어떤 특정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도날드 블뢰쉬는 "기독교 공동체는 기성교회에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우쳐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우리의 기존 교회가 상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균형'잡는 역할을 해 주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꾸준히 공동체 사역이 진행되어 왔다. 많은 교회들이 공동체교회를 시도하고 있으며 민중교회들도 신학적인 입장과 강조점이 다소 다르지만 역시 공동체적인 교회를 실험하고 있다. 교파가 다른 교회들도 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에서 함께 만나고 일치를 도모하게 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교 회의 주요한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표시'이다.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지 우선 그 일반적인 개념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임박성에 따라 미래적 하나님 나라와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 구분된다.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며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 땅에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다. 전자를 '종말론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하며 후자는 '천국의 현재적 개시'라고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을까 하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공동체를 다루고자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떠한 관계인가? 조지 래드(George Ladd)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교회는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래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 기관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지만 교회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있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도구이며 대리 기관(agent)이라는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의 사신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화해의 뜻을 이루시는 최상의 수단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교회는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며, 현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둘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형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자.
미 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계 21:1-5), 눈물과 고통과 죄와 사망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된 나라(계 21:4-5),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나라인 새 예루살렘(계 21: 10-27),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왕 노릇(통치) 하는 나라(계 22:1-5)이다. 미래에 완성될 천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서 새로운 영토(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회복(죄와 사망의 문제 해결), 새로운 통치(하나님과 영원히 왕 노릇 함)이다.
아름답고 권능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온 세상을 회복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즉 지금 여기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그 러면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고(마 3:2; 막 1:1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요 3:1-5) 복음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눅 17:21).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시 22:3).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고(눅 11:20) 또한 어린아이 같은 겸손함과 단순한 믿음(마 18:1-5), 헌신과 충성, 낮아지고, 주고, 버려지는 섬김의 삶(마 19:13-30), 가난한 자와 나누는 공의의 삶(막 10:21 -23; 눅 18:22-24), 온전한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천국의 헌장인 산상수훈(마 5-7장)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통하여 나타나는가를 총괄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 법으로서의 제자도이다. 그 제자도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를 가리킨다. 이 제자도는 인간으로서는 지키기가 매우 힘든 명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졌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의 역사를 물리치는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었고, 또한 물질까지 온전히 나누어 가난한 자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감으로써 예수님이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실천하였다.
이 제자도는 개인적으로 지키고자 할 때는 거의 불가능한 윤리 같지만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힘을 합하여 한 몸 안에서 공동체로 지키고자 할 때는 산상수훈이란 실천 가능한 윤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이다.
마태복음의 여덟 가지 복은 세상 사람들의 사회 가치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형태를 규정지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제자도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성령 강림 이전에는 주로 예수님 한 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 받은 사람들'의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보여졌다. 성령이 임함으로써 초대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풀고 모든 물질을 온전히 나누어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기적인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탐욕을 떨치고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지경까지 간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사의 혁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된 실체의 증거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통로라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능력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즉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한 온전한 공동체로 회복될 때 하나님 나라가 기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 보여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2:28 -31).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 4:12)"고 말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보여 주는 실재이다.
하 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 삶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 임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산상수훈을 실천하고 물질까지 전적으로 포기하고 나눌 수 있는 '철저한' 공동체여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철저한 제자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철저한 공동체의 모본이다.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은 재세례파 공동체인 후터 형제회(Hutterian Brethren)의 삶을 언급하면서 "산상수훈과 무조건적인 제자도, 제자도와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 형제자매들의 공동체 생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주와 구라파에 있는 후터 형제회를 방문해 보면 역시 몰트만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후터 형제회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방식대로 재산을 공유하며 신실한 형제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로 지금도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후터 형제회는 종교개혁 이래 현재까지 5백여 년 동안 존속해 왔다.
