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공동체란 무엇인가(2)

대천덕 신부님(우리와 하나님에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많은 공동체가 존재하지만 예수원과 같이 시작되고 운영되는 단체는 없습니다. 우리가 제일 이상한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 반적으로 공동체는 교회 안에서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말씀을 좀더 깊이 연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집에서 모이고 저 집에서 모여 함께 성경공부를 계속하고, 깊이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8~10년에 걸쳐 계속 모임을 갖고 난 후 “이렇게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각자 개인 집에서 지금과 같이 살아가는 것은 여러모로 낭비가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이렇게 낭비하면 안되니까 같이 공동체를 시작해 봅시다”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수년 동안 함께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 알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경제문제를 도와주고, 성경말씀을 깊이 깨닫고 한 마음 한 뜻을 갖게 된 다음에 “자,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모아서 땅을 좀 삽시다.” 그래서 공동으로 땅을 구입하면 먼 데 가서 비교적 값이 싼 땅을 구하는 것뿐만 아니고 자기 개인자산을 처분하고 필요한 살림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알라스카, 볼리비아, 캐나다 등등에서).

그 런데 볼리비아에서는 지금 공동체가 없어졌습니다. 공산당이 너무 강하게 되어서 공동체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볼리비아에는 공동체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다 공산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뒤늦게 신자들이 공동체 생활을 제안하고 있지만 이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공산당이 들어와서 땅을 다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리라고 합니다.

왜 이슬람교가 생겼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공산당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톨 스토이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대지주들에게 권면했을 때 그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비웃기만 했습니다. 마침내는 출교까지 당했습니다. 톨스토이도 이단으로 몰려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결국 볼세비키 혁명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교회는 파괴되고 지주들의 땅을 몰수 당해서 모두 국가소유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민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 대지주를 위해 일했던 소작인들이 지금은 공산당 정부를 위한 국가의 소작인이 된 것에 불과합니다. 혁명을 통해 상태가 좋아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참으로 우리가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도록 합시다. 사실 도시 공동체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예수원을 시작했느냐고 묻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땅값이 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우리가 여기에서 13,00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할 돈으로 서울에서는 몇 평을 살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아마 한 평이나 두 평 정도 밖에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시세로 서울의 땅 한 평 값으로 여기 땅 만평에서 삼 만평까지 구입이 가능했습니다. 엄청난 땅값 때문에 도시에서 공동체를 시작하기란 무척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 렇지만 각 교회에는 땅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에 자기집을 소유하고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음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도시에서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경제공황이 닥쳐서 도시에서 일자리가 다 없어지고 결국 농촌으로 가서 일자리를 구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시골에 땅을 구입하여 개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개간지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개간했던 땅마저 자주 버리는 상태입니다.

