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일 월요일

공동체의 선교적 의미

김현진 목사(사귐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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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선교

공 동체와 선교의 관련성은 다음과 같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선교사로 파송 하시고 또한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회복케 하셨다. 즉 죄로 파괴된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이 모두 공작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선교란 단순히 개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개인적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충만한 삶을 사는 총체적인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1장 1-3절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 도요한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누리고 경험한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은 우선 자기들과 ‘사귐’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들과의 사귐은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 임을 말하고 있다. 즉 선교의 목적이 사귐으로서, 서로가 하나 되고 삼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를 짓기 이전의 원 상태로의 회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사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인간에게 기대하였던 그러한 수준의 성취에 이르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의 회복’이 선교의 목적이다. 선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존재양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선교의 목적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공동체의 회복이기에 선교 방식도 공동체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종류의 선교 방식

지 금까지의 선교는 주로 해외에 개인의 선교사를 보내는 형태였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해외에 가는 선교만 아니라 다른 선교의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구심력적 선교 방식이고(centripetal mission) 둘째는 원심력적 선교방식(centrifugal mission)이다. 원심력적 선교는 복음을 모르는 먼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방식이다. 이에 비하여 구심력적 선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흡인력 있게 끌어들여서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방식이다. 공동체 생활은 그 자체가 선교훈련이며 선교의 장이다. 현대 선교의 문제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일에는 활발하지만 선교사를 훈련하고 파송하는 몸체(sending body) 의 기능이 약하다는 것이다.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전하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세계선교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있겠는가? 진실한 사랑이 없는 선교는 종교적인 사역에 불과하다. 성숙한 삶은 성숙한 사역을 낳는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저희로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진정으로 하나 된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에 그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공동체 생활은 사람들을 공동체의 성숙한 삶으로 끌어 들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선교의 장이며, 서로 사랑하는 삶의 방식을 훈련하는 선교훈련의 장이며, 공동체 삶의 훈련을 통하여 갖추어진 선교사를 세계에 파송하는 선교 센터이다. 이러한 선교방식을 ‘공동체 선교’(community mission)'이라고 부른다.

공동체 선교는 네 단계를 갖는다. 첫째 단계는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어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사랑의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훈련시켜 선교사로 파송하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개인 단위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 팀으로 선교지에 파송하여 현지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한 몸된 아름다운 생활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이 팀들이 선교사역을 마치면 다시 공동체로 돌아와서 그들의 실제적인 경험을 통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공동체 생활은 그 자체가 흡인력 있는 선교의 장이며 동시에 효과적인 선교훈련의 장이며 선교사 파송 기관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는 그 동안 단순히 해외에 ‘가라’고 하는 원심력적 선교 방법으로 활발하게 세계선교에 임해왔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의 선교는 공동체선교 방식으로 전환하여 균형 잡힌 선교를 시작해야 할 적기의 단계에 와 있다. 지금까지의 선교를 위해서 많은 눈물의 기도와 소중한 헌신들이 있었다. 주님께서 반드시 귀하게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번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통해서 종래의 선교방식을 재고해야 한다. 단순히‘가서 전파하라’에 치중한 원심력적 선교는 땅 밟기, 대규모 집회, 영적 전쟁, 복음 선포 등의 방식으로 행해져 왔다. 특히 회교권의 중앙 아시아와 중동 같은 같은 적대적인 지역에서의 선교는 조용한 사랑의 공동체 삶으로 그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흡인력 있는 공동체를 통한 선교방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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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공동체 선교

(1)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 공동체

니 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는 야곱 스페너에게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자였다. 법률을 공부하고 드레스덴 궁정에서 공직으로 봉사했다. 드레스덴에서 모라비아교도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원래 박해를 피해 고향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였는데 1722년 진젠도르프는 이들에게 베르텔스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모라비안들의 정착지를 ‘주님이 지켜보시는 곳’이라는 뜻의 ‘헤른후트(Hernhut)'라고 불렀다. 크리스천 데이비드는 몇 차례 더 모라비아로 가서 여러 가족들을 이끌어 왔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2년이 채 안 되어 150여 명의 대식구로 불어났다. 1727년경 이 공동체에는 2백여 명의 모라비아 이주자들 외에도 그들에게 합류하기를 원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헤른후트 공동체의 시작이었는데, 이곳은 곧 진젠도르프의 주도하에 널리 확산된 갱신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헤른후트 공동체가 신약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이상을 추구할 자유가 있는 곳이며 신앙의 피난처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서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로부터 온 피난민들,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분리주의자, 심지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까지 헤른후트로 몰려들었다.

