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왜 소그룹 목회인가?

 

왜 오늘날에 와서 소그룹 목회가 다시 한번 각광을 받고 있는가? 왜 소그룹 목회가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면 커다랗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성경적인 교회론이 소그룹 목회를 지향한다는 것과, 둘째는 시대적인 필요가 소그룹 목회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im) 사회에서 기술과 과학의 발달은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지만 ‘인간 소외’라는 커다란 문제를 동시에 야기 시켰다. 최근에 와서 소그룹 목회에 다시 한번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소그룹 목회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전통적인 목회관(牧會觀) 및 목회현장의 문제점
한국교회는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성장이 가져다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옥한흠 목사는 이것을 ‘삼허현상’(三虛現象)이라고 진단하였는데, 삼허 현상이란? 허수(虛數), 허세(虛勢), 허상(虛像)이다. 허수란 한국 교회가 그 동안 통계에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허세란 사회 각 분야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은데 비해 그 영향력이 미미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허상이란 한국교회에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평신도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지 못해 불신자와 그 차별성을 보이는데 실패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 두란노, 1999), pp.22-29.
즉, 한국교회가 커다란 건물과 많은 예산, 1천만 명에 가까운 신자 등을 자랑했지만 그 내면에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목회관에 치명적이고 비성경적인 원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주체(주인)가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라는 생각이다. 옥한흠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한 교회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을 ‘평신도의 재발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Ibid., pp.34-38 참조
교회사를 보면 적어도 4세기까지 평신도와 교역자의 구분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제도적인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고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 피라밋 모형의 계급구조가 생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교역자와 그것에 순종해야 하는 평신도로 구분된 것이다. 사실 교역자를 제외한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평신도’라는 말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 ‘평신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λαος’(하나님의 백성)이다. 세속 헬라어에서는 ‘λαικος'로도 사용되는데, 그 의미가 ‘전문가가 아닌 사람’, ‘배우지 못한 무식자’, ‘성직을 받지 않은 일반신도’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가 역사적인 과정들을 거치면서 고착화(固着化)되어 교회의 98% 이상을 차지하는 평신도는 교회의 객체가 되었고, 교역자가 교회의 주체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로 많은 수의 평신도가 자기의 부르심과 은사, 권한, 책임을 알지 못하고 잠자게 되었다. 이러한 잠자고 있는 평신도를 깨워 교회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갱신이라고 옥한흠 목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교역자와 평신도와의 관계
그렇다면 교역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잠자고 있는 평신도를 깨워 교회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면 교역자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양극단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는 ‘교권주의’로서 목회와 교역을 신성시하여 그들을 ‘성직자’라고 부르며 신적인 권리를 강조한다. 두 번째는 ‘반 교권주의’로서 목회와 교직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양 극단의 주장은 올바르지 못하다. 교회 안에 세워진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보면 교역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셨는데, 그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을 주셨는데, 그 목적이 바로 교회의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무장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골 1:28 참조). 교회 안에 사역은 교역자가 도맡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되고 준비된 성도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역자와 평신도의 관계인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이 부르짖었던 ‘만인제사장설’인 것이다.