금세기의 위대한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박사는 인도 남부에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여사가 세운 도나버 공동체(Dohnaver Fellowship)에 대하여 "만일 이 지구상에 천국(the kingdom of God)이 있다면, 아마 그곳은 이곳 도나버 공동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나버 공동체는 사회봉사와 함께 선교를 하는 공동체로서 힌두교 사원에 창녀로 팔려 간 소녀들을 교화시키는 사역을 했었다. 원래 CEZMS(영국성공회 제나나 선교회) 소속이던 이 선교단체는 자라면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모든 회원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소유(all things in common)'하며 '믿음의 선교(faith mission)' 방식을 취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외국에서 온 요원들과 인도 요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all one in Christ)'가 되었으며 계급이나 서열, 국적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없는 사랑과 포용의 분위기가 가득한 사랑의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정녕 하나님 나라의 삶이 구현된 실재를 접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은 여호와께서 영생의 복을 명하는 삶'이라고 노래했다(시 133:1-3).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이 구현될 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 선재(先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차 다가올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단편적으로나마 미리 이곳에서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라고 기도한다. 어떻게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가?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생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통로이다. 공동체 생활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삶의 방식(life style)이다. 이것이 교회됨의 의미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실제로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실재(visible reality)'이며,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열린 창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공동체 생활, 즉 한곳에 모여 재산을 공유하며 사는 그러한 공동체 생활 형태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하는 통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보편 교회의 형태와 삶 속에서도 그의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체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철저성'이다. 보편 교회에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나타나려면 제자도와 공동체성이 보다 '철저(radical)'하게 실천되어야 하며 보다 격상된 헌신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의미는 단순히 함께 모여 사는 집단이 아니라 철저한 제자도와 깊은 형제애적 삶의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제자도는 물질까지 완전히 나누어 형제애적 사랑을 실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의 필요에 동참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실제적인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떠한 교회를 통하여 그 나라가 구현되는가? 교회의 본질이 실천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공동체 됨이었다. 개인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다. 참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온전한 공동체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성이 철저히 구현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다. 철저하지 않으면 처절하게 된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는 철저한 공동체의 실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하며, 미래에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보여 주는 대안적 사회(alternative society)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절정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 안에 있으니 곧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된 그러한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는 경우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영토(영역)'냐 혹은 '통치'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종래의 주장은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이 아니라 '통치'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앞서 미래에 새롭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천국)의 특징이 '새로운 영토, 새로운 회복, 새로운 통치'임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다면 미래의 세 가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이 땅에서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장소적인 영역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은 하나님의 통치에 종점을 두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영역적 의미보다 주권적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구체성이 결여된 막연한 개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통치는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통치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 구체적인 영역을 통해서 나타난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이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너무 치중했었기에 통치의 영역인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적 의미만 아니라 영역적인 의미에서도 균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인 개념이 약화된 것은 종래의 신학적 영향도 있었다.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교회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가 전 세계에 있는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들과 그러한 공동체성을 온전히 지닌 교회들을 접해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에도 가시적으로 임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란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고 개념적이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막연한 관념적인 하나님 나라가 되기 십상이다. 진실로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도 임재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과 영역의 개념이 균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할 때 균형잡힌 하나님 나라론이 확립될 것이다. 막연한 통치 개념으로서의 실재가 없는 하나님 나라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항상 이 땅 위에서 눈에 보이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현대 교회의 비극 중의 하나는 현재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접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성경 해석이 대개 영해(靈解)되는 쪽으로 흐르거나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에 관념적인 기독교로 정체되어 나중에는 체념적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다. 교회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가 보여져야 한다.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기독교는 체념적인 기독교로 전락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성이 보다 실제적으로 가시적으로 철저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이다.
요즈음 기독교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기 독교 세계관은 일상적인 세계관과 달리 하나님 편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세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세계관 혹은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의 틀을 가진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뒤 저 세상에서 펼쳐지는 천국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 공동체 삶이다.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도 밝혔듯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 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교회 내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 속에서 조명하여 확대해 나가게 하는데 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은 학문적이고 사변적인 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기독교 세계관 책 저술, 강연, 세미나, 스터디 수준에 그치고 만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이 사회 전 영역을 다스린다면 그것이 옳음을 밝혀내는 것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 가능함을 실제 삶으로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론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실천될 수도 있지 않는가?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박식한 이론만을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 이원론에 매여 있다. 삶과 괴리된 세계관 지식이 문제이다. 신약 성경의 구조를 묵상해 보면 왜 하나님이 바울을 예수님의 12제자 군에 미리 부르지 않고 나중에 부르셨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비교적 학문과 이론에 무식한 12제자들이 먼저 '행' 한 후에 그것을 바울이 나중에 학문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 1:1) 기독교 세계관이 어떠하다고 이론은 박식하게 늘어놓으면서 그 세계관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이원론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말'에 지친 종교가 되어 버렸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를 확인하고 증명할 삶의 현장이 없다는 것이다. 예배 시 수많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그 설교가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실천의 생활은 보기 힘들게 되고 선포된 말씀이 실제로 실천되지 않고, 또한 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말씀의 능력은 상실된다. 기독교의 지식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성경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 가는 즉 '실천함으로써 체득하는 진리' 를 말한다. 브루더호프 (Bruderhof) 공동체를 가보면 그들은 "우리의 삶이 바로 학교다" 라고 말한다. 공동체 삶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 학교이며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은 이론 중심의 세계관 교육이 아닌 체험적인 삶의 현장을 통한 기독교 세계관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그 삶의 체험의 현장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기독교가 세속 사회에 대항하여 기독교 문화관과 세계관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속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세속 사회에 영향을 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믿음과 생활 체험을 공유한 공동체 생활이다.
