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변하는 것만이 살아 남는다!

 

계절이 바뀌면 사람에게 있어 제일 먼저 무엇이 바뀝니까? 무엇을 갈아입기 시작합니까? 그렇습니다. ‘옷’입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변하면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한 겨울에 반팔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으면 안 됩니다. 얼어 죽습니다. 물론, 가까운 일본에 가면 유치원과 초등학교 아이들이 한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등교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 부모들은 자녀들을 강하게 키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것처럼 동일한 원리가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시대가 바뀌면 교회도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시대가 너무나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옛날에 입었던 옷을 계속 입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어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대간의 차이는 있지만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 구분 없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교회가 세상 탓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하나?”, “말세야 말세! 쯧쯧쯧”,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더 악해져서 교회에 나오려고 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적인 원인이 세상의 타락에 있습니까? 교회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교회는 어떠한 노력을 했습니까? 현상유지에만 급급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선 관심도 쓰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빨리 자각하고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알맞은 옷을 새롭게 입어야 합니다.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자는 말인가?” 당연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갈 수도 없지만 따라가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개혁과 변화시켜야 하지 세상을 좇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달되도록, 복음이 들려지도록 하기 위해선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훼손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그릇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사람들은(앞으로 더 그렇게 되겠지만) 내세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이 현세입니다. 지금입니다. 오늘입니다. 오지금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삶을 사느냐가 그들에겐 유일한 관심이요 초점입니다. 좀 더 행복하고 즐겁고 편안하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전혀 딴 이야기들을 합니다.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에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들려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로 채널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듣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우리 선배들의 실수를 다시 반복해야 합니까? 단지 현세적인 축복만을 다시 외치고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다시 축복만을 가르쳐야 합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요구하는 복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복은 차원과 순서, 내용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 그래도 교회들이 종말론적인 비전을 잃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까? 선포하지 말아야 합니까?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히 9:27)이라는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해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동안 교회가 놓치고 있었던 중요한 복음의 다른 내용들을 강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단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누리고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미래적인 측면이라 함은 심판 이후에 있을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적인 측면이라는 것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누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천국(혹은 복음)의 미래적인 측면은 강조하고 선포하였는데, 현재적인 측면은 많이 무시하였습니다.
즉, 이제는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복음과 천국의 소망, 위로, 기쁨, 행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가정이 세상의 가정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가정 안에 소망이 넘쳐야 하고, 기쁨이 넘쳐야 하며, 기도와 찬송이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당신은 가정은 정말 행복해 보이는데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바로 우리 가정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은 예수님을 섬기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그 분으로 인해 매일이 기쁘고 행복하답니다.” 이렇게 될때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삶은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공허와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이 깨어지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남편과 아내, 자식들이 서로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밀립의 법칙-양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시작하여 점점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서 위로받고, 격려받을 때가 없습니다. 주변이 모든 사람들이 적이요 경쟁자입니다. 사랑과 친절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럴 때 교회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위로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품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여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구조로서는 그들을 품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교회의 구조로서는 그런 사역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그룹 사역들을 활성화 시켜서 그 소그룹 안에서 그런 섬김과 사랑이 나누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모든 회중들이 모이는 예배 중심의 사역들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왔습니다. 한번의 예배, 한번의 설교로 모든 신앙생활을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커다란 단점이 있습니다. 교제와 나눔, 은사의 활용과 삶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단점인 예를 든다면, 일주일 2-3번 교회에 나와서 앞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 집에 간다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와 삶의 나눔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친교의 시간들이 있지만 대부분 간단한 식사가 하고 그냥 돌아가든지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교제는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경험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사랑의 공동체, 은혜의 공동체 안으로 초청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구조를 빨리 바꾸어 진정한 나눔과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가 가능해집니다.
이런 차원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런 것 말고도 많은 부분에서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계속 뒤로 미룰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언제까지 지난 날의 체제와 조직만을 붙잡고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과의 채널을 회복하기 위해 뼈아픈 구조조정의 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아니 살아남는 차원을 떠나 주님의 맡기신 지상대명령 - 땅 끝까지 가서 복음전하고 제자삼는 일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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