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교수(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들어가는 말: 기독교신학과 성결론
한 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성결론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성결론은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이다. 성결교회는 중생한 신자는 성결을 추구해야 하며, 신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결한 삶에 있으며, 또한 모든 신자는 다시 오실 주님을 성결한 삶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결교회를 웨슬리안 교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사실 성결에 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칭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종교개혁이 간과한 또 다른 중요한 성서적인 진리인 성결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자신이 세운 감리교의 존재 목적이 성결의 전파에 있다고 주장하며, 혹시 성결을 전파하지 않는 감리교가 생길까 봐 염려된다고 말했다. 사실 성결교회는 기존의 감리교가 성결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하고, 웨슬리의 정신에서 벗어났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는 초시대 감리교의 정신으로 돌아가려고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성결은 성결교회나 웨슬리안교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성결을 강조하여 왔다. 동방과 서방교회 교부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Christian Perfection)을 강조하여 왔다. 물론 동방교회의 온전한 기독교인의 개념이 플라톤적인 요소가 있고, 서방교회의 그 개념이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성결론을 처음으로 말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이 가지고 있는 성결론을 복음적으로 재확립했다는데 있다.
성결, 혹은 거룩(holiness)은 기독교 전통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본질은 윤리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거룩의 체험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루돌프 오토(Rudolf Otto)나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같은 유명한 종교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종교의 본질적인 위치는 진(眞)도, 선(善)도, 미(美)도 아닌 성(聖)에 있다. 그래서 성은 종교적인 인물이나, 장소, 혹은 사건을 설명하는 말로 쓰여 진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을 폭넓은 기독교전통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I. 성결의 정의와 비슷한 용어들
많은 사람들이 성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성결에 대한 용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전통에서 성결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성화,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이 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신화(deifi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성결의 신학적인 의미를 밝히기 전에 우선 이런 용어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신앙으로 순간에 받을 경험이다. 이 은혜는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하여 현저한 능력을 주심이라.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음에 신앙이 유일의 조건됨과 같이 성결도 오직 신앙으로 얻는 은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헌장은 성결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헌법은 “우리는 예수의 대속적 보혈과 성령세례로 말미암는 성결을 믿는다.”는 전제 아래 성결의 뜻, 의무, 필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1. 성결의 뜻 (의의): ‘성결’이라 함은 ‘거룩’=‘정결’=‘성령세례’=‘불세례’=‘완전한 사랑’등의 말로도 표현한다. 이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성결을 뜻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성결을 상대로 하여 받는 상대적 성결을 뜻한다. 곧 타락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구속을 받아 무죄의 상태가 됨을 뜻함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보혈과 성령세례로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 봉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주시는 은총이다. 이 은혜는 중생 후, 또는 동시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순간적 체험이다.
3. 성결의 필요: 사람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원죄가 있고, 또는 죄로 인하여 부패하여진 악한 정욕, 구습이 있고, 또한 양심이 더러워져있으니, 여기에서 정결을 받아야 된다. 그래야 종신하도록 성결하므로 [주]를 섬기게 될 것이며, 재림하시는 [주님]앞에 흠 없이 서게 될 것이다.
4. 성결의 방법: 이 은혜는 인간의 방법인 수양이나, 교육이나 개혁이나 난행 고행이나, 점진적인 방법 등으로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주의 보혈을 믿음과 순종과 기도로 받는 것이다.
