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공동체란 무엇인가(1)

대천덕 신부님(우리와 하나님에서)

오늘의 주제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에는 그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관계 있는 말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보면 이 말이 어느 정도 중요하고 기본적인 말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개역개정)

여 기서 ‘교통’이란 원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하는데,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말입니다. ‘코이노니아’란 단어는 성경의 세 가지 기본적인 말 중의 하나입니다(은혜, 사랑, 코이노니아). 그런데 일반 신자들이나 신학자들조차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세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사랑, 은혜, 믿음’, 혹은 ‘사랑, 은혜, 소망’, 혹은 ‘시랑, 믿음,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은혜와 교통’(코이노니아) 이 제일 중요한 말인 줄은 도무지 짐작조차 못합니다(심지어는 축도조차 ‘성령의 코이노니아’란 말 대신 ‘성령의 감화, 감동’이란 말로 흔히 바꾸어 버려 원래의 뜻과는 전혀 어긋나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수 백년 동안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대신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기독교의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많지만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어졌기 때문에 미안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 못하게 된 것뿐입니다. 잘못 해석하든지 아예 이 단어를 무시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처음 300년 동안에는 교회 안에서 코이노니아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중히 여겨서 시도신경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교 통’이란 코이노니아의 또 다른 번역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코이노니아를 실행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몇 백년 동안 “그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면 “예. 그 말은 죽은 자와 사귐이 있다는, 즉 우리가 죽어도 성도 사이에 사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라고 흔히 대답합니다. 산 사람 사이에 사귐이 없고 죽은 후에 성도와의 사귐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수백 년 동안 교회가 그렇게 어리석은 해석을 하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들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산 자 가운데 코이노니아가 없는데 죽은 자와 코이노니아를 실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일까요? 죽은 자와 코이노니아하는 것은 전혀 도전을 주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실제적인 내용이 없어요. 재물을 통용하는 것을 피할 수 있고 기독만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신 자와 코이노니아를 실행하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이웃을 위하여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실제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은 그만두라!”고 막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예를 들면 피터 왈도(Peter Waldo) 시대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 공동체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독신자였기 때문에 재산 문제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가난하게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공동체에 들어간 독신자들의 숫자도 별로 많지 않아서 교회에 그다지 큰 도전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 이 사람들은 얼마나 거룩한 분들인지 몰라요! 참 존경합니다”라고 부추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부르심이 없어요. 나는 부자로 살아도 괜찮아요. 여러분들은 독신자로서 가난하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 나에게는 가족이 있으니까 재산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자녀들 교육문제도 해결해야 되지요”라고 말합니다.

피터 왈도는 12세기경 사람인데 그때까지 약 천년 동안 독신자들만 따로 공동체 생활(즉 수도원 생활)을 했습니다. 피터 왈도 때 비로소 ‘코이노니아란 모든 신자들이 실행해야 하여 가족을 가진 사람들도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하면 좋겠다”고 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너무 큰 도전을 받아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소리다”라고 크게 만대하고 이단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도무지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피터 왈도를 심하게 핍박해서 그의 제자들이 얼마나 심한 고문을 받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적색분자 취급을 받았어요. 나무에다 매달고 태워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으로 죽어갔습니다. 교회가 그만큼 잔인한 짓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마침내 피터 왈도 운동은 다 파괴되어 버리고 소수의 제자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들도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용하게 살고 지금은 모두 일반 장로교회 신자가 되었습니다.


**피터 왈도(Peter Waldo) : 12세기 리용의 부유한 상인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게 살며 복음을 전파했다. 성 프란시스처럼 그도 자원적으로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는데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 신앙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던 사람들과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삶과 설교에 감화를 받고 그의 뒤를 따랐다. 교황 알렉산더 3세는 그들의 가난한 삶을 인정해 주었지만 주교의 승낙 없이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1179년). 이에 대해 피터 왈도는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84년 루이 3세에 의해 파문 당하고 교회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다.

