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가정교회 공동체 사역과 부흥

손종태 목사

성 경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 즉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상이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영적인 생명력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직분제도, 예배형식 등 다양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중에서 가장 현격한 차이점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오 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간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교회는 예배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 차례도 교회의 본질을 물리적인 예배당으로 표현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자체를 교회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전통적인 습관과는 무관하게 교회의 본질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시사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왜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배당을 교회라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 질문한다면 왜 성경에는 예배당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을까?[물론 사도행전이나 야고보서에는 회당(시나고그)에 관한 몇 차례의 언급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회당은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회당도 이 서신이 이방인 교회가 아닌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보낸 서신이기 때문이다.(약2:2이하)] 초대교회 교인들이 오늘날의 예배당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교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대교회는 거의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롬16:5에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언급하면서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Greet also the church that meets at their house.-NIV)”고 얘기하고 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때에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긴 사건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행8:3)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면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행각에서 모인 것(3:11)과 바울의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의 모임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행19:8-9) 그러나 솔로몬 행각에서의 모임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의 기적의 치유를 목격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면서 생겨난 일종의 전도집회였고, 두란노 서원에서의 모임은 일종의 훈련모임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예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공동체적인 성격의 교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믿는 이들의 집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를 일컬어 가정교회(house church)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가정교회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교회들이 가정교회였기 때문이다. 성경시대에는 가정교회가 모든 교회를 포괄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굳이 가정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오늘날과 같은 예배당의 등장은 4세기경 로마 카톨릭의 등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미 2세기경부터 이레니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 안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이원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의 배경에서는 평신도는 사역의 주체가 아닌 성직자의 돌봄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을 일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들 전체가 모이는 공간 즉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사를 통해 그동안 왜곡되어왔던 교회의 본연의 구조가 다시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본디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셨던 다섯 가지의 은사적 직임 중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오늘날 회복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마지막 때 일수록 모든 것이 성경 본래의 가르침으로 환원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본래적인 교회의 구조인 가정교회가 회복되는 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겠는가?

가정교회의 핵심가치

1.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사 실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의 교회들 가운데 가정교회는 미미하나마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이제 중국, 인도, 아프리카와 유럽, 미주의 곳곳에서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가정교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미한 경우는 이러한 건강한 운동 이전의 가정교회들을 일컫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아직 본격적인 가정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혹자는 이미 한국에도 자생적인 가정교회가 1천여 개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것이 건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운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엡2:20)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의 운동으로 엮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등장한 가정교회들은 이러한 기초를 외면하고 단순히 전통적인 교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의 도피적인 의식에서 시작된 경우들이 많았다. 이것은 결코 건강한 교회의 동기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들은 이것이 전통적인 교회가 주지 못한 코이노니아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건강한 의미의 코이노니아가 아닌 ‘상처공동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가정교회가 코이노니아를 빙자한 ‘상처공동체’로 전락하게 될 때 그들은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강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2. 코이노니아

그렇다면 건강한 코이노니아란 무엇일까?

초 기의 예루살렘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코이노니아)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쓴” 교회였다.(행2:42) 건강한 코이노니아란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 영향력 아래서 나누는 교제를 의미한다. 이 교제는 때때로 공동체 안에서의 죄 고백(약5:16)과 재정을 함께 나누는 삶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활발하게 전개될 때 건강한 코이노니아가 결핍된 전통적인 교회에서 추구하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과 더 나아가 근본적인 경제정의 문제까지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는 예배당의 마련을 위해 이모저모로 막대한 재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자연히 사역의 효율성을 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이러한 재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 교회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재정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혹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직접적인 선교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3. 성령사역

일 주일에 단 한 번 전체가 모이는 회중예배에서는 구체적인 성령사역을 행하는 부분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예배는 이미 확정된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의식이며 시간적인 면에서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구체적인 필요를 따라 은사와 능력을 풀어내는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의 가정교회에서는 그때그때마다 개개인의 필요에 따른 신적인 감지를 통한 자유로운 성령사역이 가능하다. 바울이 언급한 고린도교회의 예배모습-“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는 말씀은 오늘날의 전통적인 교회의 회중예배가 아닌 소규모 가정교회의 예배모습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는 자유로운 성령사역을 풀어낼 수 있는 구조일 뿐만 아니라 교인 개개인을 실질적인 성령사역에로 훈련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4. 선교공동체

앞 서도 언급한 것처럼 코이노니아가 가정교회의 소중한 핵심가치 중의 하나지만 만일 가정교회가 코이노니아에만 치중하다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인 선교적인 부분에 마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시대에 가정교회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선교 때문이다.