5. 중생과 성결: 중생은 자범죄에서 사함과 생명을 받는 일이고, 성결은 심중에 잠재한 원죄에서 정결함을 받는 일이며, 중생에는 죄가 진압되고, 성결에는 죄의 몸이 멸함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결의 시작이요, 성결은 중생의 완성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헌장이 말하는 성결은 같다. 이 두 헌법이 정의하는 성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결이란 중생 이후에 이루어지는 2차적인 축복이며, 2)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3) 성결의 은혜를 받게 되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죄(혹은 부패성)에서 정결케 되며, 4)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성결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령세례라고 불려지며, 5) 이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 이 헌법에 나타나있는 것이 한국성결교회가 믿는 성결론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런 성결과 성결에 대한 다른 용어들은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가? 먼저 성결과 가장 많이 교차하여 사용하는 용어가 성화이다. 하지만 성결이 주로 중생 이후의 특별한 경험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성화는 중생에서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지칭하여 이르는 말다. 특히 칼빈주의 계통에서 성화는 신앙생활에 어떤 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성화를 성결교회와 같이 중생 이후의 2차적인 경험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칼빈 신학에서는 먼저 성화를 말하고, 그 시작으로서 중생, 그리고 그 완성으로서 영화를 말한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웨슬리는 중생을 초기의 성화, 성결을 온전한 성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성결교회는 성화라는 용어보다는 성결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왔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결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말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기독자의 완전’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성서에서 완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정적인 의미의 완전이 아니라 목적을 향하여 나간다는 의미에서 온전을 뜻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정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말보다는 동적으로 완성을 지향한다는 의미의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목표가 성결이기 때문에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 사용되어져 왔던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천주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특별히 천주교는 신자의 윤리와 성직자의 윤리를 구분하면서 온전한 신자가 되려면 절대순명, 절대순결, 절대청빈의 삼종서원(三從誓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위에 있다는 천주교의 계층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온전한 신앙은 성직자만의 개념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공로를 쌓으며, 그 공로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공로를 통한 구원이다. 그러나 웨슬리안은 율법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완전을 주장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결에 대한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성령세례이다. 아마도 이것은 성결운동이 성결론에 미친 독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성결운동은 부흥운동과 같이 발전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성결은 영적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였다. 우리 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고 못박고 있다. 이 점이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이 웨슬리와 동방교회 신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 가운데 핵심적인 요소가 동방교회의 신화(deification)의 개념과 웨슬리의 성결의 개념이다. 동방교회의 신화는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이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동방교회의 개념은 플라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신학은 플라톤의 신비적인 합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서방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개념들 속에는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웨슬리안 성결론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지 하나님과의 합일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런 용어 외에도 성결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로서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이 있다. 제2의 축복이란 성결은 칭의 이후에 오는 제2의 은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개신교가 칭의의 은총만 강조하는데 비하여 성결운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현재적 구원이란 성결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는 점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여기서 성결을 현세에서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웨슬리안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온전한 구원이란 칭의가 죄의 벌에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는데서 멈추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책뿐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 곧 부패성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은 다같이 성결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 주는 용어들이다.
II. 인간이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타락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에 의하면 성결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따라서 성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며, 또한 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자연적인 형상으로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정치적인 형상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요, 셋째는 도덕적인 형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결론은 이 세 번째 형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성결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자연적인 형상이나 정치적인 형상의 회복은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교부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과 하나님의 모양(similitudo) 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요, ‘모양’이라 함은 그 객관적인 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특별은총을 힘입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모양, 즉 특별은총을 생명나무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실과를 주신 이유는 이 특별은총을 계속 받아야 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의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기독론적인 것으로 성결이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은 같은 말이다. 두 번째는 성령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성령의 계속적인 도우심으로 신자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웨슬리안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불순종은 성령의 특별은총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특별은총 덕분인데, 이것이 사라지자 인간의 본성에는 세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첫째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자범죄(voluntary sin)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이다. 두 번째는 그 죄를 지음으로 주어지는 죄책(guilty)이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부패성(depravity)이다. 부패성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자꾸 짓고자 하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패성은 아담의 죄악된 본성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원죄라고도 부르며, 또한 계속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의미에서 유전죄라고도 부른다.
웨슬리안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원죄, 또는 부패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실 원죄이론은 서방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이다. 그리고 원죄를 가장 철저하게 설명한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원죄를 교만과 욕망이라고 보았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은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망의 가장 적나라한 표현을 성욕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담의 원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담 안에(in Adam)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어거스틴은 인간의 모든 죄악의 원천은 아담의 죄악된 본성, 즉 부패성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 어거스틴의 원죄론은 그 후 칼빈주의 전통에서 강조되어졌고, 이것은 다시금 19세기 장로교의 구파를 통해서 계속 유지되어왔다. 사실 성결운동은 원죄와 부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방기독교, 그리고 칼빈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사실 19세기 성결운동은 자신들을 구파라고 부르며, 진보적인 감리교신학을 신파 감리교(New School Methodism)라고 비판하였다.