1725년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 공동체 회의를 소집하여 공동체의 규약과 규칙을 정하여 헤른후트 공동체가 지방 루터 교회에 대해 충성한다는 것과 공동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1727년 ‘성찬식’에서 오순절날과 같은 성령체험을 하게 되면서 영적 각성과 발전의 계기를 가졌다. 진젠도르프는 그날을 ‘회중들 위에 성령이 부어진 날’ 또는 ‘회중들의 오순절날’로 묘사했으며, 쉬팡엔베르그는 “그때 우리는 하나의 사랑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했고, 크리스천 데이비드는 “카톨릭, 루터파, 개혁파, 분리주의자 등 수많은 종파를 배경으로 한 우리가 모두 하나로 녹아 붙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1727년과 그 이후 10년 동안 헤른후트에서 전개된 사건들은 ‘은사적인 갱신(charismatic renewal)'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1731년에는 다양한 성령의 역사-특히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에 있었던 ‘속회(band-소그룹 공동체)' 등 소규모 모임들이었다. 또 다른 혁신으로는 철야 기도가 있었다. 집단적인 기도든 개인과 개인으로 연결되어 나가는 기도든 하루도 빠짐없이 24시간 동안 기도가 이어져 내려갔다. 이 기도는 백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이것이 세계 선교를 위한 그 유명한 ’백년 기도 모임‘이다. ’속회(나중에는 ‘작은 공동체(Kleine Gesellschaft)' 라 불리게 됨.)’는 1727년 7월 헤른후트에서 처음 조직 되었다. 이 모임은 보통 2-3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모임으로, 성별 또는 기혼 여부에 의해 나누어져 일주일에 1-2회, 보통 저녁때 모이곤 했다. 이러한 모임들이 헤른후트의 혁신이었고, 전형적인 경건주의 모임인 ‘경건한 모임’보다 비교적 작으면서 열성적인 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옛 모라비아 전통을 갱신한 것이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다. 독신 형제들의 양털실 제조업은 매우 번창하였고, 독신 자매들이 짠 천과 섬세한 자수품들은 유럽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헤른후트 공동체의 뒤르닝어(Durninger) 회사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농장과 제과점은 모범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모든 이익금은 공동기금인 ‘어린 양의 금고(Treasury of the Lamb)’에 넣어졌다. 농장 일이든 선교활동이든 헤른후트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일은 ‘어린 양’을 섬기는 일로 간주되었다. 진젠도르프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어느 곳에서든 참된 공동체 정신으로 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백 명의 형제들이 가난과 고통 중에 있고, 세계 곳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헤른후 트 공동체는 공동 생활의 물질적․사회적․경제적 측면을 다 감당하였다. 그 공동체는 육체적인 요구를 위한 시간과 돈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요구하도록 조직되었고, 능률적인 경제활동에서 오는 경제적 이익은 부차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들의 신앙 생활과 물리적 환경은 능률적인 공동체 조직을 필요로 했다. ‘조’ 체제는 이 같은 목적에 효율적이어서 음식과 의복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커다란 집이 숙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헤른후트와 베들레헴을 비롯한 여러 정착촌의 모라비아인들은 공동체 생활 안에서 생산과 소비 양면에서 괄목할 만한 경제 규모를 갖추고 경제적․사회적․종교적 기능을 집중 결합시켰다. 이 같은 문제는 재산 전체를 공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러한 일사불란한 헤른후트 공동체는 삶의 개인적․경제적․사회적․종교적 차원들이 하나의 공통된 체계로 통합된,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가족으로서 완전한 공동체’였다. 진젠도르프는 공동체를 결성하고 유지시켜 나가는 데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는 교제(koinonia)없는 기독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 공동체를 통하여 모라비아 선교사역을 확장하는 일에 힘썼다. 모라비아 공동체는 ‘선교 공동체’였다. 1732년 레오나르드 도버(Leonard Dober)가 서인도 제도의 덴마크령에 있는 노예들에게 파송되었고, 1733년 1월에는 크리스천 데이비드(Christian David)와 다른 두 명의 형제가 그린랜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그 형제단은 대륙의 여러 지역과 광범위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 1734년에는 아우구스트 쉬팡엔베르그(August Spangenberg)를 포함한 여러 형제들이 공동체를 설립하고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조지아에 파송되었다. 1735년 여러 가족을 포함한 비교적 큰 모라비아 집단이 영국을 경유하여 조지아로 가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미국으로 가고 있던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를 만나 그들의 회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760년까지 모라비아인들은 226명의 선교사들을 외국에 파송하였다. 그 해에 형제단은 그린랜드, 자메이카,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앤티가, 수리남, 바베이도스 그리고 북미 인디언들 사이에 총 13개 지부를 통해 3,057명이 세례를 받고 6,125명이 모라비아인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모라비아 이산민 신도회(Moravian Diaspora Societies)’ 와 영국, 북미, 유럽 대륙에 있는 모라비아 정착촌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숫자였다. 1천 8백 년, 형제단에는 161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고, 2만 4천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선교활동에 관련되어 있었다. 진젠도르프가 이끌어간 선교공동체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대륙과 영국, 베들레헴과 나사렛 그리고 신세계의 펜실베이니아 같은 곳에 세워진 여러 모라비아 공동체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정착촌들은 광범위한 설교와 선교활동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교회역사가 케네스 라토렛(Kenneth Latourette)은 헤른후트 공동체의 선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 독교의 확장사에 있어서 매우 새로운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전파를 위하여 가족들과 독신자들로 구성된 완전한 공동체를 통한 선교이다.” 선교라는 단순한 목적을 이룬다는 면에서 볼 때, 초기의 수도회의 형태와 흡사하다. 이것은 평신도와 성직자, 남자와 여자, 기혼자와 미혼자가 함께하는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주된 목적인 복음 전파는 일부 그룹이 담당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전 멤버가 투신하였다.