그후에 메노나이트(Mennonite) 교회가 나타났습니다. 원래 ‘재세례파’(Anabaptists)라고 불려졌는데, 그것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모든 신자들은 공동체 생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물 론 그들이 다 똑같은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 우리가 일단 해봅시다”라고 했는데 더러는 “모든 신자들은 다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너희 것이 나의 것이라”고 해서 재산을 빼낸 일도 있었습니다. 도둑질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부류가 있었는데 후자와 같은 거짓 형제들 때문에 교회로부터 모두 다 이단이라고 정죄되거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해서 다시 교회로부터 심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신,구교 양쪽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런데 지금 재세례파가 한국에서 퍼지고 있는데 이단으로 몰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큰 교회 중의 하나가 침례교회입니다만 재침례교회파에 대해 반대하는 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노나이트를 핍박한 것은 재세례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문제는 핑계일 뿐이고 참된 이유는 경제문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이노니아’란 말은 ‘피 흘리기까지’ 필요한 말인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 코이노니아, 즉 공동체 문제 때문에 초래된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성도들에 대한 기본적인 축복말씀이라면 은혜와 사랑과 코이노니아는 기독교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필수적인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 면 ‘코이노니아’란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성구사전에서 ‘코이노네오’(Koinoneo)는 ‘to be a partaker of’ 네 번, ‘communication’은 한 번, ‘communion’은 네 번, ‘contribution’은 한 번,’distribution’은 한 번, ‘fellowship’은 열두 번, ‘to communicate’는 한 번, ‘코이노노스’(Koinonos)는 ‘companion’, ‘partake’, ‘partner’… 이렇게 가지각색 다른 번역이 나와서 이 낱말들이 동일한 단어에서 나온 말인지 평신도들로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국말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이노니아’, ‘코이노네오’, ‘코이노노스’란 원어를 번역할 때 ‘참여’, ‘연보’, ‘상통’, ‘사귐’, ‘교제’, ‘나누어 줌’, ‘동업’, ‘통용’, ‘속된’ 등 약 17가지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같은 말인지 알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희랍말 원어 성경에서 찾기만 하면 곧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제가 일기로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는지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새롭게 제자가 된 사람들이 그 정도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2)

여 기에서 코이노니아란 사도들의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도’란 준비한 기도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주의 기도문> 같은 것을 공동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냥 기도하는 것은 희랍어에서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날 함께 모여 특별한 기도를 한 것 같아요. 이미 배웠던 기도문을 열심히 합송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에서 ‘코이노니아’란 말이 처음 나온다는 것입니다. ‘서로 교제하는 것’이란 의미인데 서도의 가르침과 (성도 간의) 교제가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교회에서는 가르침만 중히 여기고 교제를 중요시하지 않거나 아주 가볍게 취급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함께 모여 떡을 떼고 기도에 힘쓴다’고 했는데 현대교회에서는 기도하는 것은 강조하면서도 떡을 떼는 것은 별로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석 달에 한 번 주의 성찬식을 행하고 더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나 성공회에서는 미사를 많이 드리지만 그것이 참으로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던 방식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함께 떡을 떼었는데 예식의 성격보다는 주의 성찬을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한다는 공동체 정신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43절에서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44절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용했습니다. 여기 ‘코이노니아’란 말이 나옵니다. 통용(通用)!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나누어 썼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인 표현도 아니고, 가벼운 교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요. 재산과 소유를 다 팔고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이 실행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교제는 아주 실질적인 교제였음이 분명합니다.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재산을 나누어 주는 실제적인 교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또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여 기도 떡을 뗀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매일 집집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숙한 성찬예식이었다기 보다는 실지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한 식탁에서 식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한 식탁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구체적인 표시였습니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가족처럼 더불어 함께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사 도행전 2장 42~45절을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중국말로 ‘쇠이자오 쒀’란 말이 있습니다. ‘물만두’란 뜻이지요. 물만두를 비유로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코이노니아를 ‘식사하는 교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먼저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또 유무상통하면서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지요. 이것을 ‘쇠이자오 쒀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 런데 물만두에는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만두는 껍질이 있지 않습니까? 껍질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별 맛이 없지요. 껍질 안에 고기가 있는데 만두의 참 맛은 그것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껍질이 없으면 속에 든 고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껍질로 꼭 싸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42, 44, 45절이 껍질이라면 43절은 그 속에 든 고기입니다. 42절에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즉 이로써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4, 45절도 경제문제를 취급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43절을 보면 무슨 말입니까?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은혜를 원하면 실질적인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보고 싶다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고린도 교회에는 능력이 많았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와 함께 교회 안에 문제도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라고 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있는 교회 안에 어떻게 병든 자가 많을 수 있습니까? 병 고치는 능력이 많은 교회 안에 어떻게 죽은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인정하지 않았고, 설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주의 성찬식을 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이 먼저 와서 다 먹어 버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늦게 와서 먹을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함께 떡을 떼었지만 실제적인 코이노니아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 편리한 대로 일찍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이나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늦도록 일하고 일찍 올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일이 다 끝난 다음에 교회모임에 나올 수 있었지만 먼저 온 사람들이 마 먹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 섬기는 정신이 부족하고, 서로의 입장에 대하여 무관심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은사가 있기는 했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하고 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는 어떤 사귐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진정 한 지체의 고통과 슬픔이 나의 것으로 와 닿고 있습니까? 예배 후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고 헤어지는 표면적인 교제뿐입니까? 교회 안에 궁핍한 지체의 필요에 얼마나 민감하게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까? 거처할 곳이 없고, 일자리가 없는 내 이웃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4장 32~35절을 봅시다. 여기에도 같은 ‘물만두 신학’이 나옵니다. 32절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제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물건을 코이노니아 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34~35절에서는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줌이러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자원적으로 재산을 나누었으므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코이노니아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33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도들의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은 것’이지요. 이와 같이 은혜가 충분히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코이노니아를 실행해야 합니다. 코이노니아가 없는 교회에는 그 은혜가 다 흩어지게 되는 법이지요! 물만두 껍질이 없으면 고기가 국물 속으로 다 흩어지고 말아서 결국은 고깃국도, 만두도 아닌 상태가 됩니다. 껍질이 있으면 그 안의 고기를 싸주어서 물만두를 맛있게 먹을 수 있지요.