일부 신학자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부패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즉 웨슬리안들은 부패성을 육체 안에 있는 일종의 종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제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 의학적인 의미는 아니다. 웨슬리안이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죄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거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안은 부패성을 단지 죄로의 경향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단절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한다. 죄로의 경향성은 타락이전에도 존재하였기 때문에 죄로의 경향성을 부패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부패성을 낳았다. 다시 말하면, 원죄를 단지 죄의 경향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라고 보는 것은 원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본성을 죄성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즉 인간의 죄성을 사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여 죄성의 제거를 본성의 제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웨슬리안 성결신학의 부패성을 오해한 것이다. 웨슬리안은 어떤 신학보다도 인간의 본성과 죄성을 구분한다. 길보른은 “오류의 원인은 많은 삶들이 ‘사람의 성품’과 육의 성질, 곧 죄의 성질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육체는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좋은 것이지만 인간의 죄성, 곧 부패성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본성에 덧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안이 성결을 말할 때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에 덧붙여진 죄성을 제거하고 변화시킨다는 말이지, 인간의 육체 그 자체를 바꾼다는 말이 아니다. 이 육체 그 자체는 우리가 부활의 상태에 들어갈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성결을 죄성의 변화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칼빈주의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타락을 본성의 부패(physical depravity)라고 불렀다. 성령의 역사는 타락한 본성에 새로운 은총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부패성을 변하여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18세기의 칼빈주의자들은 본성의 중생(physical regenerati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의 할례라고도 불렀다. 비록 칼빈주의자들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성결을 단지 관계회복으로 보지 않고, 부패성의 변화라고 본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사실 성결운동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죄성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죄성이라면 인간은 죽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죄성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덧붙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제거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세대주의와 다르다. 세대주의자들은 죄성과 인간의 본성을 동일시하여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본성은 변할 수 없으며, 단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본성과 성령으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성품이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두 본성이론’이라고 부른다. 성결운동은 두 본성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옛 본성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III. 하나님의 구속계획: 두 가지 치유
웨 슬리안 구원론은 아담의 범죄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죄책이요, 다른 하나는 부패성이다. 아담의 죄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것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방법도 두 가지여야 한다. 우드(J. A. Wood)는 그것을 용서(pardon)와 정화(purity)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죄에 대한 벌에서 용서받아야 하며, 자꾸만 죄를 짓는 내면의 부패성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우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 한다:
[용서]는 우리를 위해(for us) 행하시는 신적 자비의 행위이며, [정화]는 우리 안에서(in us) 행해진 은총의 역사이다. 그는 타락을 용서하지도, 그렇다고 죄책을 씻어주지도 않는다. 용서와 정화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죄책을 제거하는 전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자격을 보증한다면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후자는 그것을 위한 우리의 준비를 보증한다.
웨슬리안의 성결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책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부패성이다. 왜냐하면 부패성은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악의 뿌리가 남아있는 한 인간은 또다시 죄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형수가 대통령의 특사로 사면 받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살생의지가 있다면 그 사형수는 밖에 나가서 다시금 살인을 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사면은 살인수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은 살인자의 죄성이 변하여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성결은 바로 이 부패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터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공로구원에 반대하여 이신칭의(利信稱義)를 강조하였다. 루터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를 덧입는 것이다. 이것을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 밖에서(extra nos) 에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이다. 하지만 루터는 천주교의 공로구원에 반대한 나머지 성서가 그렇게 강조하는 인간의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신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무시했다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의 죄성이 정결케 되며 변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역사이다. 인간의 내면이 오염되어 부패해졌다면 이것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은 찬송가이다. 찬송가 186장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초기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강조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여인들이 냇가에서 흰옷을 빠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십자가의 보혈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지만 동시에 성령의 세례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生靈)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은 떠나고 인간의 육체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러면 육체만 남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원래 만들어 놓으신 인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영은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를 성결케 하는 분은 본질적으로 성령이다. 우리 찬송가 178장 2절은 이것을 잘 표현하여 주고 있다: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서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내면의 변화에 대해서 좀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서구윤리는 인간의 덕성 함양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윤리에 의하면 인간이 선행을 반복하게 되면 이것이 습성이 되고 이것이 덕성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며, 이 덕성이 쌓여질 때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여기에 천주교의 공로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을 반대한다. 성경은 새로운 성품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역사인 중생에서 시작된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게 되면 옛 아담은 물러가고, 두 번째 아담이 우리 속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는 참된 인간은 도덕적인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으로 시작된다고 믿는다.
웨슬리는 죄를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로 나누고, 내적인 죄를 부패성이라고 말하고, 외적인 죄를 자범죄라고 말한다. 웨슬리안은 이 부패성을 죄악의 쓴 뿌리라고 부른다. 이 쓴 뿌리가 자라서 외적인 죄, 곧 자범죄를 만든다. 그러므로 자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내적인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또한 성결을 내적인 성결과 외적인 성결로 나눈다. 그가 말하는 내적인 성결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말하며, 외적인 성결이란 율법, 곧 사랑의 법을 준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둘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내적인 성결이 이루어져야 외적인 성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내면의 진정한 변화는 중요한 것이다.