흙을 만지는 일을 대부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결과, 토지에서 14시간 열심히 일해도 도시에서 6시간 일한 것에 그 수익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아주 많은 월급을 받아도 언제까지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언제 갑자기 일자리가 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갈 데도 없고 집세를 내지도 못하니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자기 소유의 땅이 있으면 금년에는 땀을 흘리면서 어렵게 살지만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영원토록 살 수 있습니다. 공황이 닥쳐도 먹을 것과 숙소와 입을 것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토지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토지의 소유권이 나누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업인 땅을 버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도시로 가서 얼마 동안은 좋은 봉급을 받지만 경제공황이 일어나 일자리를 잃게 되면 빈손으로 농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농촌에 와도 땅이 부족해 일군을 쓰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막연해집니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공동체를 조직한다 해도 농촌에 미리 분원을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도시에서만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안 되는 일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법과 농촌에서 사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도시를 싫어하십니다. 신자들이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해도 심하고 대자연과 멀어지게 만들고 복잡한 사회문제가 많이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깊이 살펴보고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깊이 고려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진보된 ‘현대문화’라고 하는 것은 소비하는 문화일 뿐입니다. 물건을 과잉 생산해서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고 결국 제 값에 팔지도 못하게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동차가 비싸서 사기 힘들지만 미국에 가면 80만 원이며 승용차 한 대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계속 생산해 가면서 새 차를 유통시키기 위하여 헌 차를 계속 폐기 처분해야 합니다. 자꾸 헌 차를 팔고 새 차를 구입합니다. 헌 차를 팔기 어려워도 80만 원만 주면 쓸만한 새 차를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갈 때마다 그렇게 합니다. 농촌에서는 자동차가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으므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자동차가 있습니다. 대부분 비싸지 않은 차를 사용하는데 물론 휘발유가 많이 들고 수리비가 자꾸 들지만 비싼 고급차를 유지하는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국사회는 점점 갈수록 복잡해지고 지나친 소비위주의 문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미리 하나님의 정신이 무엇이며 성경의 분위기가 무엇인지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혼자 하기 어렵고 학교에서도 하지 못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이 큰 돈을 기부해 준 덕분에 -대부분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학교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부자가 싫어하는 것을 가르치면 해고를 당하게 되지요. 그러니 진리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연구하려고 하면 따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실제생활을 비교, 연구하면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또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새로 나온 책도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조금씩 그런 책들을 접하면서 연구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연구한 결론과 대조할 수 있고, 또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연구하기란 심히 어렵기 때문에 공동체를 통하여 이 사람은 이 책을 읽고, 저 사람은 다른 책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성경과 모순이 없는지, 실제생활에 지금 적용할 수 있는지, 더 연구할 과제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 동체의 성장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보통 처음 시작할 때는 일주일에 한번 개인 집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면서 우리들의 생활을 위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연구해 보기로 결정합니다. 그 다음에는 모인 회원들 사이에 서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힘과 재능을 낭비하지 않는 적당한 직장을 알선하여 주거나 일거리를 주면서 서로의 힘을 나누고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땅을 공동으로 구입해서 식사도 공동으로 하고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공동작업 하면서 더 효과 있게 살고 더 흥미스러운 삶을 추구해 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도행전의 분위기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다음 한층 더 나아가서 혹시 하나님께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하시면 돈을 모아 광야나 산 속에 적합한 땅을 사두었다가 때가 오면 언제든지 떠나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좋은 수입으로 도시에 살면서 공동의 유익이나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사용하지만 언제 닥칠지 모를 환난의 때를 대비해서 실제적인 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리고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먼저 먹여야 합니다. 궁핍한 내 이웃의 문제가 더 시급합니다. 나중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고 지금 당장 주려 죽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의 재정이 여유 있는 대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데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큰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들의 신앙 양심에 호소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에는 너무나 양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말하는 것은 쓸 데가 없습니다.  “저 사람 미쳤다!”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대 만에서 선교사로 일하시는 장로교 목사님 한 분은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공부한 분이신데 저의 아들과도 아주 친한 친구이며 예수원에도 여러 번 오신 적이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제가 공부했던 모교에 들러 그곳의 도서관장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 중에 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아! 그 사람!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미쳤었는데 지금도 미친 사람이지”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친 것을 자랑합니다.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예수를 따라가려면 미친 사람 대접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미치면 문제가 되지도 않고 핍박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가 다 미치게 되면 핍박 받기가 쉽습니다. 피터 왈도(Peter Waldo) 혼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실행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전파를 외칠 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점점 많아지고 제자가 늘어남에 따라 문제시되고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메노 시몬(Menno Simons : 1496~1561)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가르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공동체가 생기고 많은 제자들이 그의 뒤를 따를 때 교회는 큰 도전을 받게 되자 견딜 수 없게 된 나머지 그를 심하게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신자들이 재물을 서로 나누고 공동체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도의 상통이란 말은 죽은 자와 상통한다는 의미이지 생존하는 사람끼리 상통하는 것이 아니다. 재산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며 칠 전에 미국의 신앙잡지에 어떤 단체가 소개되었는데(교회 쇄신을 위한 모임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참모습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면서 모든 문제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명하게 말하자고 했습니다. 경제문제에 관한 보고도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읽고 발송비와 함께 편지를 써서 경제보고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중에 아주 두꺼운 책을 한 권 받게 되었는데 보니까 처음에는 성경대로 나갔지만 본론은 성경을 떠나 나름대로 논리를 전개한 것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분배를 나눈다는 것은 성경말씀이 아니다. 개인 재산은 어디까지나 개인 재산이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코이노니아를 실제로 적용하기를 피하고 중심내용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체 내용의 분위기는 부자의 입장을 대변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드럽고 친절한 필체로 다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저도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의 견해에 틀린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하자고 하셨으니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대 충 그런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그 보고서는 부자들이 부자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챤들은 재물을 나누고 가난한 이웃의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책임져야 할 방법이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저와 같은 사람을 미워합니다. 