월리암 케리의 선교보다 50년 앞선 헤른후트 공동체의 라비안 선교사의 공헌은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지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모라비안들은 18세기에 가장 광범위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근대 선교학의 대부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은 "헤른후트 공동체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20년간 한 선교 사역은 이후 개신교 전체가 200백년 동안 실행한 선교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라고 언급했다. 1900 년 뉴욕에서 열린 초교파 선교대회에서 존 모트(John Mott)도 “헤른후트 공동체의 모라비안 형제단은 해외 선교사역 가운데 선교지 현장에서 가장 놀라운 성취를 이룬 예이다. 그들은 지닌 능력에 비례해서 다른 어떤 기독교 단체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선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업적을 이룬 모라비안 선교단의 뿌리는 사실 공동체였다. 이 모라비안들은 1415년 종교박해 때 존 후스(John Hus)의 화형을 시발로 일어났던 개혁 의지를 지닌 기독교인들 중 공동체 삶을 모색하고 있던 약 1458명의 평신도 그릅이었다. 초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계약의 형제들(fratres legis Christi)’이라 불렀으며, 나중엔 ‘형제들의 연합(Unitas Fratum, 형제단)‘이라 자칭했다. 그들은 동방교회에 어느 정도의 뿌리를 두고 있었고 자주 핍박을 당했는데 특히 30년 전쟁과 종교개혁 기간에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중 일부가 피난하여 진젠도르프의 사유지에 정착한 형제들이었다. 첫 모라비아 난민은 작업도구를 메고 선교의 부르심을 쫒아 여러 곳으로 나아갔던 식탁용 칼 장수들이었다. 그들은 신앙과 경제활동을 하나로 결합시킨 공동체를 형성했다.

모라비안 선교단은 원래의 정체성이 형제단 공동체였고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다른 교파신도들과 함께 공동체로 살면서 해외 선교에도 헌신했다. 헤른후트 공동체의 놀라운 선교업적은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과 사랑의 공동체, 그리고 선교적 열정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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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윌리엄 케리의 선교 공동체

인 도 힌두권의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저 위대한 월리엄 케리(William Carey)는 초창기의 인도선교 사역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케리보다 볼품없는 작은 모라비안 공동체(헤른후트 공동체에서 인도로 파송된 평신도 선교사들)는 케리보다 훨씬 활발하고 열매있는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었다. 정식 선교사였던 케리는 자존심이 상하였으나 그들의 선교 비결을 배우기 위해 모라비안 선교부로 직접 가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선교 사역의 비결은 무엇입니까?”이 때 모라바안 형제들은 이렇게 말했다.“와서 우리와 함께 며칠 살아보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그래서 케리는 모라비안 공동체에 가서 그들과 며칠 지내면서 그 비결을 알게 되었다. 모라비안 형제들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였고 거기엔 형제들간의 공동 기도, 공동식사, 나눔, 사귐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조용한 기쁨이 있었다. 모라비안은 선교 사역 이전에 공동체를 통한 존재의 충만함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 삶에 힌두교를 믿는 현지 주민들도 초대되어 모라비안의 공동체에 잠시 머물면서 “ 아! 이들은 우리와 무엇인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주게 되었고 기독교에 이끌리게 하였다. 이러한 작은 공동체가 현지인들에게 복음 전파의 접촉점이 되었다. 사랑의 삶을 보여준 것이었다.

모 라비안 공동체에서 돌아온 케리는 선교비를 모아 자신의 집에 공동체 집을 증축하여 1800년 인도의 세람포레에서 모라비안과 같은 작은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그 후로 케리의 선교사역은 점점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월리암 케리의 생애의 저자이며 그 손자인 피어스 케리(S. Pearce Carey)는 인도 선교지에서 모라비안 선교단의 공동체에 영향을 받은 월리엄 케리의 공동체 생활을 다음과 같이 상술하였다.