3. 성경적인 교회론
이 문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교회론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의한다면 네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개념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천주교의 교회론과 다르다. 천주교는 교황이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교회를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직자인 신부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는 등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분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 교역자(목회자)는 교회의 머리가 아니다. 성직자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교역자라는 특정한 집단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일하신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개념은 교회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복음을 듣고 회개한 다음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셋째는, ‘은사의 공동체’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은사가 주어진다. 은사는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교역자의 역할이 드러나게 된다. 교역자는 각 성도들에게 부어주신 은사들을 발굴하고 세워줌으로 각 성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이다. 교회는 이 두 가지 기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예배와 말씀, 기도를 위해 교회는 모여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전도와 사역을 위해서 세상으로 흩어져야 한다. 즉,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교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 교회론의 정립과 교역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서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⑴ 교회의 주체는 교역자가 아니라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신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유기체적인 교회 조직 안에 허락된 영적 질서로서의 직분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교역자와 평신도의 기능(function)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교역자의 기능은 평신도들을 준비시키고 무장하는 것이 주 기능인 것이다. 말 그대로 목양인 것이다. 그리도 교회 안에서 주된 사역은 교역자를 통해 준비된 평신도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⑵ 평신도들을 준비시킨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각자의 은사를 개발하여 받은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은사 공동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사를 어디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소그룹 목회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예배 중심적인 목회 환경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너무 예배 중심적인 목회를 추구해 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다양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릭 웨렌(rick warren)이 ‘새들백 교회 이야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교회는 전도(outreach)와 예배(worship), 교제(fellowship)와 제자훈련(discipleship), 봉사(service)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예배라는 방법으로 다른 모든 기능들을 대처하려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안에서는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역자가 인도하고 설교하는 예배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성가대와 대표기도, 헌금위원 뿐이다. 그것은 특별한 은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생활에 어느 정도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을 받게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목회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적합한 환경은 소그룹이라는 것이다.
⑶ 예배 중심의 목회 환경은 또한 성경적인 코이노니아(친교)가 불가능하게 만든다. 앞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흩어지는 상황 속에서는 각 사람이 들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에 적용하는지 점검하기란 정말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신앙과 삶의 분리를 가져다주고 있다고 판단되어진다. 더불어 각자의 문제들(가정, 직장, 자녀, 부부관계, 건강, 재정 등)을 숨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결과를 낳게 만든다. 반대로 소그룹 환경은 삶의 나눔을 통해 신앙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하며, 각자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⑷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바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이 바로 소그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의 기능은 활발히 잘 감당했지만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기능은 소홀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으로 흩어진 교회가 세상 안에서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소그룹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⑸ 종교개혁을 통해 ‘만인제사장’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그것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소수의 성직자가 독점하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돌려준 것이 첫 번째 종교개혁의 중요한 성취였다면, 이제 소수의 교역자가 독점하던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돌려주어야 하는 과제가 남게 된 것이다. 빌 백햄은 이것을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시대적 요청으로서 소그룹 목회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요즘 셀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놀라운 부흥의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는 시대적 필요에 가장 부합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셀 교회(소그룹 교회)는 포스트모던니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정감과 소속감을 갖길 원하고, 개인적인 돌봄을 요청할 때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소그룹이라는 환경을 가지고 접근하였기에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전도 방법으로서의 소그룹 환경의 필요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복음을 들려주는 것에는 어느 정도 많은 노력을 해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을 보여주는 면에는 소홀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니즘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는 현실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종말론적인 선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죽어서 가는 천국보다는 바로 살고 있는 현실이 더 실감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은 천국의 삶, 천국의 소망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소그룹이라는 것이다. 소그룹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교제와 나눔을 통해 복음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세계적인 인구폭발에 대한 대안
70,80년대만 해도 한국교회는 인구성장률을 능가하는 교회성장률을 일구어 내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는 인구성장률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인구성장률보다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폭발적인 인구성장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소그룹 목회라는 것이다. 소그룹 안에서의 재생산과 번식은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3. 목회 환경의 변화
한국교회는 지난 몇 십년동안 변함없는 체제와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는 놀랍게 변화되고 있다. 빠른 도시화와 인터넷의 보급,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생활 방식뿐만 아니라 사고와 가치관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변화에 교회가 발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지난 옛날 방식에 매여 현상 유지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바로 소그룹 목회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왜 소그룹 목회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것은 시대의 요청이자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즉, 21세기라는 시대에 적절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소그룹 목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이다. 단지 시대적 방법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그룹 목회를 단지 교회 성장을 위한 시대적 방법론으로 이해한다면 많은 면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교회의 본질을 찾아간다는 면에서 소그룹 목회를 접근한다면 원리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방법론과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에 적합하다면 반드시 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하루 빨리 한국교회가 교회의 바른 본질을 회복하는 운동으로서 소그룹 목회를 정립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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