선교학에서 말하는 10/40창에는 전 세계 불신자들의 8-90% 정도가 살고 있다.(10/40창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는 이슬람과 같은 강력한 종교세력 혹은 공산주의와 같은 종교 자체를 대적하는 지역들에 살고 있다. 이 지역들에는 극히 일부만 빼놓고 예배당을 갖춘 전통적인 교회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핍박지역에서의 거의 유일한 선교적 대안이 바로 가정교회이다. 가정은 그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요소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러한 울타리 안에서 공동체로 모일 때에는 핍박에 대해 상당히 탄력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력한 핍박세력일지라도 그 사회의 가장 기본요소인 가정 자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종교에 대해 핍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가정교회가 핍박에 대해 얼마나 효과적인 선교의 도구인지는 과거 6-70년대 문화혁명기간의 중국교회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중국이 공산화 될 당시 중국 전체의 기독교인들은 50만 정도로 추산되는 숫자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 특히 6-70년대의 문화혁명기간 동안 모든 예배당은 폐쇄되고 신학교는 폐교되었으며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옥 혹은 순교되는 상황 속에서-거기다가 모든 성경은 압수 당하고 선교사들은 추방되는-중국교회는 그 운명이 다한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약 30년의 시간이 흐른 후 80년대 들어 중국이 서서히 개방되기 시작할 때 죽의 장막 너머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소교회’라 이름하는 가정교회들을 중심으로 그 동안 사도행전과 같은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9천만-1억 3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8-90%가 가정교회 교인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하늘 아래 가장 효과적인 선교방법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가 또 다른 전통적인 교회를 개척하려고 할 때에는 막대한 재정과 인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정교회의 경우는 그것이 상대적으로 대단히 쉽다. 특별한 장소도 필요 없고, 거기에 따른 재정의 부담도 없으므로 교회개척사역은 글자 그대로 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5. 영역별 교회

일 반적으로 볼 때, 교회가 전도하는 방법은 가정이나 직장, 학교 등지에서 불신자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교회(예배당)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구도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는 마음을 열지만 자신이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 안에 형성된 나름대로의 문화적인 배타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구도자 자신의 상황-예를 들어 주일에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든지 그의 직업상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 같은 경우-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정된 예배당을 중심으로 불신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 연예계, 언론, 학교, 스포츠계 등 각 영역별로 침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들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이다. 즉 직장에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했다면 그 직장 안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직장신우회 차원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완벽한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는 영역별 교회인 것이다. 소그룹 형태의 영역별 교회가 활성화 될 때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피터 와그너는 이러한 교회를 가리켜 corporate church라고 부르고 있다).

6. 만인제사장설의 실현

마 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 오늘날까지 만인제사장설은 글자 그대로 설(說)로만 머무르고 있는 느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여전히 성직자와 평신도는 구분되어 있으며, 사역의 주도권은 성직자들에 의해서 진행되며 평신도는 그것의 수혜를 입는 수동적인 그룹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동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성도들이 구비되어 직접적으로 사역하는(엡4:12) 만인제사장설이 실천되어야 할 때이다. 가정교회는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인 것이다. 각 가정교회마다 성찬식과 세례식 등 성례를 자체적으로 평신도-사실 이 단어 자체가 비성경적이다-가 이끌도록 하는 사역이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교라고 하는 것도 굳이 성직자에 의해서만 진행될 필요는 없다. 이슬람교의 경우 초기 10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개 대륙에 걸쳐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던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역사가들은 인류역사에서 있었던 최대의 군사적 정복활동으로 주전 4세기의 알렉산더의 동정과 주후 7-8세기의 이슬람군의 동,서정 그리고 13세기에 일어난 몽골군의 서정을 꼽고 있다). 이슬람교인들에게는 기독교의 목사나 불교의 승려와 같은 성직자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이맘’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글자 그대로 ‘인도자’일뿐 우리가 생각하는 성직자의 개념은 아니다. 이러다 보니 이슬람교에서는 그들의 믿음에 충직하기만 하면 특별한 영적 자질이나 권위를 갖춘 사제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무식쟁이나 걸인이라도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인도자)이 될 수 있다. 또한 평범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설교하기도 한다. 이것이 이슬람교가 오늘날 세계선교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