IV. 구원의 이중적인 단계: 중생과 성결
다음으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는 그러면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내면이 변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단계를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가 자연인의 단계이며, 두 번째가 종의 단계, 세 번째가 아들의 단계이다. 자연인의 단계는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불신의 상태이며, 종의 단계는 이미 예수를 주로 믿고 거듭났으나 아직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이며, 아들의 단계는 온전한 성화(성결)를 이루어 마음의 기쁨이 충만한 단계이다. 자연인의 상태는 모든 인류가 공통적이므로 실질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로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웨슬리안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중생은 하나님 백성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다. 이 영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일 뿐 그것 자체로 완성은 아니다. 중생으로 얻어지는 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이제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소욕 사이가 갈등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갈등이 없지만 중생한 이후에는 영과 육의 갈등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웨슬리안이 중생이 신앙의 완성이 아니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출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서 7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살펴보면서 이미 중생했지만 자신의 속에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웨슬리안의 주장은 단지 성서를 그냥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중생의 체험 직후에는 큰 기쁨이 있고 죄를 이길 수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자신의 속에 죄악의 세력이 남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경험을 통해서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중생 이후에 우리의 속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잔여죄(殘餘罪)라고 부른다.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는 분명히 옛날과 같은 성품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온전히 변화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 아담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것을 웨슬리는 신자의 죄라고도 부른다.
이 잔여죄에 대해서 몇 가지 입장이 있다. 먼저 칼빈주의자들은 이 잔여죄는 인간의 육체가 존재하는 한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따라서 신자의 삶이란 영과 육의 갈등의 연속이며,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오히려 이런 갈등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신앙을 유익하게도 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웨슬리안은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영육의 갈등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승리라고 믿는다.
다음으로 19세기의 일부 진보적인 감리교도들은 중생 때 인간의 죄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뉴 헤이븐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자범죄만 인정할 뿐 죄성을 부인한다. 인간의 죄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중생 이후에 죄성이 남아있다는 것도 부인한다. 잔여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 잔여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제 2의 은총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진보적 감리교는 중생 이후에는 지속적인 성화만 있을 뿐 제 2의 은혜로서의 성결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에 대해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중생 이후에도 여전히 잔여죄가 남아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결은 중생 이후에 오는 것으로 중생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차적인 은혜라고 지적한다. 중생으로 인해서 죄성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성결로 인해 죄성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웨슬리안은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한다. 즉 성결에서야 자범죄만이 아니라 부패성(죄성)에서 온전히 해방되기 때문이다. 성결운동은 내적인 부패성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아직 운전한 구원의 상태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 남아있는 죄성이 다시금 우리를 죄악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결운동이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하는데 다양한 패러다임을 사용한다. 먼저 이들은 구약의 출애굽 패러다임을 이용하여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중생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결이다. 애굽이 불신앙의 상태라면, 광야시대는 영육의 갈등의 상태요, 가나안은 영의 승리의 상태이다. 또한 성결운동은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들어서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한다. 부활절이 중생의 상태라면 오순절은 성결, 곧 성령세례의 상태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중적인 치유가 원칙적으로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자의 신앙경험이 항상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사람은 여러 차례의 신앙체험을 거쳐서 성결에 이르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단 일회적으로도 온전한 은혜의 상태에 들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세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가 표준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앙의 경험을 두 단계로 도식화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본다.
