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모 목사 (라파공동체)
그 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고귀한 사명의 하나는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셨습니다.” 신학은 선포(Preaching), 가르치심(Teaching), 고치심(Healing)을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규정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 3대 사역을 균형 있게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마9:35)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마10:1).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이 치유의 권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위에 주어져 있습니다. 치유 사역은 어떤 특정한 교회 혹은 공동체만의 사역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공동체 위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주신 거룩한 사명입니다.
의학이 발달한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교회의 치유 사명은 급속도로 ‘의사’와 ‘병원’으로 이양되었습니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교회의 치유사역은 오순절 계통의 성령 사역자들과 몇몇 신령한 능력을 지닌 부흥사들이나 치유 사역자들의 손 안에 맡겨진 특수사역이 되어버린 감마저 있습니다. 교회와 공동체는 이 잃어버린 ‘치유 사명’을 시급히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개인들을 치유하여야 합니다. 스스로 양도하거나 내어버린 치유 사역과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치유의 용례와 의미
구약성서에서 치유를 뜻하는 단어는 ‘라파’(rapha)로서, 이 어근에서 파생한 다양한 동사와 명사의 파생어들이 히브리어 구약성서에 86회 나타납니다. 그 기본적 의미는 ‘함께 바느질하다’는 뜻으로 피부상태를 회복시키고 치유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상처의 가장자리를 꿰매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고 구약성경에서는 “회복시키다, 완전하게 하다”의 의미로 주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창 20:17, 출 21:19, 대하 30:20), 파괴된 사물의 보수(왕상 18:30, 렘 19:11), 마시는 물의 정화(왕하 2:22, 겔 47:8~9), 그리고 황폐화 되고 전염병에 폐허가 된 땅의 재건(대하 7:13~14)의 의미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신약에서 치유와 관련된 단어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이들 치유를 의미하는 동사들 가운데 가장 흔히 쓰이는 동사는 ‘데라퓨오’(Therapeuo)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봉사’ 또는 신에 대한 ‘예배’라는 의미를 갖는데(행 17:25) 이 봉사의 분야들 중 하나가 바로 환자들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동사는 육체적 질병의 치유와 관련해 사용되지만 귀신 축출(exorcism)과 관련해서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마 4:24; 눅 6:18 등). 이 단어는 예수의 치유사역을 묘사하기 위해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내보내면서 그들이 수행하도록 위탁하셨던 치유를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마 10:8; 눅 10:9).
‘이아오마이’(Iaomai)는 ‘의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이아트로스’(iatros)라는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의사였던 누가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서들 가운데 치유를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 가운데 소조(sozo)라 는 동사는 매우 흥미로울 뿐 아니라 건강과 치유에 관한 신약성서적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안전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소스’(sos)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본래 이 동사의 의미는 ‘안전하게 하다’였고, 신적 혹은 인간적 간섭에 의해 발생되는 자연의 위험이나 재해로부터의 구원과 관련해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그것은 위험,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 의미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 동사는 ‘잘되다’ 또는 ‘온전해 지다’라는 뜻으로 번역되며 질병, 마귀, 또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는 소조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12절은 믿음에 의한 영적 구원을, 36절은 귀신으로부터의 구원을, 48절의 경우는 질병에서의 치유를, 50절의 경우는 죽음에서 일으킴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례를 통해 기독교의 치유 개념과 구원 개념은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다양한 정도로 중복되고 결코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포카히스테미’(Apokahistemi)는 ‘이전 상태로 회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마가복음 8장 25절에서 맹인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고려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문둥병자들을 치유하셨던 두 사건(마 8:1~14; 막 1:40~45; 눅 5:12~15, 눅 17:11~19)에서 사용된 ‘깨끗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닌 ‘카타리조’(Katharizo)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치유의 ‘사회적 요소’입니다. 제사장이 그들의 병이 사라져서 깨끗하게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깨끗함을 입은 것에 대해 적절한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 곧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신분이 회복되고 복권되었던 것입니다.