대화기조차 거절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와 같은 사람이 강하게 되면 그 단체는 우리를 크게 대적하고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세력을 잡으려고 하는데 그들이 세운 크리스챤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세력을 사용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을 ‘이단’으로 몰고 핍박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이 로마정부에 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도 발발하지 않고 오히려 정부를 위하여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이 왜 그토록 초대교회를 핍박했을까요? 하나님 대신 로마황제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황제보다 더 높으신 분이 계신다는 것을 로마제국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부자들은 초대교인들의 생활을 통하여 부끄럽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막 들어와서 합력하게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없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우 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정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실행하고자 한다면 상당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위험하지 않은 이유는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너무나 없으므로 사회에 도전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몰려다니며 데모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하고 실제로 우리끼리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끄럽게 되어 견딜 수 없으므로 우리를 크게 대적할 것입니다. 우리가 크게 외치지도 않고 데모하지 않아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그 런데 공동체의 출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몇 사람이 예배당에서 모이든지 개인 집에서 모이든지, 함께 성경을 연구하면서 신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지, 또 어떤 것을 인정하고 어떤 것을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지 금 우리 사회에서 제일 강한 것은 미디어(Media)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기업들이 <미디어>를 살 수 없도록 정부에서 법으로 막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롯데나 대우나 현대 등 대기업에서는 방송국도 사고 싶고 출판사나 각종 신문사를 사고 싶어합니다. 정부에서 법으로 규제를 해서 주식의 반 이상은 살 수 없게 하고 주식을 공개하도록 대책을 세웠습니다만, 그러한 법을 만들었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한정된 몇몇 사람들이 재력을 모아서 땅도 사고 <미디어>도 사서 다른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지요. 땅이 없는 사람들은 힘이 없으므로 결국 지주들에게 가서 일자리를 구해야 합니다. 지주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말은 감히 할 수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하여 세뇌를 당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디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돈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광고를 주는 사람이 없으면 <미디어>는 운영되지 못합니다. 광고주들이 광고를 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건을 팔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이든 아니든 관계 없이) 사람들의 눈을 자극시켜 구매욕을 유발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미디어>란 결국 탐심을 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현대문화란 우상숭배하는 문화이며, 하나님을 싫어하는 탐심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탐심의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탐심의 문화를 인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탐심의 문화를 거부하는 입장에 서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가 되기 원하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떠난 문화를 거부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거센 현대문화의 물결을 대적할 힘이 있습니까? 멸시와 희롱을 당할 수 있습니까? 심한 오해와 무시당하는 것을 견딜 수 있습니까? “바보! 미치광이!”란 소리를 듣기 두렵습니까? 주를 위하여 기꺼이 미쳤다는 소리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요? 함께 모여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연구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면 지혜를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참으로 공동체를 실행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에 서 어떤 신자들이 중국 고유의 대가족제도에 맞추어서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공산당 정부가 그들을 핍박해도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공동체를 만들고, 한 공동체가 확장되면서 다시 꿀벌들이 분봉하는 식으로 계속 다른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예수가정운동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가정운동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인 1920년도에 시작된 것으로서 1939년 공산당이 세력을 잡았을 때는 공동체의 뿌리가 이미 내려진 뒤였습니다. 80년도에 어떤 모임에 참석했을 때 중국교회에 대해 소식을 들었는데 계속 교회가 부흥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까 공산치하에서 계속 성장되고 번지는 것은 ‘작은 양무리’ 운동과 ‘예수가정’ 운동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기성교회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기성교회 안에 교제가 부족하고 실제적인 코이노니아가 없었기 때문에 핍박을 견디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성직자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했기 때문에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감옥에 들어가자 곧 교회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중심으로 모이던 신자들이 교회건물을 빼앗기고 회관이나 창고로 용도가 변경되자 모일 장소가 없었으므로 또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양무리’ 운동과 ‘예수 가정’은 원래 예배당이나 성직자에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은 코이노니아였습니다. 어느 곳이든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 줄 알고 신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심한 핍박을 받아도 이에 굴하지 않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계속 발전해서 지금은 50배로 확장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우리가 그와 같은 시도를 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면 됩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조그만 비유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 에는 계속 자라다가 때가 되면 그물을 만들기 시작해서 고치 속에 들어갑니다. 고치 안에서 잠을 자는데 누에의 몸에는 특수한 세포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그 세포들이 애벌레로 사는 동안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랐을 때는 몸에서 무슨 성분이 나와서 고치를 만들고 잠을 잡니다. 자는 동안 이 세포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서로 연결해서 퍼지고 마침내 이 세포들이 애벌레의 나머지 부분을 다 먹어버립니다. 그리고 누에벌레가 없어지고 대신 나비가 나오지요! 벌레가 변해서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비의 세포가 벌레 안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조그만 세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세포가 퍼지고 퍼져서 변화를 일으켜서 마침내 나비의 몸과 날개 등 여러 지체가 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창조의 과정입니다.

교 회 안에도 두서너 명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 함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퍼지고 퍼져 마침내 서로 연결되어서 완전히 새로운 교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비와 같은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잠자는 쓸데없는 애벌레와 같이 기어가는 교회에서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부활의 교회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싸우거나 요란한 외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벌레에 속하는 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나도 성령을 받아야겠다. 성령을 받아서 나비에 속하는 신자가 되어야지” 그래서 육적인 신자들이 점점 없어지는 대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들이 많아져서 교회 전체가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방법으로 신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충실히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주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부패한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심판을 받겠지만 우리의 할 일은 나 자신부터 모여서 조그만 공동체를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퍼지고 마침내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받은 우리 신자들에게 부여된 책임인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