기독교공동체를 통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 독교 공동체 삶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생활 속에서 실천 해 나갔던 예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하는 네 공동체는 필자가 직접 탐방하여 생활해 보았던 사례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는 공동체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범적 모델 중의 하나이다.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
1948 년 미국 정통 장로교회로부터 유럽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쉐퍼는 1951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 샹뻬리 지역으로 이사해서 산 속의 조그만 산장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는 거기서 중대한 영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정립하고 유럽의 신학적, 사상적, 문화적 공허의 심각성을 안타까워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과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사명감을 가진다. 그는 미국 정통 장로교단의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재정적 후원도 끊었다. 1954년 그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모든 남녀들을 위한 '진리의 피난처' 로 바꿀 것을 결심한다.
그는 기도를 생활화했으며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세워 준수하였다. "첫째, 기부금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만 아뢴다. 둘째, 간사를 모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셋째,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고 그날그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넷째, 우리의 사역을 알리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매우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것을 믿는다."
쉐퍼 부부는 엄청난 위험을 각오하였다. 1954년경에는 벌써 아시아와 중남미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왔다. 1955년 2월에 그들은 스위스 연방 정부로부터 가톨릭 지역에서 개신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6주 이내에 스위스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전은 모든 산꼭대기에 서리라(사 2: 3)" 는 말씀의 약속 아래, 기적적으로 그들을 도운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150여명이 보내 준 헌금으로 현재의 라브리 공동체의 모체가 된 웨이모의 멜레즈 산장을 구입하여 스위스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1955년 6월 4일 불어로 '피난처(L'abri)' 를 뜻하는 라브리 공동체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라브리에 오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불신자이다. 오전에는 개인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노동을 한다. 현재 세계 7개국에 라브리가 있는데 어느 곳이든지 라브리에 가면 간사 중 한사람이 학생의 개인 교수가 되어 모든 문제를 도와준다. 개인 교수는 학생의 개인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연구 과정을 정하여 준다. 공부는 도서관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거나 담당 간사와 개인 공부를 한다. 라브리에는 미리 짜여진 교과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학생 개인의 관심과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 과정을 정한다. 라브리 도서관에는 오십여 권에 이르는 라브리 서적과 라브리 강연을 녹음한 이천여 개의 카세트테이프 혹은 기타 여러 가지 라브리 자료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담당 간사와 공부나 그 밖에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오후 노동 시간에는 라브리 생활 운영에 필요한 노동을 한다. 스위스 라브리의 경우 겨울에는 매일 눈 치우기를 하며 그 외에 장작 패기, 채소밭 가꾸기 청소, 요리, 잡초 뽑기 등이 있다.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하면서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을 나누고 철학적인 문제와 성경의 기본 진리, 결혼 생활이나 이혼, 동성연애와 같은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기회가 된다. 매주 목요일은 쉼의 날로서 여행도 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한다. 저녁에는 주로 간사들이 인도하는 강좌가 주 2회씩 있는데 전문적인 주제에 대한 강의, 성경 공부 등이 있고 이외에 영화나 음악 세미나 등에 참석하여 함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눈다. 주1회 기도의 날로 정하여 중요한 문제를 두고 각자 자유로이 시간을 정해서 기도한다. 라브리 공동체의 간사 가족들은 큰집에서 가족들과 공동생활을 한다. 결혼한 간사이든지 미혼의 간사이든지 모두 공동체 내에서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산다.