7. 네트워킹

가정교회와 셀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셀은 한 지역교회의 하부구조이다. 그러므로 셀은 그 지역교회 지도자의 영성과 가르침을 복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반면에 가정교회는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교회이다. 성경에 근거한 중요한 핵심가치는 모든 가정교회가 공유하지만 원칙적으로 가정교회는 그 하나하나가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교회들은 사도적인 권위 아래서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야 한다.

래리 크라이더(Larry Kreider)는 가정교회가 네트워킹 되지 않을 경우의 위험성을 자신들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하는 교만, 기존교회에 대한 두려움, 고립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정교회의 현재와 미래

오 늘날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륙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가정교회를 일으키고 계신다. 이것은 비단 중국교회만의 경우가 아니다. 인도에서는 1993년에 외과의사 초우드리(Choudrie)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힌두교권인 마드라 프라데쉬(Madra Pradesh)에 가정교회를 시작한 후 약 6년 동안 3천개의 가정교회를 세워 5만 명 이상을 구원하였다.

권위 있는 기독교 리서치 기관인 바나 그룹(The Barna Group)의 보고에 의하면 2006년 미국교회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는 가정교회가 급속히 성장한 것이며, 가정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교인들보다 영적인 만족도가 20% 정도 높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제 가정교회는 유럽과 미주, 라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북미지역의 DAWN 사역을 관장하고 있는 마이크 스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여 러 도시에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분열과 질투 대신에 각 도시에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난하는 말 대신 겸손한 행동으로 알려질 것이다. 도시 전역에 회개와 화해와 회복이 나타난다.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있고 그들은 이웃을 축복하며 이웃 가정을 회복시킨다. 신약성경과 같은 공동체가 빠르게 등장한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가득 덮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함께 하며 말씀과 행동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왜 가정교회와 다윗의 장막의 결합인가?

일 전에 피터 와그너와의 교제에서 그는 이 시대의 새 술(new wine)은 단순한 성령사역이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이 시대의 새 술은 사도와 선지자 운동을 바탕으로 한 두 가지, 가정교회와 다윗의 장막이라고 얘기하였다.

그 때 필자는 피터 와그너에게 우리가 계시적으로 받은 비전은 그 두 가지(가정교회와 다윗의 장막)가 결합된 모델인데 외국에 이러한 사례가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아직 그러한 구조는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한 번도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대단히 좋은 구조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가정교회와 다윗의 장막이 연결된 구조를 추구하고 있는가?

만 일 가정교회 운동만 진행할 경우에는 그것이 사도적인 네트워크 안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타의 전통적인 교회들이나 선교단체들과의 연합의 기회는 거의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가정교회는 이 시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러 대안들 중의 하나이지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낡은 가죽부대라도 버리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낡은 가죽부대는 낡은 가죽부대 나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단점을 해결해 주는 것이 다윗의 장막이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도시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정교회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교회들과 선교단체들 그리고 다양한 예배사역팀들이 연합함으로 큰 그림에서 도시적인 연합을 추구할 수 있다. 가정교회는 다윗의 장막에 참여함으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영적인 비전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에 다윗의 장막만 갈 경우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가?

다 윗의 장막은 24시간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함으로 신부의 영성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영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인격적 성숙은 수직적인 관계로만 완성되진 않는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영적, 인격적 완성은 다른 지체들과의 수평적인 코이노니아가 동반될 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교회와 다윗의 장막(우리는 이것을 One Thing House라고 부르고 있다)이 연결된 구조를 계시적인 비전으로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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