그래서 코이노니아, 즉 공동체라는 것은 거짓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 기적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나누어 주는 것은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 편에서 하실 일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고 싶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서로 나누어 주고 서로에 대하여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할 때 은혜가 사라지고 병 고치는 능력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 너희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형편없이 취급하고 부자가 들어오면 좋은 자리를 권하느냐”고 책망한 야고보서에서 그와 같은 문제가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그에게 나눠 주어야 하는 반면에 부자가 들어오면 교회에 나눠 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을 볼 수 있겠지!” 속으로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찍부터 육에 속한 신자가 되어서 그런 판단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 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 2:1~12)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판합니다. “왜 가난하냐? 왜 믿음이 없느냐"?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텐데!” 그렇지만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탁하셨으며 믿음으로 그들을 부요 하게 하시고 또 자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모순 없이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중 물론 간음한 사람은 없겠지만 살인 사람은 없는지요? 많은 신자들이 “내가 언제 살인했느냐?”고 반문하겠지요. 요한일서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15~20)

“사 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일 4:18~21)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 재산을 나눠 주는 일이 항상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심리적인 위로나 말보다 내 이웃의 궁핍함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며 실제적인 도움을 줄 때 우리의 사랑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오 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핵 문제에 대해 거론합니다. 미국에서도 반핵 데모를 자주 하는데 교인들이 워싱턴 D.C에 모여 데모하는 기사를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해서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할 당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핵무기를 몰아내라!”고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3일마다 한 번씩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에 희생된 숫자에 필적하는 12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실에 대해서는 잠잠합니다. 과학문명이 이처럼 진보한 현대사회의 한 모퉁이에서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그들이 죽게 되었습니까?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자기 먹을 것 중에서 1/10만 나눠 주면 그들을 다 먹일 수 있을텐데 관심이 없습니다. 눈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무시해 버립니다.