라브리는 일과 공부 그리고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전 영역이 하나로 회복되었고 치유된 것을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곳이다. 스위스 라브리 간사 엘리스 포터(Ellis Potter)는 "라브리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삶의 실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을 실험하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쉐퍼 박사가 유럽 선교사로 파송되어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그는 당시의 비관적인 신앙과 현실 앞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하여 심각한 재고를 하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로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팽배해 있었으며, 사상적․문화적으로 공허해 있는 당시 유럽의 상태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이 진리라면 어째서 기독교인들은 실천이 부족하며 교회는 생명력이 없고, 교회가 분열되며 대사회적으로 무기력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쉐퍼는 그러한 문제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그릇된 세계관으로부터 왜곡된 정치. 사회. 문화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고가 행동을 규정한다" 고 하면서,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 바른 믿음의 대상은 바로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 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기초로 삼을 때 비로소 바른 영성(true spirituality)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라브리의 사역은 단지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 에 관한 것이고 지성의 참된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전체성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라브리는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라브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물을 판단, 분석하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 이다. 그러한 지혜는 쉐퍼가 현실과 분리된 신학교나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강의한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손님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개신교인이건, 가톨릭이든, 보수주의자이건, 진보주의자이건, 배운 사람이건, 무식자이건 간에 마약중독자, 히피와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열린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실험되고 실천된 삶의 열매였다는 사실이다. 라브리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배움터이다. 삶 속에서 실험되는 않은 지식은 공허한 것이다. 라브리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한 개인에 의해서만 사역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헌신되고 잘 훈련된 많은 간사들과 함께 라브리 사역이 수행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의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의 문제는 바로 삶 속에서 실험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은 신학이다.
쉐 퍼와 라브리 공동체의 의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체로 믿고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메이첸의 정통보수 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입증한 것이다. 실천되지 않은 정통은 죽은 정통이다. 한국에도 신학이 삶의 전 영역에서 실험되는 라브리 공동체와 같은 신학교, 몸으로 신학을 사는 쉐퍼와 같은 신학교 교수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
베다니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이상에 충실하고자 하여 물질을 완전히 공유하며 권능있는 선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자신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베다니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 나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직도 세계의 반 정도만 복음화 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선교인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일의 시급함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우리의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43-47절과 4장 32-37절에 나오는 초대 교회를 이 시대에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오늘날 크리스챤의 삶을 사는 우리의 자발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이 일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지만 주께서 시작하신 것을 그가 완성하실 줄 우리는 믿는다. "
베다니 공동체는 1940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성 누가 루터교회"에 다니던 5명의 집사들이 가정에서 세계 선교에 비전을 가진 성경공부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세계 선교를 위한 재정 충당을 위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공동생활이 성숙해 감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더 큰 집이 필요했으므로 30여개의 방을 가진 큰 저택을 아주 헐값에 구입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공동생활과 함께 베다니 선교 훈련원(Bethany Missionary Training Center)을 시작해 선교사 후보생들을 모집해서 훈련시켰다.
계속 회원들이 늘어나자 다시 그 집을 팔고 미니에폴리스 교외로 이사해서 약 57에이커의 농장을 산 다음 2년 정도 농사와 목축을 하였다. 그 후 한 회원의 제의로 자체 내에 공장을 지어서 기업을 경영하기로 하고 목각, 가구, 장난감, 스피커 시스템을 제조하였으며 1950-1981년까지는 캠핑 트레일러를 만들어 팔아서 큰 수익을 보았다. 그래서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자체 내에 더 많은 아파트와 시설을 확충하게 되었다. 1981년의 오일 파동으로 캠핑 트레일러 제작을 중단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안도로 기독교 서적출판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 출판물을 판매한 이익은 베다니 공동체 수익의 약 90%를 충당하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의 하루는 아침 6시 아침 기도로 시작된다. 아침 7시부터 7시 40분까지 식사시간에 이어 8시부터는 선교 신학생들의 오전 수업이 12시까지 이어진다. 일반 멤버들은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공동체 회원들의 자녀는 자체 내의 공동체 학교(Community School)에 다닌다. 이곳에는 유치원, 국민학교 과정이 있어서 공동체 가족 중 아이들의 교육을 효율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오후 작업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아침에는 각자의 아파트에서 따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점심과 저녁은 반드시 다함께 공동 식당에서 해야 한다.