성결운동은 성결의 상태가 천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도덕적인 형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지 자연적인 형상과 정치적인 형상까지도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성결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지로서의 죄, 연약하여 짓는 죄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언제든지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타락이전의 아담이 죄성이 없었는데도 사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타락 이전에 부패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다면 성결한 신자도 다시금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결은 인간의 한계 내에서의 성결이지 결코 인간을 신적인 위치에 놓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안은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한 인간은 영화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점에서 성결운동과 칼빈주의는 사실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은 다같이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무지와 연약함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결운동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천사와 같은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복음적인 완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V. 성령의 역사로서의 성결: 성령세례
웨슬리안 성결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은 성결교파들이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면 웨슬리안이 왜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말했을까? 웨슬리는 일찍이 성결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문제는 이 성결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처음 사용한 방법은 은총의 수단이다. 그는 열심히 교회가 정해주는 성례전에 참여하고, 선행을 실천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이때 그에게 모라비안은 믿음을 강조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 후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한 것이다.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일종의 성령체험이다. 그 후부터 그에게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칭의가 우리를 위하여(for us)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us)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결을 성령세례와 보다 분명하게 연관시킨 것은 웨슬리의 후계자들이다. 한때 웨슬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풀렛처는 성결은 성령세례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성령세례로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 후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특별히 19세기의 성결운동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팔머의 부흥운동,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전국성결연합회의 부흥운동은 성결을 성령의 역사로 강조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신학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여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어거스틴적인 신학이나, 아니면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여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는 펠라기안적인 신학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너무 비관적이며, 후자는 너무나 낙관적이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부패성을 믿으며, 펠라기안과 같이 온전한 기독교인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안은 펠라기안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에 근거한 인본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성서신학계는 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에 대해서 논란 중이다. 제임스 던을 중심으로하는 성서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는 세례 시에 성령세례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세례는 2차적인 세례가 아니라 일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개혁파신학자들은 여기에 동의한다. 개혁파신학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으므로 이차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세례시의 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이라고 부른다. 이 세례시의 중생이론에 따르면 신자들은 본인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세례 시에 중생하며,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천주교의 성례전 교리, 즉 신부가 성례를 집전할 때 자동적으로(ex opera operato) 로 은혜가 임한다는 교리에 근거한 것이다. 원래 개신교는 성례가 자동적으로 은혜를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믿음에 의하여 은혜를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의 세례시의 중생론은 개신교의 원리에 철저하지 못하다고 본다.
천주교는 세례를 받을 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씻김 받는다고 본다. 천주교는 세례는 원죄를 씻어주는 효과가 있으며, 따라서 유아도 세례를 받지 못하면 원죄에서 씻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멸망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천주교는 이런 역사는 신자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신비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천주교의 유아세례는 원죄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성의 파괴는 형식적인 세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인격적인 역사로 인해 나타나는 중생과 성결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중생 때 죄성이 부분적으로 붕괴되어지며, 성결 때 온전히 변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세례와 천주교의 성례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는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세운 은총의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이나 믿음에 관계없이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이런 전례주의를 반대한다. 물론 원칙적인 의미에서 성례전은 은총의 수단이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기존교회에서 전례가 은총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단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을 보아왔다. 따라서 그들은 성례전을 강조하기보다는 개인의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를 통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례전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보다는 개인의 경건생활을 통한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성결운동의 영성의 중요한 측면이다.
일부 웨슬리안 신학자들은 성결운동의 성령세례와 천주교의 견진성사가 서로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성결운동이 성령세례를 물세례(혹은 중생)에 이은 두 번째 은혜로 보는 것과 같이 천주교는 견진성사를 세례 다음에 주어지는 성례전으로 본다. 천주교는 세례가 신자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의식이라면 견진은 실제적으로 신앙인의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식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견진은 성결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성결운동은 이런 외적인, 신학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성령세례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물론 견진성사에도 함께 할 수 있다. 하지만 견진을 받았다고 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결운동은 성령세례는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간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성결운동이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이 있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세례를 받은 일차적인 증거를 방언으로 이해한다. 이런 은사에 대한 강조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은사로 보게 하는 오류를 갖게 만들었다. 물론 필자는 은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 나타난 은사는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성령의 본래적인 사역은 은사에 있다기보다는 죄인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세례는 성결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다같이 성령세례를 성령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받고 능력을 얻어서 세계선교에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처음부터 선교를 위한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성서학원의 목적은 성령세례를 받아서 능력 있는 사역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성결교회는 성령세례는 거룩한 삶과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하지만 성령세례가 한편으로는 성결이라는 윤리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단지 윤리로 제한되는 것은 잘못이다.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성령의 체험이다. 이것을 종교학자들은 거룩의 체험이라고도 부른다. 