선교사 여섯 가족들은 케리의 지도하에 생활 공동체로 조직되었다. 비록 각 가정은 알맞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 식사도 했으나, 전 구성원의 수입은 공동재정으로 처리되었다. 결정은 다수결 투표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각종 집안 일로부터 매일 예배 담당 임무까지 월단위로 서로 돌아가면서 맡았다. 주일 저녁에 열리는 주간 회의는 전 주간에 있었던 불만들을 공개적으로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가족의 모든 지체들에게 개방되었다.

월리암 케리는 “공동체 삶을 통한 선교는 가장 바람직한 선교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수십여 부족어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위대한 선교사역을 펼쳤던 월리엄 케리도 작은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선교 사역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공동체 선교의 시대적 요청

오 늘날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식은 자신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가므로서 복음을 증거(witness)하는 것이다.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구심적 선교는 절대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삶을 통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던 말과 행위, 믿음과 일, 경건과 순종의 일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선교학자인 바바라 헨드릭스(Barbara Hendricks)는 현대 선교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미래 선교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의 심장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실제적 통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의 공동체에 있다.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 라고 하는 말이 가리키는 공동체의 삶이 새로운 제자들을 몰려오게 한 바탕이다. 미래 선교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차원이 있다. 이 공동체의 차원은 초대 교회 이후로 종종 암시적으로 언급이 되긴 했으나 선교의 모든 중요한 다른 차원들처럼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던 선교사역의 진정한 핵심이다. 그것은 바로 선교사들의 공동체 삶을 통한 증거이다. 즉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증거인 실제적 공동체이다. 선교에 있어서 공동체는 모든 미래 선교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결국 사랑의 공동체로 표현된다. 공동체 생활은 활발한 선교 사역의 선행조건이다. 랄프 머튼(Ralph Morton)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 람들이 공동체 삶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들이 개인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래동안 잊고 있었다. 우리는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기독교 공동체로 살아야한다. 선교사역이 뿌리를 내리는 곳은 어디든지 성숙한 공동체가 자라나는 곳이다.

중앙 아시아, 중동 같은 이슬람 국가들은 항상 십자군 전쟁을 위시한 기독교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서 수탈을 당해왔기에 항상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과 의심의 눈초리를 품고 있다. 이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단기간 봉사나 말로 복음을 전하기 전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먼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또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삶이 작은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서로 믿지 못하고 섬기지 않는 자신들의 삶과 무엇인가가 다름을 장기간의 삶을 통하여 현지인들에게 보여 주어여 한다. 그러할 때에 복음은 영향력 있게 증거될 수 있다.

현대 영성 신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rad)는“복음을 선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이다. 복음 선포의 자유가 제한된 선교지에서는 복음을 마음껏 외칠 자유는 없지만 바르게 살아갈 자유는 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불신자들이 물어올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응답하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구 공산권 구가들- 북한, 중국, 몽골,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의 나라들은 오랫동안 공산주의 체제였다. 비록 실패한 체제였으나 공산주의도 사회주의 공동체였다. 이러한 바탕이 구 공산권 국가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 삶을 통하여 복음을 중거하는 데에 잇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

공동체 생활 자체가 본질적 교회이며,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이 바로 선교훈련이며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이다.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것이다. 진젠도르프 백작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헌신된 선교사들이 길러져서 온 세계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성령의 공동체의 삶은 사탄의 계략을 분쇄하고 승리할 수 있는 선교적 삶이다. 공동체 선교를 통하여 제 2의 모라비안 선교 공동체들이 한국 교회에 나와야 한다.

특히 공산주의라는 사회주의 공동체 체제하에 있던 구공산권과 북한에 대한 선교는 자본주의(capitalism)도 공산주의(communism)도 아닌 공동체주의(communalism)로 접근해야 한다. 중국의 예수 가정은 그들의 신실한 공동체 삶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변화시켰었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의 변방지역에 공동체 멤버들을 파송하여 선교 현지에서 공동체로 살면서 영향력 있는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백투 예루살렘 (Back to Jerusalem) 운동을 시작한 현대의 공동체 선교의 모델이 되었다.(예수 가정에 대해서는 핸드북 뒤편의 부록: ‘중국의 예수가정’ 을 참고할 것)

공동체 선교는 지금까지 선교학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선교에 있어서 “열방으로 가라”는 대위임령은 강조되었으나 “서로 사랑하라” 는 새 계명을 통한 공동체 선교는 경시되어 왔다. 미래의 선교는 공동체 선교이다. 공동체 선교(community mission)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13: 34-35, New commandment)의 실천을 통한 구심력적 선교와 온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대위임령(마 28: 18-20, Great commission)을 통한 원심력적 선교의 조화이다. 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이며 동시에 선교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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