선교 신학교 학생들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 일반 공동체 회원들은 7개동의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정회원 모임이 있고 수요일엔 수요 예배, 주일에는 11시 대예배와 저녁 7시 찬양 예배가 있다. 이 공동체는 웬만한 단과대학 캠퍼스 넓이의 면적에 선교 신학교를 비롯해 학생 기숙사, 회원들의 아파트, 공동 식당, 체육관, 대규모 인쇄소, 1천여 명을 수용하는 교회 등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안에 공동체 가족 160여명과 선교신학교 학생 150여명을 합해 모두 300여명이 더불어 함께 사는 상당히 규모가 큰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내에는 선교 훈련원에서 발전된 선교 신학교(Bethany College Of Mission)가 있다. 학생들은 오전 4시간 동안 신학과 선교학을 공부하며, 오후 4시간은 노동을 하는데 노동은 노동학점으로 가산된다. 또한 학생들은 공동체 내의 출판사, 건축, 자동차 정비, 환경정리 등의 일을 하게 되며 학생들의 학비는 노동으로 대치된다. 학생들은 노동을 통해서 학과 시간에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는 매우 실제적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이 선교 신학교의 4학년의 과정을 마치면 1년간의 인턴쉽(Internship)이라는 선교 실습 과정을 가진다. 학생들은 베다니 선교회에서 파송한 세계의 선교 지부나 베다니 선교회와 연결된 선교 단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선교 현장 실습훈련을 받는다. 이 기간 동안에는 베다니의 재정후원 없이 믿음의 선교 방식이든지 지교회의 후원이든지 간에 학생 스스로 선교비 문제는 해결해 가면서 훈련에 임하게 되어 있다.
요즘 한국 신학교의 문제는 '학'은 있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 중심의 신학교육과 교리 논쟁은 신학교의 생명력을 상실케 하고 신학생들은 체념적인 상태에 있다. 이러한 신학교의 현상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은 교회와 사회의 문제로 직결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생활은 이러한 '학' 중심적인 신학교 갱신의 새로운 희망과 비젼을 주는 모델이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어 있으며, 기혼자일 경우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지원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공동체 가족들이 모두 기숙사와 아파트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는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예배하는 기쁨이 가득 차 있고, 능력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과 신학 교육의 병존이 가능한 삶의 배움터이다. 이러한 공동체 생활과 선교신학교를 통해서 현재 3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권능 있는 세계선교 사역을 펼치고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
미국 조오지아(Georgia)주에 아메리쿠스(Americus) 근교에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라는 공동체가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는 1942년 클래런스 조단 (Clarence Jordan)과 마틴 잉글랜드(Martin England)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이다. 원래 이 공동체의 이름은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이었다.
켄터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헬라어 원어 연구로 신약학 부문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있던 클래런스 조단은 그의 신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검증해 보기를 원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와 믿음의 실천이 가장 절실한 곳은 남부 흑인 지역이었다.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흑인들만이 사는 농촌 지역인 조오지아주 섬터 카운티(Sumter County)를 택하여 그의 몇몇 동료들과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에 세웠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모든 이들로 더불어 화평케 하며 인종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가난한 흑인들의 농촌을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실험해 볼 사역지로 백인이 전혀 살지 않는 가난한 농촌지역을 택하였던 것이다.
처 음엔 400에이커의 땅을 사서 흑인들과 함께 살고 예배하며 일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농장에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여름 성경 학교, 청소년을 위한 캠프 등 인근 지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들을 열었다.
1968년 코이노니아 농장은 코이노니아 파트너스(Koinonia Partners)라고 개명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재다짐하였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떠남으로 인류애를 상실하여 서로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대안이 되는 삶(Alternative Life-style)을 계속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역을 펼치고 있다.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사역(Low Cost Housing) : 농장 주위에 있는 가난한 흑인들의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했는데, 지난 20여년 동안 170여채의 집을 인근 지역인 섬터 카운티에 지어주었다. 여기에서 해비타트 사역이 나왔다.
인근 주민을 위한 고용사역 : 코이노니아 농장의 땅콩 농사에 인근 주민을 고용해서 그들의 생계를 구체적으로 도운다.