2. 치유 사명의 회복을 위하여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라파, 곧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구원자요 치유자로 역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시고 사명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데라퓨오’(Therapeuo)나 구원을 뜻하는 ‘소조’(Sozo)가 치유의 의미로 복합적으로 사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치유라는 단어에는 자연과 세상, 사회의 치유라는 관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치유 사명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필요로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 문제의 핵심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습하고, 금권타락선거가 만연하며, 물신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건강해야 할 교회가 세속의 것들에 의해 심하게 부패되고 오염되었습니다. 곧 병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치유자 예수님을 정녕 필요로 하는 곳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비극입니까?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병든 교회가 자신이 병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겠다고 나서는 볼썽사나운 모습입니다. “주님, 내가 병들었나이다. 우리가 병들었나이다. 우리를 먼저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살겠나이다.” 이것이 병든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어야 할 첫 번째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건강한 교회와 공동체들은 이 세상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사역에 헌신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이 시대는 병든 시대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도와 경쟁에 내몰리며 황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병들었습니다. 교회가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세상의 사람들은 “병든 죄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과 구원하는 일은 흔히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구원의 깃발만큼 치유의 깃발도 높이 들어 올려야 합니다. 최근 20년 사이 한국교회의 트렌드는 ‘전도와 선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전도와 선교 역시 중요한 교회의 기능이자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혼구원의 미명 하에 교회성장과 자랑, 세력 과시의 도구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를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공격적 접근을 잠시 멈추고 우리는 이 세대의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멈추어 서서 세상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 울음 소리, 한숨 소리,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자들, 병든 자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 교회와 공동체는 멈추어 설 때입니다. 고요함에 머물 때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연약함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자연도 세상도 사람도 병들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주님을 향해 치유의 손길을 기다리는 저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구원과 치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만이 이 병든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을 치유하는 공동체
얼 마 전 한 목사님이 저희 공동체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미 한 교회를 분리개척 시킨 이후 또 한 교회를 분리 개척하려 하는데 그 교회가 평범한 일반(?) 교회가 되기보다는 알코올중독자들에 대한 치유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공동체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서 저희 공동체를 방문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고민이 십분 이해되었습니다. 45,000개 이상의 교회가 넘쳐나고 있는 현실에서 뭔가 새로운 모색이 필요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300만 명 이상의 알코올중독자와 300만 명 이상의 도박중독자, 그리고 300만 명 이상의 인터넷(게임) 중독자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 100만 명이 넘는 마약중독자, 쇼핑중독자, 성중독자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문적인 치유가 필요한 중증의 병자들입니다. 한 가족을 3인 기준만으로 추산해도 우리나라에는 중독이 초래한 깊은 상처를 안고 신음하고 있는 약 3,000만 명 이상의 중독자와 가족이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창궐하고 있는 중독이라는 병은 육체의 병이자 마음의 병이요, 영혼의 병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체적 삶과 영적 수련을 통한 치유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충청지역에는 알코올중독치유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라파 공동체와 상담치유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열방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들 공동체에는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가는’ 목회가 아니라 ‘오게 하는’ 목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기회를 말합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 패러다임이 변화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성교회는 차고도 넘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필요로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독교 공동체는 치유를 ‘전문적’으로 감당하는 ‘기독교 치유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교회를 분리개척 하는 것보다 치유공동체를 분리 개척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필요와 세상의 필요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여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으로 신음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두 손 들고 자발적으로 나아오는 기독교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땅에 떨어진 기독교의 위상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위의 경우는 기독교 공동체가 직접적인 치유를 감당하는 경우입니다만 다른 측면에서는 ‘치유의 영성과 향기’를 제공하고 세상으로 흘려 보내는 사역을 기독교 공동체가 감당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치유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깊은 산 속 옹달샘’이나 마음 수련 공동체와 같은 비기독교적 명상수련센터가 광범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무엇에 목말라 하고 있는 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들의 갈증은 말할 것도 없이 영적인 갈증입니다. 세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쉼과 안식을 제공하고 영혼의 평화를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얻어질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그리스도의 치유의 영성과 향기로 방문자들의 영적 갈급함을 해결해주는 아름다운 장면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떼제 공동체는 ‘치유의 영성과 향기’를 제공함으로써 도시와 소통하고 있었고, 농촌과 전원 속에 자리 잡은 기독교 공동체가 어떻게 농촌을 살릴 수 있는 지에 대한, 이른바 사람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생생한 사례가 되고 있었습니다. 수도치유영성 공동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독교 공동체가 필요한 까닭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상아탑이나 그들만의 리그에 묶여 있을 수 없는 역동성을 본래의 속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그것은 역동적으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교회가 공룡화 하고 거대화 될 때 기독교 복음의 역동성은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럴 때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복음의 역동성은 작지만 힘 있는, 그리고 래디컬한 기독교 공동체들에 의해 발휘되어 왔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교회와 공동체들은 시대의 새로운 요청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응답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이미 개신교의 퇴락의 징후가 뚜렷이 포착되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서 그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공동체가 개인과 사회를 치유하는 “치유의 사명과 기능”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외침은 늘 있어왔던 그저 그런 담론의 제기가 아니라 진정 우리 시대 기독교의 갱신을 위해 래디컬을 지향하는 기독교 공동체들 앞에 날카롭게 제기되는 진지한 담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과 북의 분단과 분열의 치유, 가진 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의 양극화의 치유,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치유, 사회적 제반 갈등의 치유, 병든 교육의 치유 등등의 영역으로 확장됨으로써 세상을 치유하는 기독교 공동체, 대안공동체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 위대한 전환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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