이 거룩의 체험을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삶의 원천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의 체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룩은 일차적으로 체험이며, 이차적으로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성결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신앙과정에서 이런 체험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종교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I. 성결에 이르는 길: 점진적인 노력과 순간적인 은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은 강조하면서 성결의 점진적인 측면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웨슬리는 점진적인 성결과 순간적인 성결을 조화롭게 강조했는데 19세기 성결운동가들은 일방적으로 순간적인 측면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19세기 성결운동은 순간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점진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성결교회가 순간적인 성결을 강조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결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성결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것은 순간적일 것이다. 선물은 항상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결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칭의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성결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결은 덕성의 함양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많은 성결운동가들은 성결이 점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진화론과 관련시켰다. 신학적 진화론자들은 성결을 점진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신학적 창조론자들은 성결을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보스턴 대학교의 신약학자 다니엘 스틸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을 신약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신약성서에서 성결에 관련된 단어를 조사한 결과 거의가 부정과거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부정과거용법은 지속적이거나 습관적이거나 반복적인 행위를 지칭하지 않고, 순간적이며, 일회적인 사건을 설명한다. 이것은 성결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뒷받침 해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팔머의 제단신학에서이다. 팔머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결을 체험하지 못한 이유는 성결은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결추구를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팔머는 오히려 성결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제단신학을 내세웠다. 제단신학이란 “제단이 제물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마태복음 23장 19절에 근거하여 우리가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자아의 포기이며, 이 포기는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팔머는 수많은 사람들을 제단으로 초청하여 안수하므로 성령세례, 곧 성결의 체험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팔머 방식의 성결운동은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 잘 들어맞았다. 성결운동은 주로 부흥운동에서 일어났으며, 부흥회는 목회와는 달라서 짧은 기간 내에 결과를 얻어야 한다. 미국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부흥운동적인 컨텍스트에서 발전하여 왔으며, 순간적인 성결의 체험은 이런 부흥회와 잘 어울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성결운동이 성결의 점진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성결운동의 주장은 인간은 성결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정작 성결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물을 받는 사람이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실질적으로 성결운동은 성결을 위해서 진지한 준비를 할 것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이명직 목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중생도 성결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이명직 목사는 “첫째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각, 둘째 자기의 죄에 대한 통회, 셋째 그것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행위, 넷째 자신의 죄 값을 변상하는 회개의 열매, 다섯째 그 결과로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이 그냥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결신학은 중생 이후에도, 그리고 성결 이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성결의 체험에 있어서 은총의 수단의 사용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 성례전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는 은총의 수단이다. 웨슬리에게는 성례전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화되면서부터 은총의 전달은 없어지고, 단지 의식만이 남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부흥운동은 여기에 대한 도전으로 생긴 것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한국성결교회가 비전례적(非典禮的)인 태도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례가 바로 행해져서 이것을 통해 신자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역사가 없이 단지 전례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맺는 말: 한국성결교회 성결론의 역사적인 위치와 특징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을 보다 폭넓은 기독교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성결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다양한 전통들과 어떻게 다른가?
동방교회는 성결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전통에 서있는 한국성결교회는 성결을 신이 된다는 개념보다는 죄악의 본성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천주교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용어를 강조한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직자의 윤리와 평신도의 윤리로 나누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계층구조를 만들었다. 아울러서 천주교의 성결은 공로구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이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칭의의 교리는 강조하였으나 성결의 교리는 강조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루터에 비해 성화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은 이 세상에서 가능하며, 모든 신자들은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웨슬리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성결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성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19세기 성결운동은 성결은 한편으로는 내면적인 부패성에서의 해방이며, 이것은 성령의 세례로서 가능하고, 이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만든다고 보았다.
19세기 성결운동에서 오순절 운동이 나왔다. 오순절운동과 성결운동은 다같이 성령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보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에 강조점을 둔다면 오순절운동은 보다 은사적인 측면에 강조를 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기독교신학의 중심주제인 성결을 다시 강조하였다. 많은 개신교가 루터의 칭의교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여 성서와 기독교신학의 중심주제인 성결을 잃어버렸는데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이것을 다시금 회복시킨 것이다.
둘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결을 건전한 기독교신학의 전통에서 재확립하였다. 신학은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에 빠져 신인합일을 주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도덕폐기론에 빠져 도덕을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이런 양극에 빠지지 않고 성서적인 성결론을 형성하였다.
셋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체험과 윤리를 잘 조화시킨 성결론을 갖고 있다. 일부 종교는 윤리를 상실한 신비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다른 종교는 초월을 상실한 딱딱한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성결이 성령세례라고 규정함으로써 성결의 윤리와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넷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목회의 지평을 확대시켰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전해야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온전한 구원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성결교회는 성숙한 기독교를 만드는데 공헌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결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결교회는 불신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전하고, 신자에게는 성결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것을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성결론이 다시금 신학의 중심주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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