어 린이 양육 센터(Child Development Center) : 섬터 카운티의 아이들, 특히 학교에 가지 못해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가정에 내버려진 흑인 아이들을 돌보고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이 사역은 탁아소의 기능도 포함하여 생후 6개월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들 35명을 맡고 있다.
청소년 사역(Youth Ministry) :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으로, 방과 후 오후 세시 경에서 다섯 시까지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 사역의 목적은 그들에게 오후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놀이와 교육 공간을 제공해 주며 인근 지역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리더쉽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교육한다.
목화판 성경(The Cotton Patch Version) : 남침레교 신학교에서 신약 성경의 헬라어 원어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클래런스 조단은 촉망받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장에서 흑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부 흑인들의 정황에 맞는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복음의 본질과 신약성경의 본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약 성경의 지명과 당시의 정황을 미국 남부의 흑인들, 즉 고통당하는 소외층들의 용어로 번역본을 내었다.
1968 년 코이노니아 농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밀라드 풀러 가족이 코이노니아 농장에 와서 살게 되었고 농장은 자선기금을 만들어 인근의 빈곤층에게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 당시 밀라드 풀러는 자선기금을 통한 저소득층 주택공급 사역에 동참하면서 큰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주택 사역이 코이노니아 농장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읍내 아메리쿠스의 빈곤층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1976년 코이노니아 동역회에서 나와서 별도로 '자선을 위한 헤비타트'(Habitat for Humanity)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빈곤층을 위한 주택공급 사역을 코이노니아 농장에서 15분 거리인 아메리쿠스에 본부를 두고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사역은 80년대에 들어서 전 미국으로 확산되었으며, 80년대 후반엔 전 세계로 확산되어 국제 헤비타트 협회 (Habitat International)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 캐나다, 호주에 450개의 지회가 있으며 개발도상국 26개국에 80여개의 지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전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사실 '인류를 위한 처소 혹은 거처'라는 뜻으로 불리는 헤비타트 운동은 코이노니아의 '자선을 위한 기금(Fund for Humanity)'에서 나온 것이다. 코이노니아 농장의 창립자 클래런스 조단은 동역회로 전환한지 1년 후인 1969년에 급작스럽게 죽게 되었다. 신학박사였던 그가 약 30여 년 동안 공동체의 기초를 닦느라 겪은 온갖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단박사는 열매를 보기도 전에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코이노니아 농장을 통하여 시작한 저소득층을 위한 섬타 카운티의 주택 사역은 오늘날 헤비타트 사역으로 발전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필자도 한국 헤비타트 사역본부(사랑의 집짓기 운동)에서 사역하고 있다.
클래런스 조단이 복음의 본질을 실천하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통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을 때 그 믿음의 열매는 생전에 그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정녕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예수원(Jesus Abbey)
예 수원은 한국 및 한국교회의 쇄신과 세계 평화, 그리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의 집으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 예수원은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정신으로 '십자가 지기'를 배우고 '받기보다는 주기'를 배우는 공동체다. 또한 공동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와 같이 진정한 '코이노니아' 를 나누는 곳이다.
설 립자 대천덕 신부는 1957년 한국 선교사로 부름 받아 성공회 미카엘 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신학교 학생들에게 오후에는 노동을 하는 등 실험적인 커리큘럼을 운용하였으나 학생들의 반대로 교장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대천덕 신부는 1965년 예수원을 설립하였다. 대천덕 신부 부부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로 옮기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며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 여부를 실험해 보는 실험실을 갖기 위해서였다. 대천덕 신부는 "신앙은 과학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원 식구들은 기막힌 방법으로 지난 25년 동안 쓸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아왔다. 어떤 때는 그날 쓸 것을, 어떤 때는 일주일 단위로 필요한 것을 많지도 적지도 않을 양만큼 적당히 공급받는다. 또한 사도 바울의 자립정신을 본받아 그 동안 작물을 재배하고, 관목 숲을 쳐서 목초지로 만들어 젖소를 키우고,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일, 한 때는 양을 키워 옷을 짜고, 치즈를 만들기도 했다. 주 수익 사업으로는 분수령 목장에서 양을 키워 나오는 양모로 양털 이불을 제작하여 주문 판매하고 있으며 목각 제품 제작, 도서 및 테이프 판매 등이 있다. 예수원의 경제는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노동과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하 루 일과는 아침 5시 30분부터 6시 30분 아침기도, 조식, 오전, 오후로 각자의 분야에서 노동하며, 매일 12시에는 중보기도, 오후 1-2시, 밤10시 이후에는 침묵 시간, 주 2회의 성경공부 시간을 갖는다. 매주 저녁에는 월: 대신부님 강의, 화: 찬양에배, 수: 수요예배, 목: 은사의 밤, 금: 구역예배회, 토: 감사예배로 드린다.