캘커타에 가보면 길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길에서 태어서 길에서 자라나고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죽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어요. 한 평도 없어요! 죽을 때조차 한 조각의 땅도 허용되지 않아 그냥 강에다 던져 버리고 맙니다. 미국 속담에 “살아서는 땅 한 평 없었는데 죽을 때 반 평 주었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나마 반 평의 묘지조차 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토지문제 때문입니다. 악한 바알의 토지법이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주들의 탐욕이 그처럼 잔혹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생활수준이 자꾸 떨어지는 주입니다. 미국에 가보면 큰 건물과 화려한 복장, 멋진 자동차의 물결이 넘치는 것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잘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몇 년 전에 비해서 경제사정이 계속 침체되고 있는 주입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일반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하면서 온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집세조차 내기 힘든 실정이기 때문에 부인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리노’란 마을에 가면 일자리는 많은데 집이 없습니다. 리노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지만 살 곳이 없어요. 집 값이 워낙 비싸서 큰 부자들은 아름다운 맨션을 구입할 수 있지만 일반 노동자들을 위한 집은 없어요. 구세군 기숙사에서 유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실업자나 거지들은 아닌데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30년 전 미국에서 목회할 때 제 주위는 실업자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코이노니아회’를 만들어 서로 도와주고 일자리를 구하도록 노력하기로 해서 연락이 오면 사람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 해결되게 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그 모임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합력해서 일자리를 구해 주게 된 것입니다. 몇 년 후에 제가 그곳을 방문하여 보니 매일 성당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집이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거나 구걸하며 살아가는데 잘 데가 없고 맞이해 주는 사람도 없이 이 성당 저 성당, 이 예배당 저 예배당을 기웃거리며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뉴욕에 갔을 때 처음 본 것은 ‘갈색가방을 든 사람들’(brown bag people)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쇼핑백 안에 넣어 가지고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집도 없고 물건 둘 자리조차 없습니다. 밤이 되면 지하철에서 잠을 자요. 뉴욕에는 지하철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낮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살아가는데 캘커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뉴욕이 캘커타보다 더 춥다는 사실입니다. 캘커타는 따뜻해서 겨울에 길거리에서 잠을 자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밟힐 위험 밖에 없고 얼어 죽을 위험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뉴욕에서는 얼어 죽을 위험까지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크리스챤의 숫자는 많지만 서로에게 실제적인 책임을 질 마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 재산은 자신의 소유일 뿐 ‘이웃에게 나눠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크리스챤들의 일 년 수입이 500달러 밖에 안되더라도 50달러씩 십일조를 내면 전세계의 기아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부의 할 일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정부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물론 정부의 할 일도 있습니다. 불의를 막고 남의 땅을 빼앗는 사람들을 다스리도록 해야 하지만 세계의 정부들이 대부분 바알법으로 해서 토지권이 없어졌습니다(그렇지만 세속정부에게 정의를 실현하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교회가 먼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속정부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겸손한 자세로 법을 소개하고 우리의 실천하는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인권은 ‘토지권’입니다. 땅이 있으면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집을 건축할 수도 있고, 장사도 할 수 있고, 공장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업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이 없으면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결국 땅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일자리와 거처를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땅이 없는 사람들은 거지입니다. 땅이 없는 인텔리들은 대부분 고등거지입니다. 경제공황이 닥치면 갈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일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걸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한 부자가 교회에 약 6개월 간 다녔습니다. 그 교회에는 부자들이 아주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는 아주 멋지고 평화로운 저택에서 살다가 어느 날 일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실직한 사실이 부끄러워서 이웃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매일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는 척했습니다. 갈 곳이 없으면서도 의젓하게 차려 입고 마치 출근하는 것처럼 자기 차를 타고 집을 나선 것입니다. 몇 개월 동안이나 그렇게 생활했지만 이웃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있는 돈은 다 써버리고 일자리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공부도 많이 하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교인들에게 자신의 실직상태를 알릴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만 그 사실을 알 뿐 아무도 몰랐습니다. 신부님으로서는 어떻게 도와줄지 몰랐지만 만일 그 사람이 교인들 앞에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했더라면 다른 교인들이 금방 좋은 방법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교회 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멸시를 당할 줄 알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애써 쌓아온 체면이 다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코이노니아가 없는 교회였지만 예배당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주일날 나가 보면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꽉 찬 가운데 훌륭한 설교와 아름다운 찬양을 듣고 정중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집니다. 예배 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좀 나누면서 교제를 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적인 문제를 취급하는 일은 너무나 없습니다. 이론적인 종교밖에 없어요!

성경말씀은 신자들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봉사하고 서로 책임지지 않으면 살인하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인 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31~40)

미국에는 지금 집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교인들이 각기 자기 집으로 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원칙대로 하면 그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서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면 금방 서너 명쯤은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은 흔히 부끄러워서 말조차 꺼내지 못하거나, 또 말을 해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노동자 생활할 때 건축 일을 하러 어떤 마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값이 싼 여인숙에 숙소를 마련했습니다. 아주 형편없는 싸구려 여인숙이었습니다. 주일날이 되어서 교회에 나갔는데 좋은 옷을 입고 가서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 낯선 젊은이신데 잘 오셨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이 근처 어떤 회사에서 작업 중입니다.”
“그렇습니까?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요?”
“00 여인숙에서 묵고 있는 중입니다.”
“…”

친 절했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나를 더 이상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이 많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집으로 오셔서 같이 지냅시다”란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우리 교회에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싸늘한 표정을 접했을 뿐입니다.

예 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나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3일마다 12만 5천 명이 넘게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자들을 고소할 것입니다. “왜 믿는 자들이 우리를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돈을 아름다운 성전 짓는데 다 써버렸어요. 목사님을 위해 더 좋은 자동차 사드리기 위해 다 써버렸어요. 목사님께 좋은 옷을 해드리기 위해 써버렸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며칠 전에 어떤 손님이 저에게 13만원을 주면서 “신부님, 새 옷 사 입으십시오”라고 해요. 저에게 얼마나 옷이 많은지 모릅니다. 더 필요치 않습니다. 또 저의 체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이 나의 옷을 입기도 어렵습니다. 고맙다고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너무 미안해요. 없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고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셈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그 돈 13만원을 가지면 며칠 동안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공 동체는 한 교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가난한 이웃의 필요에 민감한 신자들이 나의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인 줄 알아서 서로 나누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글이 너무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