예수원의 손님 맞는 사역은 중요한 한 부분이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천사 대접하듯 하라'는 정신을 갖고 섬긴다. 요즈음에는 방문객이 매년 8000명에 달한다.
현 대 도시와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산골짜기의 예수원 삶이 과소평가되기 쉽다. 그러나 예수원을 통해서 대천덕 신부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별히 대천덕 신부의 사상은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 주었다. 대천덕 신부는 성령론, 코이노니아의 신학, 희년 사상, 교회의 일치, 공동체, 기독교 대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에 '헨리 죠지'(Henry George)라는 경세 사상가와 함께 토지문제를 다루는 희년 사상을 한국교회 앞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여 보수 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경직된 성령론에 갇혀 있는 장로교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고 한국 헨리 죠지 협회(성토모), 가난한 자들의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인 헤비타트 운동(사랑의 집짓기 운동),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 전국 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전신공연) 등의 단체와 운동들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원 공동체는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제 분야를 통해 한국교회가 신선한 기독교로 갱신케 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대천덕 신부는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기만 하지 않고 공동체로 살면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그는 신학자이며 사상가이며 동시에 철저한 실천가이다. 그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자이나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매우 진보적이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대천덕 신부를 가리켜 '그는 진정한 급진주의자'(real radicalist)라고 평했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신학적인 입장은 '근본적인 급진주의'(Fundamental Radicalism)이다. 현대 기술 문명과 정치를 철저히 해부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하여 현대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쟉크 엘룰(Jacque Ellul)의 사상 역시 근본적인 급진주의이다. 대천덕 신부와 마찬가지로 엘룰도 성경을 그대로 믿는 개혁주의 토대 위에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실천하는 삶'(radical life)만이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미 타계했지만 20세기 최대의 지성인인 엘룰도 역시 프랑스 보르도에서 출감한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면서 수많은 저술로 기독교 세계관 사역에 공헌하였다. 그의 예언자적인 지성의 메시지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런 점에서 상통된다.
예수님이 제자훈련의 핵심 지침으로서 제자들에게 준 산상수훈은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의 내용이며 이 철저한 제자도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이다. 공동체적 생활방식은 세속 사회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이며 그것은 대조 사회로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사회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A Way of Life)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천덕신부는 "모든 기독교 대학들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믿음과 기도
이상 기독교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해 나가는 경우들을 살펴보았다. 라브리는 열린 공동체 생활의 현장을 통해 쉐퍼 특유의 기독교 세계관 학교를 운용, 확대해 나갔다. 코이노니아 동역회의 클래런스 조단 박사는 가난한 흑인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확대하였다. 그의 열매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망치 소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힘차게 울리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능력 있는 공동체 생활과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체재를 통해 오늘날 세계 선교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한국의 예수원은 공동체의 생활의 실험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 갱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기독교 공동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 세계관을 생활 현장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생활이다. 이론만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기 위해서 미국의 베다니 선교 신학교와 같이 총체적인 공동체 삶 속에서 학문을 하는 형태가 요구된다.
그러면 이러한 공동체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단순한 믿음과 기도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세계관을 가졌다면 그 세계관을 실천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과 출발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기독교 공동체들은 모두 단순한 믿음과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근래에 시작된 벤쿠버 세계관 대학원(VIEW)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구체적 헌신으로 실천의 단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귀한 과정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작업을 통하여 세계관 공동체가 진행될 것이다. 패트릭 존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본적인 사항이다. 기도 없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기독교 세계관)은 이루어질 수 없다. 기도는 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을 신성한 것으로 끌어 올린다. 우리가 일할 때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러한 믿음과 기도 가운데서 소수의 인원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여 그 삶의 현장을 가지고 유치원, 홈 스쿨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오늘 여기서 직접 적용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을 이루는 기독교 세계관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그 위에 그 동안 꿈꾸던 참된 기독교 대학이 설립될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편)
기독교대학 178, 179 / DEW 181호 (20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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